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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젼정 Jun 26. 2021

우리는 한여름의 대낮을 사랑했다

엔딩이 없는 이어 쓰기 소설처럼

어린 시절의 여름, 옥상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던 기억이 난다. 담장이 높아 내부가 잘 보이지 않는 집들을 지나 중앙에 펼쳐진 골목길을 지나면 검정 대문이 보였다. 우리 가족은 그 집 단칸방에 세 들어 살고 있었다.

초등학생이었던 나와 동생은 그 집 옥상에 수시로 올라갔다. 볕이 좋은 날에는 옥상 올라가 돋보기로 색종이를 태웠다. 연기와 함께 어느새 구멍이 생기면 '오' 소리가 저절로 나왔다. 그것도 시들해지면 옥상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구름이 두둥실 떠다니는 것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구름은 그야말로 유유히 사라졌다. 강아지 모양, 고양이 모양, 하트 모양, 두둥실 와서 유유히 사라져 가는 구름에게 우리는 수많은 이름을 붙여주었다.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도, 따사로운 햇살이 머리카락 사이를 파고들어도, 우리는 바깥으로 뛰어나갔다. 그렇게 우리는 한여름의 대낮을 사랑했다.

어느 날은 옥상에서 주변을 내려다보다가 중학생쯤 돼 보이는 남자 서너 명을 발견했다. 이층 마당에 앉아 기타를 치는 중학생 오빠들은 초등학생이 흉내 낼 수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이와 어른의 중간쯤에 멈춰 선 그들의 얼굴은 우리와 분명히 채도가 달랐다. 그 순간 경계심과 호기심의 감정이 동시에 일렁거렸다. 그들은 미소와 함께 손을 흔들었고, 우리는 애매한 얼굴로 옥상에서 내려왔다.





여름이면 부지런히 주인집 마당 화단에 있는 앵두나무 열매를 따먹었다. 작고 빨간 앵두를 입안에 넣고 씹으면 과즙이 풋 하고 터졌다. 시고 단 맛이 오묘하게 혀를 자극했다. 화단에 앵두 씨를 훅 뱉으면서 우리는 또 한 움큼 앵두를 모았다. 찬란한 여름의 대낮, 나뭇가지로 사이로 내려쬐는 햇볕을 온몸으로 느끼며 우리는 앵두 먹는 일에 온 힘을 쏟곤 했다. 일터에 나간 어른들은 그 시절 마당에 있었던 앵두나무가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잘 모를 것이다.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들은 가방을 집에 대충 던져놓고 골목으로 하나, 둘 나왔다. 골목을 접수한 동네 아이들은 돌아다니는 모래나 흙을 퍼담아 소꿉놀이를 하거나 자전거를 탔다. 그것도 성에 차지 않는 날에는 근처 아파트 놀이터로 향했다.


두껍아 두껍아 헌 집 줄게 새 집 다오
두껍아 두껍아 물 길어 오너라 너희 집 지어줄게


놀이터에 있는 고운 모래를 만지며 습관적으로 '두껍아 두껍아' 노래를 불렀다. 지금은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친구의 손이 모래 사이에서 내 손에 닿을 때마다 우리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웃었다. 아무리 신나게 두꺼비를 불러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모래 놀이를 하다가 지겨워지면 뺑뺑이에 올라탔다. 뺑뺑이에 한 명이 오르면, 나머지 한 명이 힘껏 달리며 원을 그렸다. 뺑뺑이에 탄 아이는 어지러워 죽겠다는 얼굴로 소리를 힘껏 질렀다. 동생은 미끄럼틀을 누구보다 빠르게 오르락내리락거렸다. 아파트 놀이터에 가로등이 켜지면 아이들은 집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럴 때마다 갑작스러운 적막감이 피부에 차갑게 닿는 느낌이 들었다.


동생과 나는 적당한 간격을 두고 터벅터벅 걸었다. 하루 종일 바깥에서 논 사람이라고 보기 힘들 정도로 동생의 움직임은 가벼워 보였다. 한 발, 한 발, 집이 가까워질수록 어둠은 빠르게 짙어졌다.


내가 보았던 구름들은 지금 어디까지 갔을까. 내일도 앵두를 먹을  있을까. 그런 생각들을 하며 대문을 넘어 좁은 통로를 지났다. 엄마는 오늘 하루 어떻게 보냈는지 묻지도 않고, 저녁을 차려냈다. 반찬이 마음에 들지 않는 날에는 깨지락 깨지락 젓가락을 허공에 휘젓는 시늉을 하다 보면 식사시간이 끝났다. 옥상에 올라가 색종이를 태운 이야기, 옥상에서 낯선 오빠들이 기타 치는 모습을 구경한 이야기, 앵두를 실컷 따먹은 이야기, 동생과 동네 아파트 놀이터에 가서 모래 놀이를  이야기, 그중 무엇 하나도 우리는 엄마에게 말하지 않았다. 엄마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엄마의 그림자에는 많은 말들이 숨어 있었다. 불행이 눈앞에 닥쳤을 , 엄마는 그걸 이겨내려고 하지 않았다. 우리에게  불행이 오지 못하도록 그저 버티고 서있을 뿐이었다. 아빠가 술을 마시고 들어오는 날이면 뺨에 남아있는 거친 수염을  볼에 비볐다. 나는  순간마다 내게 아빠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런 날이면 아빠는 무슨 말이라도 해야 잠들  있는 사람처럼 잠이 들기 직전까지 했던 말을 반복했다.


그 시절의 대낮은 엔딩이 없는 이어 쓰기 소설처럼 느껴졌다. 엄마는 어떤 날에는 밀가루로 빵과 떡 사이쯤의 음식을 만들었다. 배가 고프면 한두 입 베어 먹고 잊어버린 그 맛은 어쩐지 어린 시절의 흐릿한 기억과 많이 닮아있다.


옥상에서 태우던 색종이도, 유유히 사라진 구름도, 아름다운 앵두나무도, 아파트의 모래도, 앞서 걷던 동생의 뒷모습도, 엄마의 그림자와 아빠의 수염도, 모두 내 마음에 남아 있다. 나는 그 뜨거움을 잊지 않았다.


주인집 마당에 있던 앵두나무 앞에서 보냈던 어린 시절의 대낮이 그리워지는 여름이다.  늦기 전에  골목길을 찾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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