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권세연 Oct 29. 2022

내 오늘보다 어머님 오늘을 나누는 생활을 시작하였다.

'딸같은 며느리'라는 말은 며느리들 사이에서는 '금기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시대의 진정한 '딸같은 며느리, 딸보다 백배천배 나은 며느리'라는 근거없는 자신감이 항상 넘쳐났다. 


남편이 장기출장을 가는 날이면 어머님은 배추김치, 총각김치, 파김치,양념게장, 간장게장, 홍어무침, 모둠전에 마른반찬, 심지어 시장에서 파는치킨까지 바리바리 싸서 택배를 보내주시곤 했다. 


처음엔 두상자 가득 채워진 택배 반찬에 화들짝 놀라서 전화를 드렸다.

"어머님, 오늘은 아이아빠가 출장에서 오는 날이 아니라, 떠나는 날이예요."

"알지. 그래서 보냈어. 세연아, 애들이랑 셋이 있다고 밥 대충해서 먹지 말고 잘 챙겨먹어."


말문이 턱 막혔고 눈물샘은 폭발했다. 이 날 나는 어머님에 대한 충성을 맹세했다.(물론 혼자 속으로)


3시간 거리에 있는 시댁에 방문하면, 나는 어머님과 아버님께서 돌아오는 퇴근시간까지 대자로 뻗어 텔레비전을 보았고, 어머님이 오시면 상다리가 부러져라 잔칫상 저리가라 차려주시는 얼큰한 찌개와 탕, 싱싱한 회 한접시, 구워주시는 소고기,삼겹살을 한번에 먹으며 "어머님, 아버님, 정말 맛있어요! 진짜 맛있어요." 를 연신 외쳐댔다. 내 식사를 마친 후 아이들 먹는 걸 도와주다보면, 아버님은 그 많은 설거지를 싱크대에서 묵묵히 하셨다.


"아버님, 제가 할게요! 그냥 두세요!"라고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는 온 집안에 울려퍼지지만, 방바닥에 붙은 엉덩이는 옴짝 달싹하지 않는다.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에는 많게는 한달에 주말마다 격주로 내려가서 그 호사를 누렸다. 

사람들은 아무리 시부모님이 잘 해주셔도 시댁인데 더구나 왕복 6~7시간씩 걸려 가는게 힘들지 않냐고 물었다.   


내 입장에서는 힘들고 말고 고민할 것도 없었다. 정말 시어머님, 시아버님이 아니라 말 그대로 부안에 계신 엄마, 아빠를 보러 가는 길이 마냥 신나기만 했었다. 자주 보니 매일 매일 전화통화를 해도 할말이 넘쳐났다. 오히려 남편이 장거리 운전이 힘드니 그만가자고 할 정도였다. 


코로나 이후로 만남이 조심스러워졌고, 둘째까지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왕래가 뜸해지고, 대화소재가 고갈되는 것을 느끼면서 점점 어색해지던 시간이 생겨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이번에 어머님과 두달 가까이 매일 글을 함께 쓰다보니, 나는 여태 어머님과 대화를 진짜로 해본적이 있었나라는 생각이 몰려왔다. 


이제와 고백하건데, 부끄럽지만 나는 어머님의 이야기를 온전히 들어드린 적이 없었다. "어머님, 아이가 오늘 감기에 걸렸어요. 오늘은 체육대회를 했어요. 오늘은 남편이 승진을 했어요. 오늘은 제가 대학원에 입학을 했어요. 오늘은 둘째가 초등학교에 입학을 했어요. 오늘은 제가 대학원에서 전체 수석으로 졸업을 했어요. 오늘은 남편이랑 싸워서 속상해요. 오늘은 남편이 미국에 갔어요. 오늘은 오는 날이예요." 


우리의 대화는 늘 나와 남편, 아이들의 오늘 이야기로 넘쳐났다. 어머님의 어제와 오늘은 없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어머님과 대화가 잘 통하는 고부사이라고 생각했다. 어머님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나는 정말 딸보다 훨씬 나은 며느리라고 어머님께 말씀드리며 우쭐거렸었다. 


"그럼, 그럼, 우리 며느리가 최고지!"

늘 칭찬으로 인정,지지 화답해주는 어머님이셨기에 내가 잘해서 그런 줄 알았다. 


이번에 어머님과 글을 주고 받으며 내가 미쳐 보지 못했던 어머님의 어린 시절, 아가씨 시절, 30~40대의 삶을 함께 걸어볼 수 있었다. 나는 어머님을 황장군이라 부른다. 정말 든든하고, 무슨 일을 벌여도 무조건 내 편을 들어줄 것이란 강한 믿음이 있기 때문이었다. 이번에 글을 쓰고, 어머님은 황장군이 아니라 소녀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누구보다 여린 감성을 가진 우리 어머님께서 장군처럼 삶을 진두지휘하며 살아가는 동안 얼마나 많은 아픔을 속으로 삭혔을지 마음이 정말 먹먹하다. 


이제 나는 나의 오늘을 말하기 보단 어머님의 오늘을 듣는 생활을 시작해보려한다. 


어머님과 내가 목숨보다 더 사랑하는 한 남자에게 오늘 모처럼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고 싶다. 

나에게 이런 귀한 엄마를 만나게 해준 것으로 모든 죄(?)를 사하노라.


이전 12화 11. 제 가족이 되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