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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J Feb 01. 2022

내가 한국을 떠나기까지

쥐뿔도 없이 행복할 수 있는 방법

내 나이 30대 중반을 바라보는 중

남들이 좋다아 하는 회사를 때려치우고 5년 만에 직장생활 마침표를 찍었다.

그리고 나에게 남은 건,


쥐뿔도 없었다.




어릴 때 유학생활을 인도에서 했다.

"읭?"

그래 맞다, 나마스떼 그 인도다.

내가 다녔던 기숙사 학교는 델리에서 화장실 하나 없는 꾸불꾸불 산길을 6시간을 달려야 도착하는 곳에 위치했는데 인도 세 얼간이라는 영화의 배경이었던 '심라'라는 곳이었다.

이 학교는 인도 군대 장교 출신 교장선생님의 스파르타 교육철학이 묻어다는 곳으로 새벽 5시에 일어나서 PT체조를 다 같이 하고 15분 만에 교복으로 갈아입고 복장 검사를 한다.

그 후 다 같이 모여 식당으로 이동하면 다 같이 기도를 하고 식사를 찍 소리 없이 해야 한다.

"음식 좀 더 주세요" 등의 요구는 손동작으로 할 수 있었다.


오전 수업이 끝나면 티 브레이크를 가진 후,

또다시 수업, 점심을 먹고 방과 후 수업,

강제적 취미활동(음악이나 체육, 수영, 그림 등)을 하고 저녁 자습이 끝나면, 저녁 식사를 한다.

잠들기 전에는 본인의 양말과 손수건은 빨았는지, 손톱 발톱은 깨끗한지 확인을 받고 나서야 하루가 끝이 났다.


담배 피거나 술 먹다 걸리면 퇴학
남녀가 교제를 하다 걸리면 퇴학


일주일에 한 번씩 1500원짜리 쿠폰으로 간식을 살 수 있는데 콜라 1병 작은 과자 2 봉지 초콜릿 캔디 몇 개를 구입하면 그걸로 일주일을 꼬박 지내야 했고 가디언이 방문하지 않는 이상 외출은 불가능했다.

학교가 산속에 있으니 사슴이 나오거나 새벽에는 동물 울음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이렇게 퓨어한 곳에서 학교생활을 했으니 다행히 사춘기 따위는 올 새 없이 한국 생각에 눈물 지새며 청소년기를 보냈다.


이후 영주권 취득을 위해 캐나다 토론토를 갔는데 졸업을 1년 남기고 가정이 기울어 한국으로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는 다소 식상한 전개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한국으로 돌아온 후 참 많은 것이 변했고 어린 나이에 굳이 경험할 필요 없는 것들을 경험했다.


" 야 무슨 공부야 그냥 일이나 하다가 시집이나 가"


뭐 이런저런 환경 요인에 의해서 무시를 받고 사람들의 태도가 달라지는 경험을 하다 보니 오기라는 게 생겼다


'좋은 대학교를 들어가야겠어. 그리고 대기업에 취업해서 엄마 아빠 어깨 펴고 살게 해 줄 거야'


참고로 중학교 때 내 등수는 43명 중에 딱 중간이었다. 너무나도 개방적이었던 부모님 덕분에 난 한 번도 공부해라 소리 들어본 적 없고 너무 공부해라 소리를 안 하니 내가 불안해져서 공부한 게 중간 정도였다.


이런 내가 밤낮으로 아르바이트하며 새벽잠을 줄여 공부를 했고 흔히 말하는 '인 서울' 대학교 7 군대에 합격하는 쾌거를 이뤘다. 학교를 다니면서도 부모님 부담주기 싫어서 정말 밤낮으로 공부만 했고 남는 시간에는 아르바이트만 다녔다. 덕분에 난 전 학기 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지만 다시 돌아가라고 하면 절대 돌아가고 싶지 않은 힘든 시간들이었다.


이렇게 숨도 못 쉬고 몇 년간 미친 사람처럼 앞만 보고 달리다 문득 멈춰보니 한 학기가 남아있었다.

휴학을 하고  200 원을 들고 호주로 날아갔는데 나름 열심히  나에게 주는 선물 비슷한 거였던  같다.


그리고 거기서  인생의 동반자를 만났다.


호주에서 돌아온 후 졸업을 하고 목표했던 대기업을 들어갔고 시험과 같은 "취업"합격 소식을 듣고 우리 부모님은 우셨다. 난 부모님께 자랑스러운 딸이었고 한국에 돌아온 후 이를 갈며 결심한 목표를 이뤘다.


이제 내 목표는 뭐지..?

회사생활을 하면 할수록 내가 뭘 하고 싶은 사람인지 뭘 잘하는 사람인지 뭘 하고 있는지 점점 더 알 수 없었고 매일 혼란스러웠다. 이직을 하고 난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난 뭘 잘하는 사람이지?"

"난 어릴 때 뭘 하고 싶어 했지?"


난 지금까지 우리 부모님의 자랑스러운 딸이 되기 위해서,

남들에게 내 환경 때문에 무시받지 않기 위해서,

나 스스로가 아닌 남들을 위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목표가 없으니 더 이상 미친년처럼 달려갈 수 없었고 자존감은 바닥을 쳤다.


엄마 미안해,
나 이제 내 삶을 살래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했을 때 다들 미쳤다며 다시 생각해보라고 했다.


"야 이만큼 좋은 회사가 어디 있어 진짜 다시 생각해봐"

"너 어린 나이도 아닌데 왜 이래"

"진짜 후회한다. 그냥 회사에 붙어있어"


막연하고 불분명함에 많은 사람들이 어리석다 이야기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더 이상 그런 시선에 휘둘리고 싶지 않았다. 그 결심을 하기까지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고 혼란스러웠고 많이 울었다. 그 과정 속에 내 동반자 마군이 내 옆을 지켜줬고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줬다.


네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몰라도 괜찮아.
앞으로 네가 좋아하는 것,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천천히 찾아가면 돼.
너의 인생을 살아봐.
한번 사는 인생이잖아



내 스스로 결심을 내린 순간,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안도감을 느꼈다.


나는 지금 쥐뿔도 없다.


회사를 그만뒀고,

배낭 하나만 짊어지고 동남아 배낭여행을 다녀왔으며,

오스트리아행 비행기표를 편도로 구매했고,

오스트리아 시댁살이를 두 달 정도 한 후,

쥐뿔도 없이 마군과 유럽에서 가장 비싼 물가를 자랑하는 영국으로 날아왔다.

그리고 둘 다 직장도 없다.


하지만 뭐 어떤가,

난 지금껏 그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고 온전히 나만을 생각하고 내린 결정들이 뿌듯하기 그지없다.

물질적으로는 풍족하지 않지만 직장생활을 하면서 월급을 꼬박꼬박 받고 사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살 때보다 훨씬 편안하고 마음적으로 자유롭다.


X마이웨이

X마이웨이를 갈 수 있는,

이 세상 모든 이들을 진심으로 응원한다.


- 2018년 2월의 어느 눈 오는 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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