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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설팅의 기초

6화

by 뮤즈노트

종욱은 일주일 후로 진료 예약을 잡아주며 덧붙였다.


"약을 끊는 건 새 약을 세팅하기 위해서이기도 하니까, 다음 진료 때까진 끊도록 해봐. 복용 중단 시점엔 미리 언질을 줘. 여차하면 구급차를 불러야 할지도 모르니 말이야."

"그 정도로 심각할 수 있나?"

"입원하고 조절하는 게 일반적이긴 하지만 넌 병원을 끔찍하게 싫어하니까... 그리고 현재 불안감을 다시 느낀다니 조심하는 거야."


대화가 끝나고 병실 문을 열자 건장한 어깨의 남자가 '실례'라면서 진료실로 들어갔다. 종욱과 연구 관련 논의를 할 제약사 직원임에도 연구원이나 회사원이란 직업적 느낌이 없었다. 그에게선 독특한 향수가 풍겨왔는데 장례식장에서 맡을법한 향내에 가깝다고 느꼈다. 그리고 커다란 손에는 푸른색 별 모양 문신이 새겨있었다. 여러모로 특이한 사람이었다. 독영은 남자의 뒷모습을 보다가 종욱의 말을 생각했다.


'부모님께서 사고로 돌아가신 후 증세가 나타났으니, 극심한 스트레스로 발현된 거라고 볼 수도 있지만...

너는... 천재가 아닐까?'


열 살 무렵, 부모님이 사고로 돌아가셨다는 말을 듣고 쓰러져 며칠을 병원에 누워 있었다. 불쾌한 깊은 잠에서 깼을 때, 누군가 하드디스크를 강제로 꺼내 포맷을 한 것처럼 기억을 모두 잃었다. 의료진은 충격으로 인한 일시적 현상이라고 했다. 하지만 어린 독영은 집으로 돌아와 가족사진을 보고 나서야 꿈속에서 어렴풋이 떠돌던 이미지가 자신의 부모였음을 깨달았다.


친가 가족이 없던 탓에 외조모부가 독영을 거두려 했지만 완강히 거부했다. 워낙 고집을 부리며 밥 먹기까지 거부하자, 매일 아침과 저녁 외가 어르신들이 출퇴근하듯 돌봐줄 수밖에 없었다. 그분들은 부모님과의 추억이 서린 공간을 떠나기 싫어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이 공간이 기억을 되찾는 유일한 단서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렇게 유년 시절을 텅 빈 아파트에서 혼자 살았다. 또래와 다르단 이유로 정신과에 일주일에 한 번씩 방문했고 ADHD 진단을 받았다. 약을 먹은 이후로는 더 이상 악몽도 꾸지 않았고, 기억력 감소도 멈춘 듯했다. 멍하니 한 곳을 주시하는 이상 행동도 없어졌다. 대신 지나치게 정상적인 아이로 변했다.


학교 성적도 뛰어났다. 선생님들이 기대할만한, 전교에 한 두 명 있을법한 전형적인 모범생으로 자랐다. 그렇게 이십여 년이 흘렀다. 스스로 자각하진 못했지만 몸과 정신에는 깊은 고독이 여울목의 바위처럼 파여 갔다. 사랑하는 사람과 가족에 대한 갈망은 자연스러운 것이 되었다. 그러나 기억을 찾고야 말겠다는 무의식이 사랑과 가족에 대한 갈망으로 이끈 측면도 있었다. 어린 시절에 느꼈던 것과 같은 따뜻한 가정을 만들게 되면, 약에 취해 몽롱한 듯한 혼돈의 안개가 물러나지 않을까? 자각하지 못했지만 그는 늘 그런 기대를 품고 있었던 것이다.


"띠링"


영수증과 처방전을 받아 들고 차로 향하는 길에 휴대폰 소리가 들렸다. 짧은 문자가 와 있었다.


맑은 하늘이네요. 서울엔 며칠만 가능한 날씨

저희 지점은 지하라 오늘 하늘을 못 봤어요. 손해 본 느낌이네요


지나가 장담한 대로다. 불과 삼 십 분 만에 거짓말처럼 답변이 도착한 것이다. 그것도 상당히 우호적인 느낌이다. 얼떨떨했지만 이성에게 처음으로 받아본 긍정적인 반응이었다. 지나에게 전화를 했다.


"어디 보자. 삼 십분 정도 걸렸네요?"


그녀는 기뻐한다기보단 당연하다는 반응이었다. 그는 답장에 걸린 시간을 따지는 이유를 물었다.


"근무 시간인데 30분 정도라면 불안과 의심에 시달리다가 구원받은 기쁨을 주체 못 하고 바로 답장했다고 봐야죠. 그중 15분 정도는 어떻게 답변할까 하고 문장을 만들고 있었을 테니. 이번 주말 저분과 데이트하실 건가요?"

"이번 주말 만날 지에 따라 문자도 달라지나요?"

"물론이죠. 연인만큼 친하게 만들어줄 수도 있어요. 원한다면요."

"평범한 사람과 두 번째 만남에 연인이 된다고요?"

"흠. 첫 만남에 사귀는 남녀도 모두 평범한 사람들이에요."


여성의 손조차 제대로 잡아본 기억이 없는데, 두 번만에 연인이 되는 방법이 있다니 믿기지 않는다. 독영은 마법사처럼 요술봉을 들고 있는 지나의 모습을 상상했다. 두어 번 요술봉을 휘저으면 '짠'하고 남녀가 연인이 된다니.


"좋은 제안이긴 한데, 그렇게 하다간 계약 전이니 돈을 한 푼도 못 받으실 텐데요."

"뭐 상관없어요. 이런 짧은 만남은 관리된 기억이 없어서 관계 유지가 안 될 테니까요. 진짜 원하는 상대를 만나기 위해 결국 계약을 검토하게 될걸요?"

"계약은 미루면서 이런 코칭 기술을 잔뜩 습득해서 막 만나고 다닌다면?"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건 코칭도 뭣도 아니에요. 누구나 알고 있는 맛보기 가이드 수준이라 습득하고 말 것도 없어요."

"누구나 알고 있어요? 이런 걸?"

"네에. 프레쉬맨 잉글리시 수준이죠."

"헛살았군요."

"자책할 건 없어요. 이런 스킬은 유효 기간이 길지 않아요. 붉은 여왕만 봐도 알 수 있죠."

"붉은 여왕?"

"다른 곳으로 가고 싶으면 남들보다 두 배는 빨리 달려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비슷해요. 거울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붉은 여왕 이야기에서 파생된 이론이죠. 서로 경쟁하면서 함께 진화하는 개념을 설명할 때 쓰죠."

"공진화?"

"맞아요. 공진화. 연애는 자유 경쟁 시장이에요. 누군가가 혁신 기술로 우위를 점하면 그 기술은 해당 시장에서 끊임없이 피드백되면서 유행해요. 그렇게 자주 쓰이며 퍼지다가 더 이상 먹히지 않게 되죠. 픽업아티스트의 어설픈 조언이나 SNS, 유튜브의 연애코칭이 성공할 수 없는 이유가 거기에 있어요. 주식 시장에서 공개된 정보는 정보가 아닌 것처럼 모두가 아는 전략은 먹힐 리가 없으니까요. 혁신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도태되고 마는 거죠."


외로움 컨설팅 주식회사가 뛰어난 것인지 지나란 담당 매니저가 유독 전문적인 식견을 갖춘 것인지 알 수는 없었다. 하지만 단순한 행동 하나하나에도 명확한 논리가 숨어 있었다. 그녀에 대한 호기심이 커졌다.


"두 번이 서비스라고 했죠?"

"네. 방금 전 은행 다니는 사람과 내일 예정된 소개팅까지 애프터가 가능하게 가이드해드려요. 일단 은행원과는 어떤 관계까지 핸들링해드릴까요? 두 번째 데이트? 아니면 연인까지?"


독영은 은행원과 팔짱을 끼고 걷는 모습을 상상해 봤다. 군데군데 살 집이 있고 눈 코 입이 동글동글 부드러운, 호감 가는 인상의 여성이었다. 얼마 전 실내 골프를 시작했고 겨울엔 스키장을 다닌다고 했다. 그 나이또래 여성들이 꺼낼 만한 이직이나 인간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주로 나눴다. 몇 년 후 서울 근교의 신축 아파트 놀이터에서 아이 손을 잡고 유치원 셔틀을 기다리는 모습이 연상될 정도로 평범한 사람이었다.


"데이트면 충분해요."

"연인이 아니라고요? 부끄러워할 필욘 없어요. 독영씨 연애 생활은 이미 사막에 가까운 상태 아닌가? 저는 비즈니스 매니저일 뿐이니까 편하게 말해요."

"지나 씨에게 제 사막을 평가받는 것도 부끄럽지만, 두 번째 만나서 연인이 되는 건 너무 빨라요."

"좋아요."

"뭐가요?"

"그냥 독영씨 생각이 좋아요. 주변에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타입이 맞단 말이죠. 지루한 사람. 그런데 좋은 사람."


독영은 새삼 누군가가 프로그래밍을 해 놓은 것처럼, 성인이 된 후 주변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늘 당연한 말과 행동을 하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오케이. 사진을 다운로드하여서 그대로 보내요. 그리고 이번엔 문자가 와도 답장 하진 말고요."

"그러는 이유 역시 무슨 무슨 이론에 따른 거겠죠?"

"물론이죠. 그나저나 지금 뭐 하고 있어요? 특이한 꿩 울음소리가 들리네요? 등산 중인가?"

"약을 받으러 왔어요. 지금은 병원 주차장이고요. 뒤편에 야트막한 산이 있어요."


그 역시 특이한 울음소리라 생각했다. 쏙독새처럼 연달아 "꿔 꿔 꿔 꿩꿩"하는 식이었다. 그녀는 잠시 동안 별 말이 없었다. 뒤이어 찰칵하는 셔터음이 들렸고 문자가 오는 진동이 울렸다.


"지금 사진 보냈으니 전송하세요. 그리고 다음 소개팅 가이드 해드려야 하니 오늘 저녁 잠깐 봬요."

"그쪽이 문 따고 들어온 이후에 현관 비밀번호는 바꿨어요. 나도 기억하지 못할 만한 번호로요."

"오늘은 밖에서 만날 거예요. 밥 정돈 살 수 있죠? 식당 주소는 보낼 테니 그리로 오세요."


'툭' 전화가 끊긴다. 그는 문자로 온 사진을 확인했다. 맑은 하늘과 고층 빌딩이 이어지며 만들어내는 스카이라인, 그리고 그 풍경은 정확히 사진을 반으로 접었다 펴놓은 것처럼 한강에 반사되고 있었다. 짧은 시간에 찍었다기엔 프로페셔널한 구도였다. 재능이 묻어 난 사진이었다. 지나 말대로 사진을 첨부한 뒤 전송 버튼을 눌렀다. 동시에 여자 후배에게 전화가 왔다.


"선배님!? 미안해요, 급한 일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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