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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설턴트의 방문

3화

by 뮤즈노트

아파트 2층 창에 빗물이 흐른다. 기세를 키운 백목련에 봄비가 타닥 소리를 내며 흔들린다. 독영은 1.5리터 생수통을 들고 불도 켜지 않은 채 멍하니 창을 바라본다. 16시 뉴스 운행표가 떠오른다. 시간을 단위로 만들고 가상의 선을 그어 정리하는 일. 구획되고 질서 잡힌 것은 이상하게 안정감을 전해준다. 질서가 문제없는 오늘을 만든다. 하지만 최근 여유가 줄고 긴장이 늘게 된 것도 사실이다. 몇 달 전부터 약효가 떨어지고 먹구름의 그림자가 짙어지듯 다가온다. 평균 시청률을 모두 맞힌 보고서도 그즈음 만들어졌다.


"띠띠띠띠 띠리링"


처음엔 환청이라 생각했다. 현관의 노란 센서 등이 켜진다. 누군가 침입한 것을 깨닫게 된 것은 거실 등이 켜진 뒤였다. 독영은 얼어붙은 채 베란다 창에 반사된 여자의 실루엣을 보았다. 비에 젖어 가라앉은 머리카락과 번들거리는 검은 정장.


"으허헉"


놀란 그가 주저앉자, 들고 있던 생수가 얼굴에 튀었다.


"와! 굉장히 극적인 반응이네요."


낯설지만 낯익은 어투. 갑작스러운 불빛에 적응하느라 눈을 꿈뻑이며 상대를 바라본다.


"어디 보자. 지금 시각이 9시. 정확했네요. 안녕하세요. 외로움 컨설팅 주식회사의 전담 매니저, 상담 방문 서비스입니다."


눈앞에 나타난 여성을 훑어봤다. 키는 155cm 정도의 아담한 젊은 여성이다. 얇은 눈썹과 작은 코, 작은 입술이 눈에 띄었고 피부는 어두웠다. 머리카락은 어깨보다 살짝 아래까지 길렀는데 비에 젖어 옷에 달라붙어 있다. 송골송골 맺힌 빗물이 동그란 안경에도 몇 방울 떨어져 있었음에도 놀랍도록 까만 눈동자였다. 마치 우주의 신비를 품은 것과 같은 검은색이다.


"지금, 지, 지금, 비밀 번호를 누르고 들어온 거예요?"

"네. 설정상으로만 맞춤형이 아니라니까요. 친한 친구처럼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왔죠. 계약 전이긴 하지만."

"비밀... 번호는 어떻게?"

"저는 전담 매니저로 교육받았다고 했잖아요. 아마 독영씨에 대해서 제가 더 많은 걸 알고 있을 걸요? 출입문 정도야 굳이 장비를 쓸 필요도 없었어요. 고지식한 타입이니까, 도어록 패드에 지문이 묻은 숫자를 선호 조합으로 눌러보면 빙고! 금방 알아내죠."

"방법을 묻는 게 아니라, 불법이잖아요! 그리고 한밤중에 혼자 사는 집에..."

"장담하지만 독영씨는 불법 침입 같은 걸로 신고하진 않을 타입이에요. 변화를 극도로 싫어하거든요."


어느 순간부터 자신과 관련된 정보가 포털 사이트 정문에 게시된 것은 아닐까 싶었다. 후배인 한서도, 초면의 매니저도 모두가 자신 있게 말하고 있다.


"에, 또, 독영씨를 밤에 방문해도 되는 이유는... 아주 무해한 사람이기 때문이죠. 아주요."


갑자기 거실 불이 꺼졌다. 그녀는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왔다. 그를 와락 안는다. 사랑스러운 곰인형을 안듯, 작은 머리로 가슴에 파고들듯이 안긴다. 그는 엉겁결에 만세 자세로 두 손을 들었다. 그 상태로 '어, 어!' 하면서 베란다 창까지 밀렸다. 조금의 공간도 없이 밀착되었다.


이상하다.


요 며칠 느껴지던 소음이 사라졌다. 빗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작지만 부드러운 가슴 사이에서 심장이 두근대는 박동이 규칙적으로 느껴졌다. 흠뻑 젖은 머리에선 고급스러운 샴푸 향이 났다. 푸른 바다를 낀 제도의 야생화 풀이 연상 됐다. 온몸이 젖은 아름다운 존재가 맘대로 문을 따고 들어와 품에 안겨 있다. 알 수 없는 그리움의 감정이 찾아왔다. 한동안 두 팔을 올리고 있던 독영은 비를 맞은 그녀 몸이 차갑게 식어있음을 알아차렸다.


"뭔지 모르겠지만 알았어요. 일단, 젖은 머리라도 닦아요."


그녀는 팔을 풀지 않은 채 그를 올려다보며 싱긋 웃음을 지었다.


"그거 봐요. 내 말이 맞다니까요. 무해한 사람, 정말로."

"무해한 인간이란 없어요. 갑자기 나쁘게 행동할 수 있는 게 사람이죠."

"후훗. 그건 계산 밖의 일이긴 한데요. 만약 그런 행동을 한다면, 창밖에서 상황을 주시하던 특경대 출신 요원들이 들이닥칠 걸요? 로프를 타고 내려와 베란다를 부수고 독영 씨를 화단으로 던져버릴 거예요. 그리고 저는 현관 비밀번호를 바꾸고 사라지는 거죠."


그는 본능적으로 베란다 창 위아래를 살폈다. 그 사이 그녀는 화장실에서 수건을 꺼내와 머리를 아무렇게나 문지르고 있었다.


"스타일러가 있네! 젖은 코트는 스타일러에 넣어도 되나요? 캐시미어여서 건조기에 돌리긴 좀 그래서. 그리고 혹시나 해서 말하는 데 속옷은 멀쩡한데, 블라우스랑 정장 치마가 전부 젖었거든요?"


그는 한숨을 내쉬며 코트를 받아 스타일러에 넣었다. 그리고 이왕 이렇게 된 바에야 싶은 마음으로 건조기 때문에 쪼그라들어 못 입게 된 스웨터와 허리끈이 달린 트레이닝 바지를 건넸다. 그의 자포자기와는 다른 방식으로 그녀 역시 순순히 작은 방으로 건너가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역시 센스 있는 고객이라니까."


헐렁한 스웨터와 세 번 정도 바짓단을 걷어 올린 펑퍼짐한 트레이닝 바지를 입고 그녀는 눈을 찡긋하며 엄지를 날렸다.


"이러다간 한 시간쯤 뒤에는 경호부대인지 뭔지에게도 야식으로 라면을 끓여주고 있겠군요."

"걱정 말아요. 그분들은 투입 전에는 늦은 점심을 먹어요. 게다가 두 명은 라마단 기간이라 금식 중이죠."


독영의 눈이 휘둥그레지자 그녀는 '풋'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정말 이러면 안 되는데 농담이 계속 나오네요. 놀라는 표정이 재미있어요."

"하아."


두 사람은 식탁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노란 LED 등이 켜져 있고, 그녀와 그도 모두 편안한 잠옷 차림이었다. 이 광경을 멀리서 보면 정말로 친한 친구 사이처럼 보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검은색 가죽 토트백에서 비닐 파일에 넣은 서류를 주섬 주섬 꺼내 펼쳐 놓는다.


"이제 강제로 서명을 하게 할 셈인가요? 거부하면 나를 화단에 내던지고 현관 비밀번호를 바꿀 테니까?"

"음. 여기서부턴 심각한 단계예요. 상담이니까요. 진지하게 들어주셨으면 좋겠어요."

"그전에요... 꼭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뭐든지 좋아요."

"아까 낮에 상담을 거부하면 폐기된다고 했잖아요. 그게 무슨 뜻이죠?"


갑자기 그녀 표정이 변했다. 잠깐 동안이지만 곤혹스러운 분위기가 몸을 훑고 가는 게 느껴졌다. 그는 그녀 손에 들려 있던 펜을 잡고 식탁 테이블에 글씨를 적으며 말했다.


"곤란하면 이야기 안 하셔도 돼요."


독영이 테이블에 적은 글은 이런 내용이었다.


<위험에 빠져 있다면 주먹 다음 가위를 내세요.>


그녀는 메시지를 읽은 뒤, 안경을 벗고 그를 바라봤다. 검은 눈동자가 빛났다. 태양계를 둘러싼 오르트 구름을 향해가는 보이저 호에게 비친 우주의 심연처럼 아름다웠다. 그리고 그녀가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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