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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한 시선들

by 민선미


결혼 3년 차가 되니 ‘애 없는 여자’, ‘애 못 낳는 여자’로 꼬리표가 따라다녔다. 결혼 후 1년 동안 아기가 안 생기면 산부인과에서는 난임 진단을 내린다. 누구나 난임 진단을 받은 당사자들은 인정하기 싫겠지만, 사회적으로 내몰리는 따가운 시선을 피할 수 없다. 난임 진단을 받으면 일반 산부인과가 아닌 난임 병원을 카페를 이용해 검색하여 메모하며 일정을 잡고 예약하고 찾아갔다. 산부인과와는 달리 난임 병원은 많지도 않았고 집에서 가장 가까운 곳은 딱 한 곳밖에 없었다.



불임이라는 한자어가 ‘아니 불’이라는 뜻으로 부정의 느낌이 좋지 않았다.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일들도 자꾸 걸려서 자연스레 지나치지 못하는 나를 보았다. 내가 아이를 좋아하지 않아서 그런가?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앞으로 아이들을 예뻐해 주고 사랑 가득한 눈빛으로 대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길을 걷다 임산부를 보면 시기 질투가 났고, 아기를 태운 유모차를 밀고 가는 엄마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고 아름다운 모습처럼 부러웠다.



어찌 보면 나 살자고 스스로 사회와 거리 두기를 하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벽으로 나를 감싸기에 바빴다. 그저 인사치레 말 한마디로 관심 가져주는 사람이 싫었다. 겉으로는 웃고 있어도 속은 시커멓게 타들어 갔다. 시내에 볼일 있어 나가면 꼭 반갑지 않은 예전 직장동료를 만날 때가 있다. 못 봤으면 하고 지나치려고 하면 내 이름을 크게 부르며 반갑게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선미 씨, 직장생활이 꽤 힘들었나 보다.

사표 던지고 쉬니 얼굴에 꽃이 피었는데.”

“금방이라도 좋은 소식이 들리겠는데? “


직원의 안부 인사가 진짜인가 싶어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한동안 들여다보았다. 계속되는 임신 실패로 직장 사람들도 수군거리기 시작했고 아기 가지려고 직장을 그만둔 거처럼 보여 그렇게 물었던 게다. 가만 보면 맞는 말이지만 그래도 멋쩍은 인사는 영 반갑지도 않을뿐더러 얼른 자리를 피하고 싶었다.


옛날에 아이가 생기면 얼굴이 수척해지고 까칠해진다는데 내 얼굴에 ’ 꽃이 피었다 ‘는 말은 무슨 말인가 싶었다. 너무 푹 쉰 탓에 얼굴에 살이 올랐다는 말인가. 안부로 물어오는 인사들도 곱게 들리지 않고 삐뚤게 들려 속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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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 사람들이 내게 갖는 지나친 관심이 나를 더 꼭꼭 땅속으로 숨게 했고 어떤 날엔 하루에도 똑같은 물음을 여러 번 답해야 했다. 눈빛만 봐도 무슨 말을 건넬지 직감할 정도로 극도로 예민해졌다. 시간이 지나면 감정이 사그라들 거라 믿었지만, 나는 지옥에 떨어져 온몸에 바늘에 찔리는 고문이었다. 너덜너덜해진 마음으로 숨죽여 보내야 했다. 오랜만에 만난 반가운 지인일지라도 임신 소식을 물어보는 게 노이로제였다. 하루에도 수십 번도 더 묻는 형식적인 인사치레는 그만 거절하고 싶었다. 상대는 한번 물어보는 말이겠지만 듣는 나는 하도 들어서 지겨워 곤란할 지경이었다.



그 당시 내 눈에 가장 부러운 부부는 허니문 베이비를 가졌다는 부부들이다. 어떻게 하면 허니문 베이비를 가지게 된 걸까 궁금했다. 수년 전만 해도 결혼 전에 아이를 갖는 게 흠이었다면 지금은 흠도 아니고 사회적으로 혼수라고 생각하는 분위기였다. 게다가 허니문 베이비는 하늘이 도운 행운아가 틀림없었다. 나는 그동안 아무 탈 없이 살아왔던 과거를 돌아다봤다. 내가 어떤 죄를 지어서 이런 고통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니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저번 달에 먹어도 그만 안 먹어도 그만이라며 엽산제와 영양제 챙겨 먹는 일을 소홀히 했던 게 떠올라 후회했다. 거기다 더해서 야식을 즐기는 남편 따라 치킨에 시원한 맥주를 마셨기 때문에 임신에 실패했다며 스스로 인정했다. 임신이 안 되는 이유가 모두 내 탓처럼 여겨졌다.



매번 시험 치르는 수험생 같은 자세였다. 같은 문제를 주고 시험을 보는데 계속 나만 틀리는 거 같았다. 반복되는 임신 실패는 나를 더 위축되고 작게 만들어서 어느 것 하나 선택할 힘조차 사라졌다. 모든 게 불분명해 보였다. 시험을 볼 때 문제가 어려운 과목도 아니고 쉬운 과목인데 나만 계속 못 보는 거 같아 견딜 수가 없었다. 그 시험과목이 내겐 바로 임신이었다. 나 혼자만의 노력으로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어린 시절에는 남녀가 손만 잡고 자도 아기가 생기는 줄 아는 바보 천지였다.



남편과 결혼하려 했던 목적이 어느새 바뀌어 가고 있었다. 머릿속을 온통 채우고 있는 것은 바로 임신, 임신, 임신이었다. 일생일대에 아이를 낳는 것이 소원인 사람처럼 간절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밥 먹고, 숨 쉬고 같은 곳을 바라보는 미래를 꿈꾸고 싶어서 결혼했는데 어느새 아기 낳으려고 결혼한 것처럼 변해있었다. 점점 생존하기 위한 자손 번식을 애쓰는 동물처럼 변해갔다.



남편에게는 결혼할 당시 미혼인 형이 있었다. 결혼 전 시어머님은 형이 신경 쓰여 결혼하면 아기를 낳으라고 강조하셨다. 그래서 우리 부부는 피임을 1년 넘게 했던 것인데 마음이 바뀌셨는지 손주를 손꼽아 기다리셨다. 한창일 때는 피임해도 아이가 덜컥 들어선다는데 어째서 그 쉬운 것도 못 하냐며 은근 구박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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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로 아기는 ’ 마음 편해야 아기가 잘 들어선다 ‘라고 백번 넘게 말해놓고 조바심 나게 자꾸 재촉하는 의도가 궁금했다. 내 마음에 폭탄을 터뜨려놓고 어머님은 언제 그랬냐는 듯 돌아서면 금세 잊어버리셨다. 생각날 때마다 거침없이 쏟아내는 말들을 들으면 내 속에서는 천불이 났다. 얼른 자리를 피하고 싶은데 어느새 태몽 보따리를 풀기 시작했다. 한두 번도 아니고 이젠 지긋지긋하다. 나는 꿈을 꾸는지 안 꾸는지도 모르게 하루를 견뎌내는 임신 준비생인데 이렇게 스트레스를 주고 있는지 알고 계실까 궁금했다. 태몽 얘기는 이젠 그만 듣고 임신에서 해방되고 싶었다.



어린 시절 아침 밥상머리에서 밤새 꾸었던 꿈 이야기를 꺼냈다가 아버지한테 혼쭐이 난 적이 있다. 이유는 이빨 빠지는 꿈이 그렇게 나쁜 꿈인 줄 모르고 밥상머리에서 신이 난 듯 조잘거렸기 때문이다. 뒤늦게 알게 된 꿈 풀이는 가까운 친인척이나 어른들이 돌아가시는 아주 섬뜩하고 불길한 꿈이었다. 다행히도 아무 탈 없이 지나갔지만 어린 마음이라 더 무서웠다. 어머님이 손주를 기다리는 마음을 극도로 지나치게 티 내셨다. 눈 감고 잠만 주무시면 태몽을 꾸시는 어머님이 부러웠다. 그날 저녁부터 꿈을 꾸지 않아서 임신이 안 되는가 싶어 매일 잠자리에 들기 전 의식처럼 태몽을 꾸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사진출처:언플래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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