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뭐라고?"
독영의 주치의인 종욱은 찻잔을 내려놓고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웃었다. 중학교 때 만난 유일한 친구. 천재란 별명답게 고교 시절 월반을 했고 명문 의대를 수석 입학하고 당연하다는 듯 수석으로 졸업했다. 빠르게 박사 학위를 딴 이후, 대학 병원에 남으라는 교수들의 압력을 물리치고 이곳, 공기 좋은 교외의 요양 병원을 택했다. 연구를 마음껏 하며 논문을 쓸 수 있다며 흡족해했다. 게다가 그의 독창적인 연구에 흥미를 느낀 대형 제약사가 연구 과제도 발주를 했다. 천재다운 선택으로 보였다.
"어제 상담도 받았는 걸. 소개팅 애프터 코칭은 무료래. 맞춤형이 아니라 맛보기라 상관없다고."
그의 말에 종욱이 되물었다.
"나는 상담 안될까? 시골에서 환자만 보고 논문만 쓰니까 외롭다. 그리고 어떻게 애프터를 받게 해 줄까 궁금하네."
"임의로 가입은 안되고 적합한 사람에게만 연락하는 거래. 그래서 로또 맞은 거라던데."
종욱은 다시 크게 웃었다. 처방을 위해 매번 병원에 방문하는 게 귀찮을 수도 있지만, 진료실 대화가 좋았다.
"독영아, 그렇게라도 니가 연애에 성공하면 좋겠어. 언제나 사랑하는 사람과 가족이 생기길 바랐잖아. 어린 시절 부모님 돌아가시고 쓸쓸하게 산지가 벌써 몇 년이냐, 한 이십 년 되나."
"21년... 7개월 21일째지."
"LCI인지 뭔 지하는 그 회사, 진짜 믿을만하다면 말이야. 나도 축의금 미리 내는 셈 치고 무조건 절반은 보태마. 그나저나 네 주위엔 이상한 일이 일어난단 말이야.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지. 기억나? 학교 뒷산 뱀굴?"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건 늦가을 오후, 중학교 뒷산에서였다. 그날따라 독영은 학교 뒷산을 거닐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학교 경계 철조망 너머로 멍하니 서 있는 종욱을 발견했다. 다른 반이었지만 늘 전교 1등은 그였고, 2등은 그였었기에 한눈에 알아봤다. 독영은 손을 휘두르며 땅바닥을 가리켰다. 종욱은 텅 빈 눈으로 바닥을 내려다봤다. 동면하러 가던 독사 서 너 마리가 잔뜩 경계하며 머리를 세운 채 노려보고 있었다. 철조망을 뛰어넘어 종욱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잔뜩 약이 오른 뱀을 피해 빠져나올 수 있게 도왔다.
"아무렇지 않게 뱀을 피해서 끌고 나가길래 무슨 마법이라도 부리는 줄 알았다니까."
"약을 깜빡하고 안 먹은 날엔 가끔씩 이상한 패턴이 보여. 그걸 피해 발을 디디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그리고..."
"...?"
"요즘은 약을 먹어도 그런 패턴이 보이기 시작했어. 어제도 베란다 창에 맺힌 빗물에서 패턴을 봤고 말이야. 기억은 나지 않지만 익숙한 불안감이랄까..."
종욱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때 독영의 휴대폰이 울렸다. 매니저 지나였다. 독영은 손가락으로 휴대폰을 가리키며 '매니저'라고 입모양을 뻥긋했다. 종욱은 흥미로운 표정으로 바라봤다.
"전화받기 괜찮아요?"
활기찬 목소리가 휴대폰을 뚫고 나왔다.
'888'이란 암호를 남기고 간 터라 걱정했는데 안심이 됐다. 그는 당장 그 의미를 묻고 싶었지만 상담내용이 녹음 중일 수 있으니 난처해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네. 괜찮아요. 그쪽은요?"
"일은 많죠. 유능한 직원이 한 가지 일만 할 리는 없잖아요?"
농담을 할 정도라면 '폐기'든 '암호'든 당장 위급한 상황은 분명했다. 그녀가 말을 이었다.
"지난 소개팅에서 만난 은행원은 오늘로 나흘 째, 그간 서로 연락은 없었고, 맞죠? 그리고 오늘 날씨는 맑음."
"그런 셈이죠. 식사만 하고 서둘러 집에 간다고 해서 연락할 수 없었어요. 솔직히 상대의 거절에도 지쳤고요."
종욱은 미간을 찡그리며 안타깝다는 듯 그를 바라봤다. 지나는 메모지를 하나 준비하라고 말했다. 종욱이 종이와 펜을 내밀었다. 지나가 문장을 불러줬다.
맑은 하늘이네요. 서울엔 며칠만 가능한 날씨
"이 문장을 그분께 문자로 보내세요."
"문자요? 톡이 아니고?"
"평소 대화를 끊거나 관계를 차단한 기억이 있는 플랫폼은 안 돼요. 그분도 톡으로 거절한 남자만 대여섯 명은 될 걸요? 그런 기억에 영향을 받아요. 문자로 하세요. 정확히 그 문장으로."
"갑작스럽고 뜬금없어 보이는데?"
"독영씨는 충분히 매력적이지만 평범한 여성은 그걸 발견하기 어려워요. 이럴 때에는 서사학적 기교를 써야 해요. 소설을 읽을 때 이 캐릭터의 정체는 뭐지? 라거나 다음 문장은 뭘까 궁금해지는 그런 거 있죠? 게다가 저 문장은 3일 동안 연락이 없다가 문자로 날씨 이야기를 한다는 점에서 의외성이 있죠."
"당황하는 심리를 노리란 건가요?"
"아뇨. 상대는 저 문자를 받는 순간, 오히려 안심할 걸요? 평범한 결혼 적령기의 상대는 만남 후에 연락이 없으면, 기대, 자위, 의심이라는 심리적 시퀀스를 겪어요. 첫날, 맘에는 안 들었지만 애프터 톡이 오려나 하는 은근한 기대, 둘째 날은 오히려 잘됐네. 별로인 남자였는데 뭐. 셋째 날, 저 정도 남자에게도 내가 혹시 별로인 건가? 하는 의심이 슬금슬금 올라오죠."
"저 정도 남자?"
그 말에 종욱은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손으로 간신히 막았다. 그리곤 미안하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지나가 말을 이었다.
"그 문자는 여자분 입장에선 반가워요. 사실 나흘동안 자기 의심에 시달렸거든요. 그걸 독영씨가 해소해 준 셈이니까 호기심이 생겨도 긍정적이고 밝은 느낌이죠. 신뢰 강화 프로그램이니까 시키는 대로 해보세요. 저녁 전에 바로 회신 문자가 올 거예요. 제 생각엔 한 시간 내로 답이 올 확률이 더 높지만요."
그는 시키는 대로 문자 창에 문장을 써넣고 전송 버튼을 눌렀다.
"보냈어요."
"오케이. 회신 문자가 오면 또 통화해요."
전화를 끊자 종욱이 감탄한 듯 박수를 쳤다.
"대단한데. 확신에 차 있고 논리적인 정합성이 있어. 뭔가 흐릿한 너한테 꽤나 어울리는 코칭이네."
"그런가? 아직은 공짜니까."
그때 진료실 문이 열리고 담당 간호사가 빼꼼히 고개를 들이밀었다. 5분 뒤 연구를 발주한 제약사 담당자와 진행 관련 미팅이 있다고 알려왔다. 종욱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그를 바라봤다.
"너랑 처음 만난 날 내가 뒷산에서 뭘 하고 있었는지 알아?"
"담배를 들고 있었지 아마?"
"그래. 담배를 들고 있었지. 한 대 피우고 나서 어떻게 할까 선택해야지 생각하고 있었어."
"..."
"그런데, 의사 부모님 밑에서 받는 압박이 그 정도는 아니었나 봐. 두 분 다 내가 대학 들어간 뒤 돌아가셨으니 일찍 돌아가시게 될 걸 알고 외아들 학업에 조바심을 냈나 싶기도 하고..."
종욱은 그를 보며 말했다.
"어쨌든 너는 나를 두 번 구한 셈이라고. 너에겐 구원자로서의 특별한 능력이 있어."
"우연이지 뭐. 도리어 매번 편하게 약을 처방받고 있으니 내가 고맙지."
"우연한 것처럼 보이는 사건도 모두 연결되어 있는 법이야. 그래서 말인데... 약을 끊어보는 건 어때?"
"...?"
"솔직히 지금 약은 혈압약처럼 튀어나갈 어떤 것을 억누르는 효과만 있을 뿐이야. 중독성은 없지만 심리적인 의존성과 내성은 생기지. 약효가 떨어지는 이유도 그 때문일 수 있어. 게다가..."
종욱은 머리를 긁적였다. 뭔가를 결심한 듯 입맛을 다셨다.
"너를 성인 ADHD로 진단하는 건 잘못된 거라고 생각해. 난 중학교 시절부터 너를 봐 왔기 때문에 다른 병원에서 트랜스퍼된 의료기록을 보고 이상하다고 생각했어. 굳이 따지자면 보고되지 않은 아스퍼거 증후군에 가깝다고 생각해."
"아스퍼거 증후군? 자폐 성향 천재 같은 거?"
"증세가 비슷해서 오진하는 경우가 많기도 한데... 솔직히 이것도 의심일 뿐이야. 자폐성향이 거의 없는, 아주 특이한 케이스니까 말이야. 이전 진료기록을 볼 때, 부모님께서 사고로 돌아가신 후 증세가 나타났으니 극심한 스트레스로 발현된 거라고 볼 수도 있지. 하지만 아까 말한 대로 우연한 것처럼 보이는 사건도 모두가 연결되어 있는 법이야. 대개는 그 복잡성을 해석하지 못하지만, 넌 오히려 그걸 해석해 냈기에 더 큰 충격을 받았던 게 아닐까? 그런 점에서 너는..."
종욱은 그의 눈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너는 순도 백 퍼센트의 천재에 가까운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