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초독영씨죠?"
휴대폰 음성은 오랜 연인의 목소리처럼 확신에 차 있다. 독영은 아는 여성들의 얼굴을 떠올린다.
"초동역? 맞죠?"
"네, 접니다."
"저는 LCI에서 맞춤 배정된 매니저, 지나라고 합니다."
"네?"
'LCI?', '맞춤 배정?'
특유의 얼 탄 모습을 알아챈 앞자리 여자 후배가 귀를 기울이는 것이 느껴진다. 여느 때처럼 식은땀이 흐른다.
"저... 뭘 신청한 적이 없는데..."
"LCI는요. 간단히 설명드리자면 외로움 컨설팅 주식회사인데요..."
그때 옆자리 차장이 이죽거리며 책상을 똑똑 두드린다.
"이젠 결정사까지 가입하려는 거야? 어휴 우리 호갱님, 가입상담 마치면 1번 회의실로 오세요~ 하핫"
귀를 기울이던 후배가 일어나 독영을 놀리는 차장을 노골적으로 쏘아봤다. 그러자 '아.. 눼눼.'하며 담배를 피우러 자리를 떴다. 후배는 그의 통화를 배려하듯 아이패드를 들고 회의실로 들어가 버렸다. 그 사이 전화 상대는 녹음된 듯한 멘트를 라이브로 떠드는 중이다.
"당신은 그러니까, 아무튼 뭐랄까, 매력적인 사람입니다. 다만 아직 우리 회사를 만나지 못했을 뿐!"
"아무튼... 매력적?..."
"잠깐, 아, 별로였나요? 오늘을 위해 백번은 더 연습했는데 실패네요. 참! 내 정신 좀 봐. 고객님을 상대할 땐,
'실패'같은 부정적인 단어를 쓰면 안 되는데."
"실패... 요?"
"네. 맨날 차이는 사람한텐 축구공 얘기도 금기어라고 매뉴얼에 있거든요?"
"... 축구공?"
"아. 모르겠다. 어쨌든 제가 맞춤 배정되었어요. 그러니까 오늘부터 담당 매니저가 생긴 거예요. 당신은 충분히 매력적인 사람입니다..."
"죄송한데 이만 끊을게요. 회의가 있어서요."
"... 이상하다?"
"네?"
"독영씨는 원래 스팸 전화도 못 끊는 타입인데? 점심시간 할머니들이 나눠주는 전단지도 모두 받아서 읽어보잖아요."
"그런 것까지 어떻게..."
"지금 매정하게 전화를 끊는단 거잖아요. 아침마다 울면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기고 회사에 출근하는 싱글 맘일지도 모르는데."
"미... 미안해요. 아이가 있으신가요?"
"그럴 리가요. 20대 초반에 아직 미혼이라구욧!"
상대의 대답에 허탈해졌다. 그는 앞 머리를 쓸어 올리며 작게 한숨을 내쉰다. 상대는 계속 떠드는 중이다.
"매력적인 사람이 연애에 지속적으로 실패하는 이유는 간단해요. 주변에 여자 사람이 없기 때문이에요. 저희 회사는 빅데이터와 소셜 플랫폼 분석을 통해 극소수의 분들만 맞춤형으로 이성 매니저를 배정해 연애를 도와주고 있어요. 성공률은 100%입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로또 되신 거나 마찬가지라고요."
"하아. 그러니까 데이팅 플랫폼 어플 같은 건가요? 연애 상대를 소개해주는?"
"얼마 전 경험해 봐서 알 수 있듯이, 그렇게 만난 커플들은 헤어져요. 왜냐하면 관리된 기억이 없기 때문이죠."
"관리된 기억요?"
"네. 저는 고객의 성격, 매력, 습관과 취향은 물론 자라온 환경, 재정 상태까지 모든 걸 알고 있어요. 그에 맞춰 전문적으로 교육됐단 말씀이죠. 따라서 맞춤 코칭이 가능해요. 연애가 관리되는 동안 상대방과 좋은 기억을 쌓게 되죠. 그게 관리된 기억! 헤어질 위기가 닥쳐도 그런 관리된 기억이 있으면 90%, 정확히는 92.7% 정도의 확률로 극복할 수 있어요."
몇 퍼센트 운운하며 그럴듯한 단어만 나열하는 유치한 마케팅이라 생각했다. 정말 전화를 끊어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계약금이 걱정이라면 이번 달 만기가 되는 인터넷뱅크 적금과 퇴사한 후배 권유로 가입해서 30% 손실 보고 있는 변액보험 담보 대출을 이용하시면 될 거예요. 그것도 대행해 드려요."
전화를 끊으려다 멈칫했다. 자신의 금융 정보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본인이 동의하지 않은 금융 정보 조회는 불법입니다. 개인 정보를 어떤 경로로 파악하셨습니까?"
경험상 이렇게 추궁하면 상대는 서둘러 전화를 끊기 마련이다. 하지만 전화에선 여전히 발랄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역시 만나서 말씀드리는 게 낫겠어요. 개인정보 불법 이용 혐의로 경찰을 잠복시켜 놓으셔도 돼요. 오늘은 아파트 필로티 높이의 킬힐을 신고 왔거든요. 독영씨가 극도로 싫어하는. 그러니 도망가려고 해 봤자 2층 높이 킬힐에서 낙상 당해 금방 잡히고 말 거예요."
황당하지만 논리적이다. '아'라는 짧은 감탄을 내뱉을 정도였다. 체포도 불사하겠다는 기세에 이상하게도 마음이 누그러졌다.
"고객이 싫어할 것 같다는 킬힐 따위를 왜 신고 오신 거죠?"
"매니저는 친구일 뿐이니까요. 이성으로 느껴지면 안 되거든요. 제 경우엔 외모나 성격 등 모든 면에서 이상형에 맞지 않아요. 저도 킬힐을 끔찍이 싫어한다는 것만 빼고."
"킬 힐을 싫어한다?"
"사실 과거 회사에서는 아는 여동생이나 아는 누나 서비스도 한 적이 있었거든요? 근데 결과가 엉망이었어요. 고객이 누나에겐 지나치게 의존적이 되고, 여동생의 '오빠' 소리엔 홀린 듯 연애 감정을 품게 돼서 서비스를 포기했죠. 여성과 교류 없는 남자는 그런 게 문제죠."
"그게 문제였군요."
"아! 또 했다. 부정적인 말."
회의실 문이 열리고 후배가 난처하게 웃으며 시계를 가리켰다. 이제는 황당한 대화를 정말 끊어야 할 때였다.
"진짜로 회의시간이에요. 가입할 마음이 없습니다."
"..."
상대는 침울한 침묵에 빠져들고 있음을 상상할 수 있었다. 흐린 런던 하늘을 배경으로 시계탑 빅벤이 범람한 템즈강 물길을 따라가라앉는 듯한 광경이었다. '독영씨 맞춤형'이란 단어가 어두운 물 위에 빙글빙글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빨려 들어간다. 사회 초년생일지도 모를 상대에게 상처 준 건가 싶다
"혹시 가입여부에 따라, 상담자님께 불이익이 있으신가요?"
"그야, 그쪽에게만 맞춰 전문적으로 교육받았으니까..."
독영은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폐기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