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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젼정 Jul 05. 2021

희망 문구사는 왜 명절에 문을 열었나

우리들은 더 이상 소쿠리를 맴돌지 않는다

어린 시절 명절은 언제나 기다려지는 날이었다. 가난해도 형제끼리 우애 좋게 지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내뱉던 할머니의 말은 자식들의 귀를 거쳐 마음에 남았다. 10남매였던 아빠의 형제들은 모두 결혼을 했고, 자식을 낳았다. 그리하여 내 또래의 사촌들만 8명은 된다. 어른들과 아이들이 다 모이면 정신없는 건 당연했다. 명절이면 할머니가 계시는 넷째 큰아버지댁으로 친척들이 모였다. 어른들도 아이들도 한껏 들뜬 표정이었다.

할머니는 다리를 쭉 펴고 앉아 자식들과 손주들을 바라보았다. 할머니가 앉은자리 구석에는 늘 과자나 휴지가 있었다. 과자는 언제부터 그 자리에 있었는지 추측할 수 없을 정도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할머니는 그 과자를 우리의 손에 쥐어주었다. 자신이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주는 얼굴로. 휴지도 과자와 마찬가지였다. 쓰레기통에서 꺼낸 형태를 하고 있는 휴지가 여기저기 숨바꼭질하듯이 널려 있었다. 어렵게 살아온 할머니에게 휴지는 한번 쓰고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한번 더 써야지, 한 번만 더 써야지, 휴지를 대하는 할머니의 마음을 헤아려본다. 처음에는 누구의 딸인지 아들인지 헷갈리지 않던 할머니는 해를 거듭할수록 기억을 잃었다.




점심시간쯤이면 전 부치는 냄새가 마당을 가득 채웠다. 마당에서, 주방에서, 며느리들은 자리를 잡고 앉아 전을 부쳤다. 소쿠리에 차곡차곡 예쁘게 전을 쌓아봤자 소용없었다. 전을 부치는 속도가 먹는 속도로를 따라가지 못했다. 우리는 계단에서 의미 없는 말들을 주고받으면서 전을 집어먹었다. 안방을 차지한 어른들의 술상에도 안주로 전이 올라갔다. 동그랑땡과 동태전, 녹두전이 차례로 프라이팬을 거쳤다. 소쿠리에 담긴 전을 손으로 집어 입안으로 넣을 때의 행복을 우리는 명절마다 체험했다. 특히 녹두전은 지금도 명절이면 생각난다. 넷째 큰어머니가 만드는 녹두전에는 김치, 고사리가 들어간다. 평소 김치도 고사리도 좋아하지 않는데 명절만 되면 녹두전을 좋아하는 사람처럼 구는 내가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다. 전을 집어먹다 보면 밥 생각은 없어졌다. 반들반들해진 입술로 우리는 계획 없이 시간을 보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가장 즐겁다고 느껴지는 순간들을 우리는 함께 했다.


아이들이 정신없게 굴면 어느새 어른들이 한 명씩 마당으로 나와 지갑에서 돈을 꺼냈다. 아이들마다 줘야 했으니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도 꽤 부담스러운 일이다. 어정쩡하게 선 채로 보통은 오천 원, 만 원짜리 지폐를 주셨는데 우리 아빠만은 그렇지 않았다. 아이들을 줄 세워놓고 앉아 일일이 세배를 받으면서 천 원짜리 한 장을 줬다. 그걸 주면서도 온갖 생색을 내는 통에 내 얼굴은 몹시 화끈거렸다. 천 원으로 시작되는 돈의 소중함에 대한 설교도 잊지 않았다. 줄을 서서 기다리는 아이들은 어색한 미소로 자신의 차례를 기다렸다. 나이가 많거나 적거나 상관없이 아빠는 천 원을 주면서 만 원을 주는 어른처럼 굴었다. 우리 아빠는 왜 저럴까. 그런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우리는 대문을 빠져나와 시멘트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희망 문구사, 네모 반듯한 간판을 달고 있는 그곳으로 우리는 달려갔다. 문구점은 발 디딜 틈 없이 비좁았다. 이 구역은 우리가 접수한다는 마음으로 사촌들은 돈 쓸 준비를 했다. 뽑기판을 하면서 한탕주의를 경험하는 아이, 불량식품으로 입안의 쾌락을 즐기는 아이, 귀여운 장난감으로 가성비를 추구하는 아이, 자신의 돈을 쓰지 않으려고 구경만 하는 아이, 그 아이가 보기 안쓰러워서 자신의 지갑을 공동의 돈처럼 사용하는 아이, 명절이면 그 아이들은 희망 문구사를 점령했다. 그렇게 어른들이 준 용돈의 절반 이상은 희망 문구사로 전달되었다. 희망 문구사 주인아줌마는 기다렸다는 듯이 빠르게 계산을 해주었다. 지갑 사정 때문에 망설이는 고객을 위해 몇 번이고 가격을 친절하게 안내해주었으며, 명절이라고 비싸게 파는 비도덕적 행위도 하지 않았다. 우리와 희망 문구사와의 거래는 하루아침에 이뤄진 게 아니었다. 조금만 걸어가도 문구사는 많았다. 이상한 건 다른 문구사에서 똑같은 물건을 사도 희망 문구사에서 사는 느낌과는 달랐다. 희망 문구사에서 사야 명절 기분이 났고, 돈 쓰는 맛이 났다.


각자 쇼핑을 마치고 나와 다시 큰집에 들어가도 부침개 부치는 소리가 계속되었다. 워낙 식구가 많으니 며느리들 입장에서는 명절이 달갑지는 않았을 것 같다. 명절이 하루 지나고 나면 외갓집에 가느라 인사를 해야 하는 사촌도 있었고, 외갓집에 오는 사촌들도 있었다. 나와 동생은 외갓집이 그 당시 버스로 8시간 이상 걸리는 곳이었기 때문에 명절 내내 그곳에서 시간을 보냈다.

 

명절의 밤은 어른들의 시간이었다. 모두 모여 술상 앞에 모였다. 때로는  소리가 나기도 했다. 대부분 형제애를 과시하며  지냈지만 모든 사람의 생각이 같을 수는 없을 터였다. 자신의 의견이 맞다고  소리를 내기 시작하는 사람은,  우리 아빠였다. 미움받을 용기를 넘어선지는 오래였다. 아빠는 미움받고자 작정한 사람처럼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아빠의 형들은 심기가 불편한 표정으로 그의 성난 마음이 수그러들기를 기다렸다. 재미있는  그러고 나서 어른들은  같이 노래방에 갔다. 다시는 보지 않을 사람처럼 다투다가 노래방에  시간이 되면 태도가 달라졌다. 가끔은 우리도 데려가 방을 따로 잡아주었다. 어른들은 노래하는 것을 좋아하셨다. 술을 마시고,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는 것은 어른들이 명절에   있는 최고의 코스였다. 며느리들은 옹기종기 모여 맥주를 마시거나 누워서 피로를 달랬다.

우리는 우리끼리 놀아야 했다. 우리는 어른들에게   없다는 마음으로 노래방 마이크를 잡았다. 어른들의 노래방 시간이 연장되면, 우리시간도 연장되었다. 노래방에서 실컷 노래를 부르고 나면 밤은 이미 깊어져 있었다. 술에 취한  어른들은 다시 큰집으로 가서 고스톱을 꺼내 자리를 잡았다. 대체 큰집의 불은 언제 꺼지는 건지 궁금했다. 남들이 보면 '명절 체력장'이라도 열렸나 싶을 것이다. 체력이 좋지 않은 사람들은 하나,  나가떨어졌다. 우리도 쉽게 잠들지는 못했다. 쪽방에 가로누워 무서운 이야기를 하거나 의미 없는 말들을 늘어놓다가 마지막에 잠들지 않으려고 부단히 애썼다.


명절의 마지막 날은 텅 빈 거리처럼 쓸쓸한 공기로 우리에게 안녕을 고했다. 주머니에 남은 용돈을 희망 문구사에서 소비하며, 아쉬운 마음을 그곳에 내려놓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희망 문구사는 왜 명절에 문을 열었나 모르겠다. 우리들의 명절 용돈을 수금하기 위해서, 부지런히 문을 열었다고 상상해보면 이상하게 특별해지는 기분이 든다. 백화점 VIP처럼 우리도 희망 문구점의 VIP 아니었을까. 물론 그럴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다. 명절이면 함께 소쿠리에 있던 전을 집어먹던 우리들은 더 이상 소쿠리를 맴돌지 않는다. 노래방에서 고함을 치듯 노래를 부르던 어른들은 명절 체력장에서 줄줄이 탈락하여 자신의 집에 남아 있다. 희망 문구사도 간판을 교체하고 자취를 감춘 지 오래다.

모든 것이 달라졌다. 그때 우리가 함께 했던 시간들을 제외한 모든 것들이 말이다. 지금도 우리는 서로의 안부를 묻는다. 별일 없지, 잘 지내지, 때로는 친구보다 가까운 마음으로 서로를 애틋하게 바라본다. 나는 지금도 명절이 되면 희망 문구사 앞으로 달려가고 싶어 진다. 그곳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가장 즐거웠던 순간들을 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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