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폐기라는 건 말 그대로 쓸모가 없어져 버려지는 거죠."
그녀는 독영이 테이블에 쓴 글자를 마치 점자를 읽듯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말을 이었다.
"버려진다는 건 여러 의미가 있어요. 누가 버리는가, 어디에 버리는가, 그 이유는 용도에 못 미치기 때문인가, 그리고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버려지나 등등."
"어쩐지 대답하기 곤란하단 말처럼 느껴지네요."
그녀는 집에 들어온 뒤 줄곧 말을 할 때마다 귀 밑머리를 만지작 거렸다. 그때마다 작은 금색 별 모양의 귀고리가 흔들렸다. '아마도 버릇인 걸까?'하고 그는 생각했다.
"안심이 되는 말을 하자면, 폐기된다고 해도 물리적이나 현상적으론 아무것도 변하지 않아요. 그러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되는데... 여전히 걱정되는군요."
"예를 들자면 저에게 폐기란... 생일 파티에 있던 초콜릿 무스 케이크가 당뇨 환자 클리닉 정기 모임으로 옮겨지는 거 같은 거예요. 케이크를 뭉개 트리지도, 누군가 침을 뱉지도 않았어요. 물리적으로 변한 건 없어요. 그러니 현상적으론 아무 일도 없는 거죠."
당뇨 환자 클리닉 모임 한가운데 놓인 초콜릿 무스 케이크를 떠올렸다. 어쩐지 환자들의 시선이 집중된 케이크에 감정이입이 되는 듯했다. 그녀 말대로 바뀐 것은 없다. 물리적으로 손상된 것도 없다. 하지만 표현하기 어려운 처연함이 느껴진다.
"좋아요. 일단 상담을 하겠다고 한 건 저니까 시작해 보세요. 듣다 보면 판단이 되겠죠."
그녀는 한 번 싱긋 웃더니 활달한 모습을 되찾았다. 그리고 논리 정연하게 설명을 시작했다. 외로움 컨설팅 주식회사 Lonliness Consulting Inc. 는 어설픈 다단계나 사기꾼 조직은 아닌 듯했다. 인구 감소를 걱정하던 정부에선 국책 연구 기관에 출산율 증대 방안 발주를 낸 적이 있다. 해당 기관은 유효한 실행 안을 도출을 내야 했다. 고민 끝에 빅 데이터 플랫폼 회사에 커플 매칭이 높은 확률로 일어날 수 있는 어플 제작을 의뢰한다. 매칭률을 높이기 위해선 온라인에 노출된 개인 정보는 물론 방대한 부가 정보를 활용해야 했다. 결국 불법성이 문제가 됐다. 이를 알게 된 정부와 국책 연구 기관은 뒤로 빠지는 모양새를 취한다. 원래는 하청이 끝났으면 프로젝트를 멈춰야 했지만, 계약이 취소된 플랫폼 회사는 시장성을 발견한다. 그리고 지금에 이르렀다고 설명했다.
"그러니까 폐기란 불법성을 감추기 위해 지금까지 수집한 데이터를 없애고, 그쪽 같은 담당 매니저의 퇴사 같은 걸 의미하는 거군요."
"그렇게 생각하는 게 마음이 편하다면... 아닐 수도 있고."
"정부에서 내 연애사에 세심한 관심을 갖고 있는지 몰랐는데요?"
"훗, 아까도 말했지만 정부는 빠졌어요. 정부는 거대한 조직처럼 보이지만 한 명씩 따로 만나보면 겁쟁이들이거든요. 대신 우리 같은 민간 회사들은 용감하죠. 수익이 되는 건 뭐든 하니까요."
"돈이 된다라... 계약금이 얼마죠?"
"두 가지 옵션이 있어요. 지정 연애는 5천만 원. 지정 연애는 말 그대로 이어지길 원하는 상대를 말하면, 그녀와 사랑이 이뤄지게 해 주기 때문에 비싸요. 비지정 연애는 매칭당 1천만 원."
"불법을 감수할 정도의 사업이군요. 그런데 성공 기준이 뭐죠? 두 사람이 결혼하면 계약 완수인가요?"
"아니오. 자정부터 아침까지 밤을 보내는 거요."
"응? 밤을 보낸다는 게... 혹시?"
"이상한 생각 말고요, 말 그대로예요. 그 시간 동안 뭘 하든 두 사람이 함께 있는 게 기준이에요. 결혼은 변수가 많은 데다 외로움 때문에 만남을 갖고 싶은 사람도 있는 법이니까요. 게다가 이건 정부 프로젝트로 시작됐을 뿐 지금은 비즈니스니까 결혼 여부는 계약 달성 조건으론 과하죠. 다만..."
그녀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저희 고객들의 연애는, 고객 자신이 변심하지 않는 한 상대의 변심으로 떠난 경우는 없어요. 오히려 상대가 매달리죠"
"와우! 한 번도 실패가 없다고요?"
"한 번도!"
그녀에 대한 신뢰감과 별개로 믿기지 않는 이야기가 분명했다. 대출까지 하면서 수상한 비즈니스 모델에 돈을 쓸 만큼 그는 어리석지 않았다. 그의 태도를 매니저는 금세 눈치챘다.
"믿지 못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게다가 십만 원도 고민되는 데 수 천만 원? 그래서 계약 전 신뢰 강화 프로그램을 두고 있지요."
"범죄자와 수사관 사이에 신뢰 관계를 만드는 라포(rapport) 같은 기술을 말하는 거라면 충분해요. 그쪽은 어떤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믿을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뭔가를 속이고 있다 하더라도 회사가 속인 거지, 거짓말을 한 다곤 생각하지 않으니까요."
그녀는 반가운지 살짝 웃었다.
"고마워요. 하지만 기술적으로 사용하는 라포는 친한 척 하기일 뿐 엉터리예요. 지금 대화도 그것과는 무관하고요."
귀 밑머리를 손가락으로 꼬면서 말을 했다. 다시 별 모양의 금색 귀고리가 흔들렸다.
"라포 형성과 관련한 최근의 연구들은 경청, 개인적인 이야기를 공유하거나, 적절한 반응 등을 기법으로 제시하지만 제일 중요한 걸 놓치고 있어요. 그건 심리 유형에 따른 접근이에요. 비합리적 성격 유형과 합리적 성격에서의 라포는 전혀 다른 차원의 접근이 필요해요. 예를 들어 독영씨 같은 합리적 유형은 어떤 특정 환경, 예를 들어 이런 비즈니스로만 저와의 관계가 지속된다는 걸 이미 알고 있죠. 그런 타입은 인간관계를 즐기기보단 고통이라고 받아들여요."
"MBTI 타입별 맞춤형 코칭인가요?"
"비슷해요. 칼 구스타프 융은 라포가 성격 유형별로 차이가 난다는 논문을 이미 백 년 전에 발표했죠. MBTI의 원전이 된, 성격 유형이란 논문이었어요. 그런데 학자들은 그런 내용이 있는지 조차 모르거나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못했어요. 덕분에 현재의 어설픈 '친한 척 하기' 기법이 횡행하고 있죠. 취조실과 비즈니스 상담실에서요."
"취조실과 비즈니스 상담실에서..."
그녀 말을 따라 해 본다.
"저희 회사는 모든 정보를 활용해요. 빅데이터와 AI, 실험적인 양자 컴퓨팅은 오히려 사소한 부분이죠. 대개는 심리학, 철학, 미학 같은 광범위한 학문적 방법론을 융합해서 사용하죠. 최면술이나 수비학 같은 유사 과학도 가리지 않아요."
'최면술?' 독영은 별 모양의 흔들리는 귀고리에 어느샌가 집중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어쩌면 그녀가 귀 밑머리를 만져 시선을, 흔들리는 귀고리로 유도한 것도 최면술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관 비밀번호를 맘대로 따고 들어온 수상한 여자. 그녀가 안겨오는 걸 방치하고, 옷을 말려주고 새 옷을 내주고, 상담 비슷한 단계까지 이르게 된 것도 모두 철저하게 계산된 최면술에 무의식적으로 끌려 온 게 아닐까 의심이 들었다.
"훗. 그 의심하는 눈빛이 매력적이에요. 하여간 투명하다니까."
"신뢰 강화 프로그램이 뭔지 얘기 안 했어요."
"지난주에 은행 직원과 소개팅했는데 애프터가 없죠?
"그건? 또..."
"그리고 이번 주에는 플랜트 설계사와 새로운 소개팅이 잡혀 있고요."
어떤 방식으로 자신의 사생활을 알게 됐는지 묻는 것에 지쳐버린 듯 잠자코 있었다.
"지난주 연락이 없던 상대와 이어주고, 이번 주 잡힌 소개팅 상대에게 애프터를 받도록 코칭해 드릴게요.
어차피 이런 소개팅은 맞춤형 코칭을 할 필요 없이 가이드만으로도 충분하니까. 일종의 맛보기 무료 서비스죠. 성공하면 제 능력에 신뢰가 생기겠죠? 계약은 그 뒤에 고려해도 돼요."
독영은 이른바 '픽업 아티스트' 수준의 유치한 가이드가 떠올랐다. '요리 잘하세요?'라고 묻고 '김치찌개를 잘해 먹는다'라고 하면 '김치찌개 잘하는 사람이 마음씨가 푸근하다'는 등 사소한 칭찬하기 따위의 코칭. 그러나 의심과 관계없이 그녀는 읽어보라며 계약서를 놓고 아직은 덜 마른 옷을 스타일러스에서 꺼내 갈아입고 돌아갔다. 급작스럽게 시작된 대화처럼 순식간에 끝나버린 상담이었다. 다시 빗소리와 정적이 깔린 방으로 돌아오자 방금 있었던 일들이 꿈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그녀가 남기고 간 야생화의 은은한 풀 향기를 느끼며 테이블을 바라봤다. 그가 써 놓은 글 밑에 그녀의 이름과 함께 뭔가가 적혀 있었다.
위험에 빠져 있다면 주먹 다음 가위를 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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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알 수 없는 숫자 암호를 남겼다. 위험에 빠져 있다는 뜻인지, 아니면 그가 뭔가를 알아차리길 바라는 것인지 모호했다. 창가에 서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빗물의 패턴이 기묘하게 규칙적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빗방울을 이으면 거대한 별 모양의 패턴이 완성된다. 매니저 지나의 별 모양 귀고리가 떠올랐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서랍을 열고 마지막 남은 약을 찾아 삼켰다. '아무래도 약을 바꿔야 할까?' 그는 병원 예약이 가까웠음을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