얘깃거리가 되는 책은 노동의 여독을 풀어줄 정도로 재미로 가득하다. 보고 즐기면 되고, 그 이야기나 캐릭터들의 매력이 강렬해 현실을 잊게 하기도 하고, 머리맡에 자기 전에 그 친구들의 매력을 다시금 음미하고 편히 자게 해준다.
그러나 토론거리가 되는 책은 절대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 제대로 즐기려면 검색을 해가면서까지 남들은 어떻게 생각하나 알아야하고, 그러다 보면 사람들의 날 선 말들을 보게 되는데, 이러면 보기만 할 뿐인 나까지 피가 마르는 느낌이다.
그러다가 결국 손이 안 가던 책을 쥐고 말았다. 다른 게 아니라, 베스트셀러를 좀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너무, 내 영역 안에서만 지내는 게 아닌가, 그런 생활 태도가 나를 실수하게 만드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이번에 펼쳐든 책은 한강의 『채식주의자(2007)』. 맨부커상 국제 부문 수상으로, 세계 만방에 빛나는. 자랑스러운 우리의 소설.
사진은 내용과 관련이 없음. 출처: Deutsche Theater München.
채식주의자, 두 자아의 이야기
줄거리는 이렇다.
주인공 영혜는 평범한 여자이다. 결혼한 뒤로도 평범하게 살았지만, 어느 날 꿈을 꾼 뒤부터는 고기를 먹지 않게 된다.
편의상 꿈에서의 영혜를 내적자아로, 현실세계에서 남편 정 씨와 함께 사는 영혜를 외적자아라고 하자.
영혜의 외적자아는 자기 욕구를 억누를 줄 안다. 그래서 겉으로 보기에 평범한 사람이었다. 평범한 결혼생활을 바라는 평범한 남자가 택할 정도로. 그래서 남편이 바라는 평범한 내조를 잘 해주었다. 정말 평범하게 평화로운 가정생활을 영위하게 해주었다.
그런데 내적자아는 다르다. 사람이건 짐승이건 보이는 대로 죽이고, 그들의 살을 날 것으로 씹고 피를 마시고 싶어한다.
서로 인지를 못하고 살기 때문에, 외적자아가 주도권을 잡으면서 살았기에 별 문제가 없었다. 그러다 결혼 생활을 하면서 남편 정 씨가 아이를 가졌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할 때 즈음, 내적자아가 고개를 든다.
외적자아를 상징하는 건 가슴. 영혜는 평소에도 브래지어를 차지 않기 때문에 남편도 그녀의 개성으로 가슴을 떠올릴 정도이고, 본인도 회식자리에서 블라우스 천 사이로 꼭지를 삐죽 내민 모습으로 다닌다.
내적자아를 상징하는 건 고기를 먹는, 피범벅이 된 입. 그래서 고기를 볼 때마다, 고기 먹는 모습을 볼 때마다 꿈이 구체화되어 간다.
그러니까 고기 거부는 외적자아가 주도권을 뺏기지 않으려는 싸움이었다. 어째서 고기를 먹지 않느냐는 말에 굳이 꿈이라고 대답하는 이유도, 영혜 자신의 육식과 채식에 대한 좋고나쁨에 따라 결정한 게 아니기 때문. 다만 영혜의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저, 그녀를 채식주의자라고 부를 뿐이다.
어쨌든 그렇게 고기 안 먹고 버티는 방식으로 내적자아와 싸우는데, 아버지와 어머니의 등장으로 달라진다.
아버지는 고기를 거부하는 영혜의 뺨을 올려붙이고, 어머니는 단순 한약이라고 속여 흑염소 진액을 먹인다.
그러한 폭력을 마주하면서, 영혜는 잊었던 과거를 떠올린다. 아홉 살 무렵, 어린 시절의 일이었다. 키우던 개가 자신을 문 적이 있다. 그날 아버지는 개를 오토바이에 끌고 다니는 방식으로 죽였고, 마을 사람들은 죽은 개로 잔치를 벌였다.
영혜가 개에게 가진 감상은 정말 별 것 없었다. '나쁜 개. 감히 나를 물다니.' 잔치상에 오른 개고기를 씹으면서, '들깨가루 정도로는 개 노린내가 안 잡히는구나', 하는. 단순한 감상.
그리고 자신이 브래지어를 차지 않는 이유도 깨닫는다. 가슴이 답답해서 차지 않았지만, 이젠 차지 않아도 답답하다. 그동안 먹은 고깃덩어리들이 가슴 속에 걸려있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이 죄 많은 몸.
외적자아가 내적자아의 진의를 깨닫게 됐고, 그렇게 서로 다른 자아는 하나가 된다.
그렇게 자아의 갈등이 끝난 영혜는, 병원 앞 공원에서 발견된다. 영혜는 상의를 벗고 젖가슴을 드러낸 채, 피범벅이 되어있었다. 그러나 그 피는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잇자국 남은 채 숨이 끊어진, 작고 여린 종달새의 피였다.
사진은 내용과 관련이 없음. 출처: https://blog.naver.com/zxcv_0207/221157090216.
비틀린 모더니즘 소설
보는 바와 같이 두 자아의 싸움이 「채식주의자」의 핵심이다.
채식주의자의 감상 포인트는 두 자아를 다루는 구조.
모더니즘 소설의 구조를 따르는 평범한 소설의 줄거리는 이렇다.
두 자아의 갈등으로 시작해, 두 자아에게 공통으로 가해지는 충격을 겪는다. 사건과 충격을 경험한 뒤, 두 자아는 화해한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자아의 성숙과 갈등의 봉합이 따라온다.
그런데, 영혜의 모습은 무엇인가.
가슴을 상징으로 하는 외적자아는 그냥 가슴 내놓고 있을 뿐이고, 피와 입을 상징으로 하는 내적자아는 튀어나와서 종달새를 생으로 으적으적 씹고 있다. 그렇게 영혜는 공원 한 가운데 웃통 벗고 피범벅이 된 인간으로 완성됐다.
이게……, 자아의 합일?
자아의 성숙은 어디? 갈등의 봉합 어디?
자아의 합일만 이루어지면 만사오케이느냐고, 기존의 소설들을 비웃는 느낌이다.
교과서적인 내용을 비틀었다고나 할까.
사진은 내용과 관련이 없음. 출처: 헬스코리아뉴스.
감상평 중에 이 소설을 싫어하는 경우도 많았는데, 정치적인 거 떠나서 그냥 주인공 자체가 싫어서 악평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웬 정신 나간 인간이 고기가 싫어요, 하더니 별 같잖은 걸로 자해도 하고 난리치는 게 답답해서 도저히 못보겠다.' 정도로 요약 가능한데, 책을 대충 보고 덮어버린 것 같지만 의외로 올바르게 감상한 것이다.
독자로 하여금 답답함을 느끼도록 저자가 유도한 부분이 많다.
소설의 시점이 바로 그런 답답함을 유발하기 위한 장치이다. 「채식주의자」 소설은 주인공이 영혜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편의 시점에 무게를 두어 서술한다.
남편 입장으로 보자면 같이 멀쩡하게 잘 지내던 사람이 갑자기 꿈 한 번 꿨다고 고기를 냉장고에서 꺼내 전부 갖다버리려 하질 않나. 도저히 몸이 못 받아도 잘 넘길 수 있을 텐데, 꿈 얘기만 반복하거나, 밥 안 먹느냐는 상대의 말에 빤히 쳐다보며 분위기를 싸하게 만들지 않나.
심지어 자해까지 하고, 괜히 가족들과 싸우고.
이게 사실은, '보통 사람'의 시선에 가깝다. 이해가 안 돼야 정상이다. 그러므로 영혜의 진의는, 속을 들여다 보는 독자만이 알 것…. 이긴 한데, 독자 입장에서도 이해 불가능한 건 맞긴 하다…. 행동 자체가 워낙 이해 안 가는 것이긴 해서.
그래서 온전히, 영혜에게 집중해야만 겨우 진의를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려면, 오히려 소설에 몰입을 하지 않아야만 볼 수 있다. 소설은 외부인의 시점에서 몰입하도록 설계를 해두었기 때문에.
사진은 내용과 관련이 없음. 출처: 네이버웹툰.
사실, 그런 주인공의 행동이 이 책을 읽게 된 이유이기도 한데, 이 소설의 주인공에게서 발달 장애의 모습이 많이 보인다는 것이었다.
일단, 자기만 아는 논리대로 말한다는 점. 영혜가 남편과의 잠자리를 거부하는 이유로 '고기 냄새가 나서' 그렇다고 하거나, 고기를 먹지 않는 이유를 건강 상의 문제 등을 들면서, 남들이 이해할 만한 형태로 둘러대는 대신 곧장 '꿈 때문'이라고 말한다거나. 그런 모습이 굉장히 흡사하다고 한다.
문학적 표현과 의학적 증상이 맞닿았다니, 참 인상 깊었다.
어쨌든.
문제작이라고는 해도, 어쨌든 읽히는 작품엔 이유가 있구나 싶다. 단어도 문장도 어렵지 않고, 파고 들자면 또 파고들 것도 많아서.
근데 내 취향이느냐 하면, 글쎄?
까놓고 말해, 이 글 쓰면서 무진장 신나는 게 눈에 보일 정도일 테지만, 그게 이 소설이 정말 좋아서 그런 건지, 아니면 배워뒀으면서도 쓰질 못해 묵혀두고만 있던 지식을 꺼내는 게 즐거운 건지. 어느 쪽이느냐고 묻는다면, 직접 말하기는 또 부끄러워서…….
그러고 보니, 이 소설은 왜 나쁜 평가를 받는 걸까?
사실, 이 소설이 나쁜 평가를 받는 건, 소설 자체의 문제라기보다도 소설 외적인 면이 크다.
사진은 내용과 관련이 없음. 출처: 디즈니.
사상의 무기가 된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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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내용과 관련이 없음. 출처: 경향신문.
마치며
이 소설은 어떻게 나오게 된 걸까 싶은데, 책 뒤에 실린 작가의 말에서 알 수 있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채식주의자」는 97년에 쓴 단편소설 「내 여자의 열매」를 쓰고 난 뒤, 그 소설을 변주해보고 싶은 욕망에 따라 쓰인 것이라 한다.
작가는 「내 여자의 열매」의 줄거리를 어느 날 여자가 아파트 베란다에서 식물이 되고, 남자는 그녀를 화분에 심는다는 얘기라고 요약했는데, 읽어보면 이거 확실히 「채식주의자」와 반대다. 어느 날 갑자기 식물이 되고, 연인은 나무로 변해가는 주인공을 보며 이별을 안타까워 하면서도, 받아들인다.
그리고 『채식주의자』 책에 실린 「나무 불꽃」의 착상을 얻었던 이야기도 나오는데, 버스를 기다리다 무심코 만진 가로수 밑동의 감촉에서 얻은 것이었다.
이런 걸 볼 때, 작가는 삭막한 도시 공간 속에서 적응하지 못하는 인간. 그리고 그런 공간에서 식물로 변하고 싶어하는 인간 등. 그런 테마를 굉장히 좋아하는 것 같다. 그리고 식물 자체도 그냥 좋아하고. 특히 나무.
사진은 내용과 관련이 없음. 출처: Tekken Wiki.
그런 점을 종합해볼 때, 아무래도 작가는 식물이 되는 인간. 그, 식물인간 말고. 인간이 식물로. 그 중에서도 나무로 변하는 이야기 자체를 굉장히 좋아하는 것 같다. 식물 자체도 그렇고. 작가의 내밀한 취향을 글로 승화시킨 것인지도.
그런데, 「내 여자의 열매」는 분위기 자체는 우울과 차분 사이에 있지만, 그래도 사랑하는 사람이 주인공을 인정해주기 때문에 따뜻하게 느껴진다.
말이 인정이지, 인간의 힘으로 어떻게 바꿀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포기하고 받아들이는 것에 가깝지만.
백혈병이나 암 등. 불치병에 걸린 연인을 떠나보내는 이야기처럼.
『채식주의자』의 경우는 이와는 정반대로, 영혜의 목표는 「내 여자의 열매」의 주인공처럼 나무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영혜는 현실세계에 살고 있는 인간이기 때문에 나무가 될 수 읎다. 그냥 종족변환희망자. 절대 이룰 수 없는 비현실적 목표와 사고를 갖고 있기 때문에 어딜 가도 배척당한다. 남편도 떠나고, 정신병동 한 구석에 처박히고.
똑같이 소설의 인물인 데도, 환상이 허락되지 않은 세계에 있다는 이유로 이렇게 고통을 받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소설의 인물이니 환상을 추구하는 게 틀린 게 아니라는 점을 생각하면 또 이채롭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채식주의자』는,
1부 「채식주의자」: 영혜는 어떻게 자신의 동물적 본성을 깨달았나?
2부 「몽고반점」: 영혜는 어떻게 식물이 된다는 것을 목표로 잡게 되었나?
3부 「나무 불꽃」: 영혜는 나무가 되기 위해 어떻게 했는가?
이런 식으로 요약할 수 있다.
사실, 작가가 이렇게 착상을 밝히는 경우는 글이 복잡하더라도 결국은 그때의 그 감각을 위해서 쓴 거니까, 그냥 즐기시라는 의미. 자신과 비슷한 감각을 이 글로 느꼈다면 더욱 좋고.
오히려 이름 난 작가일 수록 이런 기본적인 건 지키고 있구나. 싶어서, 자신 또한 다시 보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