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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젼정 Jan 03. 2023

전업주부의 처지


딸은 올해로 열한 살이 되었다. 아이가 크면 다시 누릴 수 있게 될 자유로운 생활, 줄곧 나는 그런 시간을 기다려왔다. 아이와 함께 문을 연 새로운 세계는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이었다. 그것이 행복이든 고통이든.


육아가 힘들 줄은 알았지만  정도인지는 몰랐다. 까다로운 기질의 아이를 키우면서 나는 나의 모성을 자주 의심했다. 인간의 밑바닥에 깔린 본성에도 대해서 자주 생각했다. 아이는 밤마다 까닭 없이 울어대고 수시로 물을 쏟았다. 울지 말라고 살살 어르고 달래주는 엄마가 되고 싶었다. 물을 쏟아도 다음부터 그러지 말라고 나긋나긋 이야기해   있는 엄마가 되고 싶었다. 현실은 이상과 달랐다. 그런 일이 벌어지면 나는 대번에 언성을 높였다. 망설이지도 않고 일단 소리부터 지르는 날도 많았다. 어떤 날에는 나를 테스트하는 것처럼 아이는 한번 울면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아무리 놀아줘도 수월하게 낮잠을 자는 일도 없었다. 자동차나 지하철을    어디론가 이동할 때만 아이는 지루함을 예상한  스스로 잠을 청했다. 낮에 아무리 신나게 놀고 와도 밤에는  다른 놀이가 있다는 듯이  활기찬 아이를 보며 나는 자주 지쳤고 힘들었다. 그럼에도 행복했다. 하루가 다르게 아이기 자라는 모습을 곁에서   있었기에 그것으로 충분했다.  

아이가 네 살이 되었을 때 어린이집에 보냈다. 당장 일을 할 계획이 없었기도 했고 아이가 까다로운 기질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았기 때문에 남의 손에 쉽게 맡길 수가 없었다. 처음 어린이집에 아이를 맡기고 나와 근처에서 커피를 마실 때 기분을 기억한다. 적응기간이어서 한 시간 정도 후면 데리러 가야 했는데 그 시간이 어찌나 소중했는지 모른다. 어린이집에서 돌아온 아이는 늘 요구사항이 많았다. 특히 놀아달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는데 그 말이 나오면 모두 긴장했다. 상황극을 좋아하는 아이와 놀아주기 위해 내놓아야 했던 에너지가 어른 입장에서는 꽤나 부담스러웠다.


육아를 하면서 잠깐 맞벌이를 한 적도 있었다. 아이가 다섯 살이 되었을 때 1년 3개월 동안 맞벌이를 했다. 일을 할 때는 나름대로의 행복이 있었다. 회사 동료들과 점심시간마다 근처 카페를 찾아다니고 수다를 떠는 재미에 흠뻑 빠져있었다. 다시 일을 배워야 하는 스트레스도 있었지만 ‘다시 일을 할 수 있을까’ 에 대한 답을 찾은 것만 같아 좋기도 했다.

육아에서 해방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맞벌이를 할 때 집에서 7시가 조금 넘으면 나왔고, 8시가 넘어서야 집에 돌아왔다. 인천에서 서울로 출퇴근했던 나는 나대로, 남편은 남편대로, 아이를 봐주는 친정엄마는 친정엄마대로, 혼자 집에 남겨진 아빠는 아빠대로 모두 제 몫을 해내느라 바쁘고 힘든 시간을 보냈다. 친정엄마도 형편이 넉넉지 않아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이를 봐주는 내내 발을 동동 구르는 게 눈에 보였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많은 돈을 벌었느냐 묻는다면 그것도 아니었다. 그 귀여운 월급으로 엄마에게 돈을 드리고 나면 실제로 남는 건 별로 없었다. 그럼에도 아이가 좀 컸으니 일을 해야 손해가 아니라는 생각이 컸다. 그러는 와중 작고 큰 사건들이 있었는데 일단 아빠의 건강이 눈에 띄게 안 좋아졌다.


“나는 돈을 벌어서 우리 삶이 얼마나 좋아졌는지 사실 잘 모르겠어. 우리한테는 네가 필요하고, 아빠한테는 엄마가 필요해.”


남편의 그 말이 내 고민을 끝내주었다. 나는 그렇게 다시 전업주부가 되었다. 친정엄마도 다시 자기 생활로 돌아갔다. 내가 회사를 그만두자마자 아빠는 중환자실에 입원했다. 건강이 그렇게까지 나빠졌는지 몰랐다. 평소 우울감이 있는 아빠가 엄마가 집을 비운 사이 술에 더 의존하게 된 것이었다. 물론 엄마가 집을 자주 비워서라고만 할 수는 없다. 아빠 스스로 그런 상황에 빠진 것일지도 몰랐다. 그렇지만 마치 기다린 것처럼 내가 일을 그만두자마자 아빠는 중환자실에 들어갔다.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나서는 내가 전업주부인 게 다행이라는 생각을 자주 했다. 그즈음 코로나가 유행하기 시작해서 학교를 거의 나가지 못했기 때문에 더더욱 그랬다. 등교가 중지되어도 나는 크게 놀라지 않았다. 내가 집에서 충분히 돌볼 수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일하는 사람들이 너무 곤란해서 어쩌나 싶었다. 그 시간들이 지나고 이제 아이는 4학년을 앞두고 있다. 3학년이 되었을 때부터 아이는 혼자 학교를 가고 학원을 다니기 시작했다. 가끔 날이 좋지 않을 때 우려스러운 마음에 따라나서기도 했지만 아이는 나의 동행을 원치 않았다. 언제쯤 혼자 학교에 가려나, 학원에 가려나 싶었는데 벌써 그런 때가 온 것이다. 기특한 마음으로 그것을 바라보다가 문득 내 처지가 곤란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에게 내가 필요했기 때문에 곁에 있어주었는데 이제 그럴 필요가 없어져 가고 있는 현실을 자각하게 된 것이다. 나는 이제 무슨 이유로 전업주부라는 직업을 유지할 수 있을까. 요즘 전업주부라고 하면 누가 알아주기나 할까. 집에서 편하게 논다는 표현으로 뭉개지기 일쑤다.


아이는 클수록 일하는 엄마를 좋아한다는 말도 그렇다. 아이가 어릴 땐 곁에 있어주는 엄마가 좋다더니 크면 갑자기 일하는 엄마가 좋다고 한다. 아이가 크기 전까지 다시 일할 발판을 마련해 놓아야 하는 치밀함을 내가 또 놓친 모양이다. 글을 쓰고 싶어서 글을 쓰고 있긴 하지만 내 직업을 그런 쪽에 갖다 붙일 수 있을까. 그렇지가 않다. 글을 써서 돈을 벌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남편에게 이런 고민을 말하면 늘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한다. 참 고마운 마음이다. (나는 그렇게 말해줄 수 없을 것 같은데!) 내가 글을 쓰고 싶어 하는 걸 아니까 그렇게 말해준다는 사실을 나는 안다. 그렇게 말해주는 사람이 오직 남편뿐이라는 사실도 잘 안다. 남들에게 내가 진로고민을 털어놓으면 다들 현실적은 대답을 해준다. 그 대답이 무례하게 느껴지거나 나쁘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마음이 자주 허해진다. 내가 그들에게 마음에 있는 말을 다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글을 쓰고 싶은데, 이런 말을 할 수가 없다. 상대가 너무 어이없어하거나 당황스러워할 것 같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반응을 예상하는 이유는 나조차도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작가를 직업으로 삼을 정도로 능력이나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런 질문에 도저히 그렇다는 대답을 할 수가 없다. 나에게 있어 글쓰기라는 것이 그렇다. 잘하고 싶지만 잘한다고 말할 수 없는 일이다. 직업으로 삼고 싶지만 내가 그렇게 하고 싶다고 될 수 있는 직업이 아니다. 얼마 전부터 나는 소설을 쓰고 있다. 꽤 오래전부터 소설을 쓰고 싶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쓰기도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무작정 뛰어든 그 용기가 대단하게 느껴진다. 지금도 짧은 소설을 쓰긴 하지만 공모전에 내거나 그러지는 않고 있다. 이런 말하기 그렇지만 내기가 창피하다. 글에 부족함이 느껴져서 창피하기도 하고, 아주 혹시라도 잘되면 그것도 곤란하지 않나 싶기도 하다. 물론 전자의 비중이 90%이긴 하다. 글쓰기를 하면서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고 느낀다. 내 마음가짐이나 태도가 이전보다 좀 덜 촌스럽게 느껴진다. 촌스럽지 않다는 건 아니다. 여전히 촌스럽지만 이전보다는 낫다는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에서 내가 성장했다는 것을 글쓰기를 통해 느끼고 있다. 분명히 나는 이전보다 나아졌다. 그럼에도 결과를 보여주지 못했으니까. 전업주부라는 직업에 만족하며 살았으니까. 나는 무엇으로 나의 시간들을 증명해낼 수 있을까.


전업주부라는 내 직업의 처지가 무척 곤란해졌다. 아이가 혼자 많은 것을 할 수 있게 됨으로써 나의 직업이 쓸모 없어진 것처럼 느껴진다. 남편에게 가장의 무게를 혼자 지게 하는 것도 미안해진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자고 돈도 벌지 못하면서 계속 이것을 붙잡고 있는 게 맞을까. 결국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아무도 날 필요로 하지 않으면 어쩌지. 그런 종류의 불안함이 자주 나를 엄습해 온다. 어떤 이는 내게 자격증을 따보라고 알려주고, 어떤 이는 내게 아이를 돌보면서 할 수 있는 일들에 조언해 준다. 나는 그 조언이 고맙다. 내 고민을 함께 헤아려주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내게 충분한 시간이 주어졌음에도 그 무엇도 이뤄내지 못한 나 자신이 미워진다. 이뤄내지 못했다고 하기에도 어이없을 정도로 나는 적극적으로 내 글을 어딘가에 들이밀지도 않았다. 들이밀었다가 떨어졌을 때 내가 느낄 좌절감과 실패감이 두려워서 나는 그러지도 못했다. 타고난 재능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한두 번에 성공하지 못하면 내가 계속해나갈 수 있을지, 거기에 대한 자신이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계속 전업주부라는 직업을 앞세워 시간을 벌 수 있을지를 고민하고 있다. 보험처럼 어떤 일이라도 하면서 해나가야지 않을까. 아이의 건강한 성장을 바라보며 나는 내가 어떤 삶을 살아야 될지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다. 전업주부라는 직업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싶지 않다. 나는 내 직업에 최선을 다했다. 전업주부로 살아가는 이들이 어느 순간에 느낄 허무함, 그것을 어떤 식으로 헤쳐가야 될지 나는 그 답을 찾는 과정에 서있다.


전업주부라는 직업이 멸시당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의 인생도 누군가의 희생을 통해 여기까지 왔다. 결코 나 혼자 올 수 없었다. 선택은 자신의 몫이다. 어떤 선택도 비난받을 이유는 없다. 아이의 성장을 통해 나는 그 시절의 나를 떠올린다. 그래서일까. 새로운 인생이 내게 주어진 것만 같은 착각에 빠질 때도 있다.

사회적으로 성공하지 않았다고 해서 인생이 실패한 것은 아니다. 실패한 기분이 들긴 하지만 실제로 실패했을 리 없다. 전업주부로 살아가며 내가 느낀 행복을 이제와 별거 아니었다고 말하고 싶지 않다. 나는 그 시간이 좋았다. 가끔은 되찾은 자유를 반납하고 싶을 만큼 그때가 그리워지기도 한다. 아이의 겨울방학이 코앞에 다가왔다. 아이와 함께 보낼 시간이 기대된다. 이상과 현실은 다르다 하더라도 우리는 언제나 다가올 시간을 기대할 수 있다. 앞으로 내겐 더 많은 자유시간이 주어질 것이다. 그렇지만 이제와 나는 자유가 없었던 그 시간을 그리워한다. 자유가 없었던 그 시간을 더 사랑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이제야 실감한다. 내 처지는 결국 어떤 식으로든 달라질 것이고 우리는 상황과 관계없이 서로를 사랑할 것이다. 나는 그런 시간이 지나가는 것을 오묘한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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