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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뮤즈노트 Sep 25. 2024

[아낙시만드로스] 비판

한동안 풀밭에 앉아있던 유진은 소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플라톤 선생님 말씀대로 아이템을 얻긴 했는데, 레벨업은 어떻게 하는 거지?"


"아이템을 주신 탈레스 선생님의 가르침을 되뇌어봐."


그 말에 유진은 기본 카드를 하늘로 쭈뼛거리며 올린다. 소녀가 묻는다.


"그 이상한 동작은 뭐야?"


"원래 레벨업 때는 멋있는 자세를 취해야 하거든."


피식 웃는 소녀에도 아랑곳 않고 유진이 외친다.  


"탈레스 님의 가르침은 주. 근. 깨! 주장에는 타당한 근거가 있어야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유진의 외침에 문어 고리에 빛이 감돌더니 번개처럼 번쩍 인다. 유진의 손에 짜릿한 느낌이 들었다. 머리 위에서 숫자가 ‘뾰롱’ 소리와 함께 나타났다.

 

‘레벨 2.’


“저것 좀 봐! 진짜 레벨이 올랐어. 이대로라면 너, 금방 집에 갈 수 있겠다!


소녀의 격려에 유진은 어깨가 으쓱해졌다. ‘레벨 업 기념으로 물 항아리 폭포 슬라이드나 타볼까?’ 카드를 비벼 항아리를 꺼내려는데 숲에서 부스럭 소리가 들렸다. 이내 먼지가 가득한 두꺼운 외투를 바닥까지 늘어뜨린 여러 개의 그림자가 몰려든다. 음침하고 서늘한 모습이 마치 유령 같다. 놀란 유진은 소녀의 등 뒤로 숨으며 동네가 떠나가도록 외쳤다.


“유... 유령? 아무도 없어요? 살려주세요!”


소녀는 유진을 자신의 등 뒤로 숨기며 곧바로 전투 자세를 취했다.


“저건 유령이 아냐. 우린 미토스의 숲에 들어왔고, 저건 미토스의 정령이야!”


소녀가 용감하게 정령을 향해 뛰어간다. 정령이 소녀를 향해 동굴처럼 검은 입을 벌리자 입 안에서 불꽃이 일렁이며 뿜어져 나왔다. 소녀는 불꽃이 닿으려는 찰나 재빨리 풀밭에 굴러 피했다. 그리고 정령을 향해 중얼중얼 주문 같은 말을 읊조리며 품 안에서 나무로 된 검을 뽑았다.

“와~ 멋지다!”


유진은 소녀의 현란한 공격과 수비에 매혹된 채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 틈에 정령은 불을 뿜으며 유진 쪽으로 자꾸만 다가왔다.  


“아앗!”


불꽃을 막으려다 소녀는 팔을 다치고 말았다. 유진은 바위 뒤에서 뛰어나와 소녀를 부축하며 생각했다.


‘어떻게 하지? 아, 맞다! 불에 맞설 수 있는 건 물이니까 항아리 아이템을 소환해야겠다.’


재빨리 카드를 비벼 물 항아리를 꺼냈다. 거꾸로 들자 물이 폭포처럼 쏟아졌다. 거센 물줄기에 올라탄 유진은 소녀의 허리를 낚아채서는 깊은 숲으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한참을 떠내려가다 보니 멀미가 날 것 같았다.  유진은 탈레스 선생님처럼 항아리를 들어 올렸다. 순간 물이 항아리 안으로 들어갔고 두 사람은 풀밭에 쿵 하고 엉덩방아를 찧었다.


미토스와 로고스


“괜찮아? 안 다쳤어?”


유진은 불에 그을린 소녀의 외투를 들어 올리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소녀는 괜찮다고 말하며 손을 뿌리치고는 재빨리 다친 팔을 외투로 덮었다. 소녀가 말했다.


“아까 본 건 미토스(mythos)라고 하는 숲의 정령들이야. 미토스는 신들의 이야기, 신화란 뜻이지."


"응? 사람들 근처에 저런 무시무시한 정령들이 산다고? 왜 다 같이 없앨 생각을 하지 않는 거지?"


"이곳에 있는 사람들 대부분은 미토스의 정신을 믿기 때문이야. 번개가 쳐도 신이 한 일이고, 사과가 떨어지는 것도 신이 한 일이고……. 그렇다 보니 탈레스 선생님을 위협한 것처럼, 대부분 사람들은 제대로 된 질문을 할 줄 몰라. 당연히 신이 그랬다는 것 빼고는 타당한 근거도 생각하지 않지.”


“응. 맞아. 불을 뿜는 걸 보니 확실히 신이 맞는 것 같아.”


유진의 말에 소녀가 한심하단 표정을 지었다. 유진은 변명하듯 말을 이었다.

 

“불을 뿜는 정령인지 신인지를 무슨 수로 이기겠어! 더 센 아이템이 있다면 모를까.”


그때 문어 고리가 반짝이더니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미토스를 이기는 건 바로 로고스! 로고스는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이성이라는 뜻이다. 이성이 있다면 언제든 미토스를 이길 수 있지.”


유진이 소리 나는 곳을 쳐다보자 어떤 할아버지께서 서서히 걸어와 앞에 섰다.



비판의 검을 얻다


아낙시만드로스 : 안녕하신가. 친구들. 나는 탈레스의 제자인 아낙시만드로스라고 하네. 물소리가 들리기에 스승님이 오신 줄 알았지 뭐냐. 물 항아리를 보니 너흰 이미 스승님을 만난 모양이군.

유진 : 네. 탈레스 선생님의 물 항아리는 도망갈 땐 쓸모가 있는데 미토스와 맞서기엔 영 부족한 듯해요. 그래서 말인데요, 아낙... 아낙네? 낙지만두? 아무튼 탈레스 님 제자라면 뛰어난 능력이 있으실 테니 공격 아이템 좀 주세요. 미토스를 이기는 로고스인지, 그거, 아이템 맞죠?

아낙시만드로스 : 내 이름은 아낙시만드로스, 에헴. 아무튼 로고스의 힘은 누구나 갖고 있단다.

유진 : 저한텐 로고스 아이템은 없다니까요? 기본카드랑 물 항아리뿐인데.

아낙시만드로스 : 하나만 물어보자. 너는 탈레스 선생님 주장을 들었는데, 그 근거가 맞다고 생각하니?

유진 : 탈레스 선생님 주장에 반대하고 싶진 않지만, 아르케가 물이라면 정령이 쏜 불꽃도 물에서 나왔단 거잖아요? 물에서 불이 나오다니... 그건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아낙시만드로스 : 감히 최초의 철학자인 나의 스승님 생각에 반대하다니!

유진 : 죄송해요. 제 뜻은...

아낙시만드로스 : 허허허. 농담이다. 사실 나도 같은 생각이거든. 스승님 가르침대로 아르케가 있다는 말엔 동의해. 하지만 니 말대로 불조차 물에서 만들어졌다는 건 이해할 수가 없어. 게다가 세상이 바닷물 위에 떠 있다는 것도 이상하지. 세상을 물이 떠받치고 있다면 그 물은 이번엔, 무엇이 떠받치고 있단 거지?

유진 : 선생님은 이치에 맞는 생각만 받아들이고 옳지 않은 주장과 근거는 반대하시는군요.

아낙시만드로스 : 오! 꽤나 똘똘한 녀석이구나. 로고스에 비추어 옳지 않은 것을 따져 묻는 비판이야 말로 진리에 가까워질 수 있는, 학문의 기본 방법이다. 나 역시 스승님을 비판하면서 아르케는 무한자, '아페이론'이라고 주장했지. 그런데 내 제자인 아낙시메네스가 이번엔 나를 비판하면서, 물질의 근원은 공기라고 주장하는 거야. 나 원참!

유진 : 제자분 성함이... 아낙시.. 낚싯대요?

아낙시만드로스 : 에잉!

아낙시만드로스는 유진이 이름을 자꾸 틀리게 말하자 “에잉!” 하며 삐친 듯 표정을 지었지만 품에서 번쩍이는 멋진 칼을 꺼내 건넸다.


“어쨌거나 미토스와 싸울 비판의 검을 주마. 로고스 즉, 이성에 비추어 잘못이 있다면 누구든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정신을 담아서 만든 검이지.”


유진은 덥석 비판의 검을 잡고 이리저리 휘둘러봤다. 아낙시만드로스가 덧붙였다.


“그 칼이 있으면 상대방의 허점과 모순을 찾아 무찌를 수 있다. 하지만 냉철한 이성 없이 휘두른다면 다른 사람은 물론 자신을 다치게 할 거야. 꼭 기억하거라!”


“네!”


말을 마친 아낙시만드로스는 급하게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유진은 손쉽게 철학자의 아이템을 손에 넣은 게 신나서 감사 인사도 잊고 있었다. 비판의 검을 카드에 넣으려는데 불에 덴 팔을 끌어안고 있던 소녀가 눈에 들어왔다.


"팔은 괜찮아? 아깐 정말 고마웠어!"

  

유진은 조심스럽게 이름을 물어봤다. 소녀는 물끄러미 올려다보는가 싶더니 대답 대신 외투를 걷어 다친 팔을 보여줬다. 팔은 살갗이 아닌 매끈한 플라스틱으로 되어 있었다. 마치 블록 인간의 팔 같았다. 유진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내 이름은 하나.”


"하.... 하나!"


“응. 그래. 팔이 이상하지? 사실 나는…….”


그때 유진이 끼어들며 말했다.


“하나야, 걱정 마. 못된 미토스의 불에 맞아 팔이 변한 게 분명해. 강력한 비판의 검도 얻었으니 내가 가서 정령들을 무찌르면 원래대로 돌아올 거야!”


하나의 낯빛이 어두워졌어요.


“유진아, 사실 미토스가 나쁜 것만은 아냐. 창의력, 상상력, 마음이 담긴 예술과 감동적인 이야기에는 미토스의 힘이 필요하거든. 아름다운 세상은 이성과 논리로만 만들어지지 않아.”


“뭐라고? 니 팔을 플라스틱으로 만들고, 우리를 공격한 정령들을 감싸고돌다니 이해할 수가 없네. 미토스는

그냥 미신 같은 것일 뿐이야, 하나야!”

 

두 사람이 티격태격하는데 푸르고 영롱한 빛이 비판의 검날을 훑고 갔다. 유진은 헤벌쭉 웃으며 비판의 검을 높이 치켜들고 외쳤다.


“그렇지! 이제 레벨 업의 기쁨을 맛볼 차례군!”


유진은 레벨이 오르길 잔뜩 기대하며 하늘 높이 칼을 들며 외쳤다.


"로고스, 이성적 원리에 비춰 따져 묻는 것이 비판이며, 비판은 학문의 기본 방법이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빛이 모이는가 싶더니 비눗방울이 터지듯 '뽁' 소리와 함께 사라져 버렸다. 한동안 칼을 하늘에 멋지게 들어 올린 채 서 있던 유진은 레벨업이 실패하자 비판의 검을 땅바닥에 두드리며 불만스럽게

말했다.

 

“뭐지? 비판에 대해 정확히 말한 것 같은데……. 시스템 오류인가?”

 

하나가 다가와서 실망한 유진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비판의 검은 강력한 만큼 다루기가 몹시 까다로운 아이템이라고 알고 있어. 함부로 휘두르다간 자신은 물론 다른 누군가를 크게 다치게 할 수 있다고 하셨잖아.”


하나의 말에 유진은 뭔가 깨달은 듯 소리쳤다.


“맞다. 미토스의 정령과 싸우면 되겠네. 게임에서도 그러거든. 좋은 아이템을 가지고 적들을 물리쳐서 경험치가 오르면 자연스레 레벨 업이 될 거야. 미토스를 물리치면 네 팔도 원래대로 돌아오겠지?”

 

“그런 게 아냐!”


“일단, 넌 여기서 안전하게 기다려. 비판의 검 앞에 무릎을 꿇어라! 미토스의 정령들아!”


말릴 틈도 없이 유진은 비판의 검을 옆구리에 차고, 물항아리를 이용해 미토스의 숲으로 빠르게 들어가 버렸다. 하나가 쫓아가며 다급하게 외친다.

 

“안 돼! 넌 아직 준비가 안 됐어! 그리고 나는, 나는!



아낙시만드로스의 가르침
: 비판은 학문의 기본 방법이다!

학습 키워드
: 미토스와 로고스 / 비판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이 살던 세상에는 신화가 만연해 있었습니다. 우리가 재밌게 읽던 그리스로마 신화처럼 번개가 치면 제우스의 번개창이 떨어졌다고 생각하고, 풍랑이 일면 포세이돈이 화났다고 여겼지요.


이처럼 세상을 신의 섭리로 생각하여 진리로 섬기는 관점을 미토스라고 합니다. 미토스는 미신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번개와 풍랑이 신 때문이라니 학자들이 들으면 화를 내겠지요?


고대 그리스에서 철학이 탄생할 때는 미토스의 시대였습니다. 소크라테스의 문답법에서 배웠듯이 철학자들은 신이 세상을 움직인다는 당연한 생각을 청개구리처럼 반대로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미토스에 반대되는 로고스를 찾아낸 것입니다.


로고스를 이용해서 번개와 풍랑이 치는 이유를 관찰하거나 이성적으로 추론했습니다. 그리고 주근깨를 이용해 새로운 주장을 펼쳤고, 그 주장에 문제가 있으면 아낙시만드로스처럼 비판하면서 학문을 발전시켰습니다. 더 올바른 답을 찾으려는 비판은, 학문의 기본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재밌는 점은 미토스와 로고스가 반대되는 두 가지 입장을 갖듯, 로고스 안에서도 탈레스와 플라톤의 입장이 경험론과 합리론이란 두 가지 갈래로 갈라진다는 것입니다. 결국 세상은 이원론으로 나뉘는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그렇다면 이원론을 극복하는 방법은 없을까요? 어쩐지 똑똑한 철학자들이 서로 반대되는 것을 그냥 놔두지 않았을 듯한데... 뒷부분 이야기가 기대되지 않나요?




아낙시만드로스(기원전 약 610년~기원전 546년)는 탈레스의 제자로 알려졌습니다. 최초의 철학자였던 탈레스, 아낙시만드로스, 아낙시메네스 등은 밀레토스 지역(현재의 튀르키예 서부 해안 지역)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이들을 ‘밀레토스 학파’라고 부릅니다.


그들은 신이 세계를 만들었다는 1) 미토스를 믿기보다는 2) 로고스로 아르케를 탐구하는 등 이성을 중시하는 3) 관점으로 세상을 봤습니다. 아무리 스승의 주장이라 할지라도 이성적으로 살펴, 잘못된 점은 4) 비판하고 토론하며 더 나은 진리를 찾고자 노력했습니다.


주장-근거-깨달음이 학문의 기본 구조라면 ‘비판’은 학문의 기본 방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학자들이 논문을 주장-근거-깨달음 형식으로 발표하면 동료 학자들이 이를 비판하는 논문을 써서 반박하는 과정은 지금도 이어지는 학문의 전통입니다.


1 미토스 : 신의 이야기, 즉 신화란 뜻으로 상상과 믿음, 종교적인 관점을 나타냅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세상은 신이 만들었다’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자연현상조차 신화적이고 종교적으로 이해하려 했습니다.
2 로고스 : 법칙, 공식, 논리, 말 등 여러 뜻으로 사용됩니다. 로고스란 말을 처음 사용한 사람은 헤라클레이토스로 세상의 원리, 궁극적인 법칙이란 의미로 사용했습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이성적 원리를 상징하고 대표하는 용어로 사용됩니다. 예를 들어, 탈레스 이후의 철학자들은 미토스가 아닌 로고스의 관점으로 세상을 보며 학문의 발전을 이끌었는데, 이를 ‘미토스에서 로고스로’라고 표현합니다.
3 관점 : 사물이나 현상을 관찰할 때 그 사람이 바라보는 태도나 방향을 뜻합니다. 사람마다 경험과 지식이 다르므로 관점이 다르면 같은 현상도 다르게 보입니다.
4 비판 : 주장의 옳고 그름을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평가하는 것을 뜻합니다. 비판 역시 남을 설득하는 주장이므로 주장-근거-깨달음 구조에 맞게 논리적이고 객관적이어야 합니다. 또한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타당하다면 내 생각과 다르더라도 존중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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