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회의 내내 '폐기'란 단어를 떠올리고 있었다.
[폐기 : 못쓰게 된 것을 버림]
'버려지는 것은 무엇일까?'
고객 정보의 폐기라면 다행이다. 담당 직원이 폐기된다면? 이치에 맞지 않는다. 수당 삭감, 인사 평가나 퇴사 권유도 아닌 '맞춤형 매니저'의 폐기까지 생각하는 건 지나친 공상 같았다. 그런데 왜 마음이 불편할까. 후배가 회의실 책상 밑으로 독영을 살짝 건드린다. 고개를 드니 팀원 시선이 모두 자신에게 향해 있다.
"5.7%라고 했죠? 새로 론칭한 퀴즈 프로그램 예상 시청률이요."
후배가 사인을 주고받듯 찡긋하며 확인하듯 묻는다. 몇몇이 실소를 보낸다. 예상 시청률로 또 점심 내기를 하던 모양이다. 팀장이 입꼬리 한쪽이 올라간 채 말했다.
"5%대라니, 동 시간대 드라마도 못하는 시청률인데 너무 후한 거 아냐? 이번에도 밥을 사야겠다면 반대 안 하지. 허허."
옆 자리 차장은 이 틈을 놓치지 않고 팀장 말을 거든다.
"어휴. 소개팅하며 만난 여자들에겐 한우 투뿔 스테이크 척척 사실 텐데 점심 쏘는 거야 뭐 껌 값이죠. 데이팅 어플에 쓴 돈만 해도 어마어마할걸? 조금 더 보태서 아예 결혼 정보업체 창업하는 건 어때? 하하. 나처럼 먹여 살릴 혹이 딸린 것도 아니고 혼자 사니까 남아도는 게 여유지 뭐. 부럽다. 부러워."
매번 통화를 엿듣고 사생활을 떠벌리는 차장이 싫다. 게다가 후배 앞에서 라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받아칠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화를 낼 수 없다는 게 문제다. 감정은 기폭 장치 없는 불발탄처럼 생각되곤 했다. 성격이라기 보단 기능적 문제다. '아홉 살 이후로 계속 먹고 있는 약 때문일까?'를 의심했지만 투약을 중단할 수는 없다. '그러고 보니 내일이 약을 타는 날인데...'
"내가 봤을 땐, 노력이 부족한 거야. 직장 번듯해, 주변 사람들 말처럼 키 큰 '티모시 샬라메'면 뭐 하냐고. 맨날 목 늘어난 티셔츠에 다 떨어진 운동화, 파마머린지 곱슬 머린 지는 빗 질도 안 해서 엉켜있지, 킁킁. 이 향기는 뭐야? 오이 비누? 어휴, 어떤 여자가 오이 냄새나는 남자를 좋아하겠냐. 답답~허다."
차장은 도베르만이 거위 목을 문 듯 좀처럼 놓아주지 않는다. 그때 후배가 입을 열었다.
"독영 선배가 맞을 거예요. 이번에도."
다시 그녀가 그를 구해줄 순간이다.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본다.
"지금까지 선배가 올린 시청률 예상 보고서요. 소수점 둘째 자리까지 넣었는데 근거가 없다면서 팀장님께서 2~3%대, 이런 식으로 고쳤잖아요?"
팀장이 항변하듯 말했다.
"한서 씨, 그 보고서들은 안 맞았잖아. 매번 내기에 져서 점심도 샀고 말이야."
후배인 한서는 지지 않고 대답했다.
"첫방 시청률은요. 그런데 종영 후 평균으로 돌려보셨어요? 소수점 둘째 자리까지 정확히 맞아요. 한 개도 아니고 보고서 모조리요."
독영은 그녀의 옆모습을 보고 있었다. 콧날은 오뚝 하지만 코끝이 동그랗게 굴곡 져 세련되면서도 부드러운 인상을 준다. 말을 하기 전 긴장한 듯 얇고 붉은 입술을 움찔할 때 입가에 생기는 보조개도 귀엽다. 하얗고 매끈한 피부에 웨이브를 넣은 머리카락이 붙어있는 걸 볼 때면 손으로 떼어주고 싶다는 충동이 들 정도다. 화려함과 우아함이 공존하는 미인. 그런 한서가 독영의 편이다.
"아하! 시청률에 운을 모조리 쓴 통에 연애운이 없었구먼. 이제 알겠네. 히히."
동료의 시답잖은 농담을 끝으로 지루한 회의는 마무리되었다. 모두가 자리를 떠난 후, 자료를 정리하던 한서가 말했다.
"신경 쓰지 말아요. 다 질투예요."
"딱히... 뭐... 신경 쓰이진 않아."
"선배는요, 누구처럼 야비하게 상대를 견제하려고 하지도 않고, 묵묵히 일해요. 그런데? 일은 또 잘해."
그녀가 말을 할 때마다 숨결이 느껴진다. 풍선껌을 장미꽃과 함께 씹기라도 하는 것인지 은은하고 달콤하다.
"계속 도전해 보세요."
"뭘?"
"연애요. 지난주 반차 내고 소개팅 하셨죠? 우연히 강남역 지나다 봤어요. 그런데 연락 없어요?"
"아... 응."
지난 주말, 독영 역시 그녀가 유명 피아니스트와 흰색 스포츠카를 타고 스쳐 지나간 것을 보았다. 공작새처럼 모든 깃을 활짝 펼친 듯한 모습은 낯설었다. 멀리서 보아도 무의식 중에 눈을 피할 정도의 압도적인 아우라였다. 귀족 풍모를 풍기는 잘생긴 남자 친구에, 거대한 의약회사 중역인 아버지가 있다. 그러니 사무실이란 공간을 공유한다는 공통점만 있을 뿐이었다.
"참, 그런데 16시 뉴스요..."
갑작스러운 일 이야기에 잠에서 깨듯 '어?'하고 독영은 놀란다.
"주조정실에서 운행표가 타이트하다고 느끼나 봐요. 16시 이후로 약간 밀려 들어가는 건 괜찮은 데, 시간이 당겨져서 15시 58분 이렇게 들어가는 건 곤란하다고요. 아무래도 이름부터 16시 뉴스니까요."
열차 시간표와 마찬가지로 방송은 그날의 편성 운행표에 맞춰 돌아간다. 운행표를 짜려면 프로그램의 전후 광고를 제외한 '알맹이' 시간을 알아야 한다. 문제는 16시 뉴스 바로 앞에 편성된 외주 프로그램 시간이 들쭉날쭉하다는 것. 예전 담당자들은 시청률이 낮은 시간대이므로 'SB(스테이션 브레이크 : 자사 홍보 광고)' 등 범퍼를 넉넉히 넣어 운행해 왔다. 하지만 독영만큼은 열차와 마찬가지로 정시 운행에 신경을 썼다. 앞 프로그램의 평균 '알맹이' 시간과 오차를 계산하여 정확히 16시에 시작할 수 있도록 운행했다. 주조정실 근무자 입장에서는 자율성이 줄어드니 불만이 나올만했다.
"앞 프로그램이 또 약속보다 짧게 들어왔나 보네. 확인해 볼게."
"아무도 안 보는 시간인데 여유를 가지세요. 범퍼도 잔뜩 넣어서 주조정실도 숨통 트이게요. 가끔 운행표를 보면 선배님이 겹쳐 보인다니까요."
"내 모습?"
"뭐랄까... 티모시 샬라메가 긴장한 모습? 하하."
자신이 긴장한 듯 보인다는 말에 속내를 들킨 듯 부끄러웠다. 늘 헐렁한 입성에, 편의점에 야식을 사러 나온 듯 슬리퍼를 끄는 소리, 모진 말을 못 하는 우유부단함 때문에 태평한 사람이라고 보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다.
"선배님, 16시 뉴스도 여유 있게, 연애도 여유롭게! 변화를 줘보세요. 파이팅!"
앨리스의 고양이 같은 긴 미소를 남기고 사라진다. 동시에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톡이 와 있다.
외로움컨설팅주식회사 : 방문 상담을 원하시면 [확인], 폐기를 원하시면 [거부]를 눌러주세요.
정말로 '폐기'란 단어를 쓰고 있다. 거슬린다. 이것이 정확히 무얼 의미하는지 알게 된다면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질 법도 했다. 한서 역시 변화를 주며 여유 있게 살아보라고 하지 않았나. 마케팅팀 사회초년생을 위해 그 정도야 해줄 수는 있겠지 싶은 쪽으로 마음이 기운다.
그는 [확인] 버튼을 눌렀다. 이내 답장이 올라온다.
[오늘 밤 9시, 고객님 집으로 전담 매니저가 방문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