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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젼정 Aug 29. 2021

언제 잃어버린지도 모르게

평행선처럼 우리는 도무지 만날 수 없다

어릴 적 일이다. 잊을만하면 아빠는 직장을 그만두었다. 그럴 때면 며칠이고 아빠는 집에만 있었다. 지금처럼 여름이 끝날 때쯤 날씨였을까. 아빠는 안방에 앉아 카세트테이프 재생 버튼을 반복해서 눌렀다. 종이 위에 빼곡히 적힌 가사가 아빠의 투박한 손에 들려 있었다. 가수 최백호의 목소리보다 큰 아빠의 목소리가 집안을 가득 채웠다. 노래가 끝나면 다시 테이프를 되감았다. 그 노래를 계속 듣고 싶지 않았지만 그만 부르라고 할 수는 없었다. 아빠는 전국 노래자랑에라도 나갈 기세로 노래 연습을 했다. 대체 어디서 부르려고 저렇게 꼼꼼하게 노래 연습을 하나 싶을 정도로, 열심히였다.


궂은비 내리는 날
그야말로 옛날식 다방에 앉아
도라지 위스키 한 잔에다
짙은 색소폰 소릴 들어 보렴

새빨간 립스틱에
나름대로 멋을 부린 마담에게
실없이 던지는 농담 사이로
짙은 색소폰 소릴 들어 보렴

이제와 새삼 이 나이에
실연의 달콤함이야 있겠냐만은
왠지 한 곳이 비어있는
내 가슴이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

최백호의 '낭만에 대하여' 가사 일부


노래가 반복될수록, 끝을 향해 달려갈수록 아빠의 목소리는 처절해졌다. 자신이 가진 모든 낭만을 잃어버린 사람 같아 보이기도 했다. 아빠가 잃어버린 것은 무엇이었을까. 여전히 알지 못한 채로 나는 그 시절의 어느 날을 기록하고 있다.


언제부터 썼는지 모를 끈적한 장판에 우리는 보이지 않는 발자국을 남겼다. 이사 오면서 장판이라도 좀 새로 했으면 얼마나 좋아? 촌스러운 에메랄드빛 벽지는 그렇다 쳐도, 장판은 심했다. 우리는 누군가의 발자국 위에 또 다른 발자국을 새기며, 누군가의 냄새가 스민 벽지에 다른 냄새를 덧입히며 그곳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침대 위에 아무렇게나 둘둘 말린 요란한 꽃무늬 이불은 여름을 제외하고 늘 그 자리에 있었다. 이불 가게에서 고이 접어준 이후로는 그런 대우를 받은 적이 없는 몰골이었다. 안방에 있는 물건들도 늘 그대로였다. 고장이 나지 않는 한 새로 가전제품을 사는 일은 없었다.

아빠는 한 번도 내게 학교생활이 어떠냐고 묻지 않았다. 내가 어떤 생각을 갖고 사는지, 앞으로 무엇이 되고 싶은지도 묻지 않았다. 궁금하지 않았던 것인지, 물어도 해줄 말이 없었던 것인지, 알 수 없다. 아빠랑 마주 앉아 제대로 대화를 나눠본 기억이 없다. 아빠는 우리가 곁에 있어도 늘 고독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엄마, 나, 동생의 존재는 아빠의 고독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 고독은 지독했다. 그것은 외로움으로 설명될 수 없었다. 그 누구도 자신을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아빠는 점점 말수를 줄여 나갔다. 세상 모든 어두운 말을 집어삼킨 아빠는 자신의 말이 누군가에게로 가닿는 것이 두려워 보였다. 그렇게 아빠는 입을 굳게 닫았다.


내 가슴에 다시 못 올 것에 대하여, 낭만에 대하여.


이제 나도 부모가 되었다. 부모가 되었지만 여전히  아빠를 이해할  없다. 오히려  이해를 못하겠다. 부모이기 이전에  사람인 아빠를 온전히 이해하는 일이란 나에게 너무 버겁게 느껴진다. 평행선처럼 우리는 도무지 만날  없다. 시작점은 같았는데 어느새 벌어진 거리는 돌이킬  없이 멀어졌다. 손을 내밀어도 잡을  없을 정도의 거리에 이르자, 나는 애틋한 눈빛마저 거두었다.


아빠가 밝고, 긍정적인 사람이었다면 어땠을까? 그런 아빠를  사람은  다르게  것이다. 고독에게 뺨을 맞고, 집에 돌아와 '낭만에 대하여' 반복해서 부르던 아빠의 행복은 언제 달아나 버렸을까.


언제 잃어버린지도 모르게, 아빠의 행복은 소리 없이 사라진 것만 같다. 아빠가 잃어버린 행복, 우리는 그것을 찾을 수 없다. 이제는 그 사실에 놀라지 않는다. 그 행복의 형태를 알지 못하기에, 찾을 수 없다는 사실에 절망할 필요도 없다. 텅 빈 마음에 그 무엇도 채워지지 않는 날, 그날 아빠의 등을 떠올리며 이 노래를 듣는다. 아빠처럼 고독한 얼굴을 짓지는 않는다. 나는 그런 얼굴을 하지 않을 것이다.


평행선 위에 서서 그날의 노래를 가만히 떠올려 본다. 다시 못 올 낭만의 노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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