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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선미 Nov 15. 2024

김장도 대물림된다

전통의 굴레에서 벗어나자

한 해 농사의 마지막인 "김장"을 끝으로 일 년 동사는 끝난다.

김장 시즌이 다가오면 어머니는 어김없이 텃밭의 배추와 무에 대한 이야기가 전화 통화 내용의 주제다. 시골에서 읍내로 이사를 나오면서 텃밭농사를 못하게 된다는 것을 가장 아쉬워하셨다. 하지만 그 말을 믿는 나만 바보였다. 어머님은 텃밭이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하실 작정이셨다. 시골인심이 후하다고 약간의 도지를 주면  배추, 고추, 상추, 감자, 파, 오이 등을 심을 땅을 구할 수 있다. 어머니에게 농사는 단순한 취미가 아니다. 그것은 자식들을 먹이고 살리는 생존의 방식이자,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자부심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이 모든 것이 전통이라기보다는 무거운 굴레처럼 느껴진다.


나는 어머니의 열정을 이해한다. 가족을 위한 희생과 사랑이 담긴 농사는 어머니 세대의 상징이기도 하다. 하지만 시대는 변했다. 배달음식이 생활화되고, 맛있는 김치를 사 먹는 것이 더 이상 부끄럽지 않은 지금, 굳이 이런 고된 과정을 이어가야 할까?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할까요?"


비 오는 날에 텃밭에서 흙 묻은 손으로 배추를 뽑으시는 어머니에게 물었다. 어머니는 잠시 멈추더니 단호히 대답하셨다.
"김치는 사 먹는 게 아니야. 네 가족이 먹을 건 네 손으로 준비해야 한다. 그래야 마음이 편하지."

그 말이 내게는 일종의 선언처럼 들렸다. 어머니 세대에게 김장은 단순한 음식 준비가 아니었다. 그것은 사랑의 표현이고, 자신이 살아온 방식의 연장선이었다. 하지만 나와 내 아이가 살아가는 방식은 다르고 세상이 달라졌다. 김장을 통해 가족의 사랑을 느끼기보다는, 오히려 김장이 만들어내는 압박감이 가족 사이를 멀게 한다고 느낄 때가 많다.


더 큰 걱정은 나의 딸이다. 어머니가 종종 말하시곤 했다.
"이제 네가 가족들을 위해서 직접 배워서 김치를 담가야 한다고." 네가 손수 담근 김치를 먹고 자란 아이들은 엄마의 손맛을 기억하기 때문에 김장을 안 할 수가 없다고. 가족들의 먹거리를 담당하고 있는 엄마라는 무거운 책임이 느껴진다. 어머님께 들은 그 말이 계속 떠올라 머릿속은 엉킨 실타래 같다. 풀어내려 하면 할수록 실이 더 얽혀가고, 매듭은 풀릴 기미조차 안 보인다.






나의 김장에 대한 감정이 딸에게까지 이 전통이 대물림된다면, 내 딸도 내가 느낀 것처럼 김장을 두려워하거나 의무감에 시달리게 될까? 딸에게도 김장은 사랑의 상징이 아닌, 낡고 부담스러운 전통으로 남지 않을까?


나는 어머니의 김장이 가진 의미를 안다. 그것은 사랑의 표현이니까. 하지만 그 사랑의 표현 방식이 반드시 김장을 통해서만 이루어져야 할까? 어머니가 농사를 짓고 김장을 하는 동안 나는 늘 물었다. “이 많은 김치를 다 먹을까요?” 어머니는 웃으며 말했다.


“다 먹지 않아도 돼. 만드는 게 중요한 거야. 김치는 우리 가족이 함께 있다는 증거니까.”

그 말속에 담긴 진심을 알면서도, 나는 지금의 시대에 맞는 새로운 방식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어머니 세대의 방식은 아름다웠지만, 그것이 반드시 강요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딸에게 김장을 물려주기보다는, 자신의 방식으로 가족을 사랑할 기회를 주고 싶다. 김장을 하지 않아도 가족은 이어질 수 있고, 다른 방법으로도 사랑을 나눌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다.





한 가지는 분명하다. 전통은 중요하지만, 그것이 다음 세대에게 부담으로 강요되어서는 안 된다. 어머니 세대의 열정과 나의 고민, 그리고 딸의 자유로움이 어우러져 새로운 방식으로 전통을 해석할 필요가 있다. 김장이라는 전통을 존중하되, 그것이 강압이 아닌 선택이 될 수 있도록.


김장은 더 이상 배추와 고춧가루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그 안에는 어머니의 사랑, 나의 딜레마, 딸의 가능성이 담겨 있다. 텃밭에서 흙 묻은 배추를 손질하며 나는 다짐한다. 이 무거운 전통을 가벼운 사랑으로 바꾸는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일 것이라고. 우리 가족만의 새로운 방식으로 김치를 해석하고, 다음 세대에는 전통이 아닌 선택의 기회를 물려주는 것이 내가 해야 할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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