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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하지만 이상한 사건

7화

by 뮤즈노트

사무실로 돌아왔을 때는 퇴근 무렵이었다. 부장과 후배인 한서는 회의실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독영을 보자 부장이 하소연하듯 빠르게 입을 열었다.


"쉬는데 미안해. 16시 뉴스가 5분이나 뒤로 밀려버렸어. 그 자체로는 별 일 아닐 수도 있는 데, 보도국 담당 에디터가 방방 뛰면서 화를 내더라고. 뉴스 아이템이 잘렸다고, 정시 운행이 안 되는 고질적인 문제를 바로잡지 않으면 가만있지 않겠다고 말이야."


운행표를 짜던 독영은 16시 뉴스에 여유가 필요하다는 후배 한서의 말을 떠올렸다. 주조정실에서 탄력적으로 운영할 수 있도록 범퍼를 넣어 여유 있게 짜놓았다. 심지어 주조정실 근무자에게 시간에 맞춰 SB광고는 잘라내도 된다고 전화까지 했던 터였다. 일 처리 자체에는 문제가 없었다. 한서가 말했다.


"통화해 보니까 앞 시간대 프로그램이 표준제작시간을 초과해서 길게 들어왔어요. 담당은 아시다시피 퇴직 앞둔 문제의 프로듀서고요. 아무도 안 보는 시간대인데 무슨 상관이냐, SB 조정해서 들어가면 되냐는 태도였고요. 주조정실에선 선배님 얘기를 전해 듣긴 했지만, 운행표대로 운행한 게 무슨 잘못이냐는 식이고..."


부장은 모두가 발뺌을 하는 상황에 공허한 목소리로 화를 냈다. 하지만 퇴직을 앞둔 선배 프로듀서에게 싫은 소리를 할 마음은 없어 보였다. 마찬가지로 주조정실을 담당하는 기술 쪽과 맞서는 것도 부담스러워했다. 독영은 낮은 한숨이 나왔다. 작은 변화만으로도 평온했던 세계가 조금씩 균열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한서는 자신이 했던 충고 때문이라 생각했는지 미안한 표정으로 바라보고만 있었다. 순간, 아득한 평원으로 정신이 옮겨가는 느낌이 들었다. 약효가 떨어진 탓이라 느꼈다. 몇 가지 단어가 머리를 떠다니다가 물이 얼음이 되듯 단단한 문장으로 응결됐다. 순식간에 댐이 허물어지듯 말이 튀어나왔다.


"보도국 에디터와 담당 기자에겐 제가 사과하겠습니다. 외주 건은 원칙적으로는 본사 프로듀서 책임이지만, 외주 PD에게 전화해서 프로그램 시간을 체크하는 걸로 프로세스를 바꾸겠습니다. 주조정실 근무자는 사고보고서 쓰게 될까 봐 제 메시지를 전해 들었다고 우겼을 거예요. 실제로는 인수인계를 깜빡한 것일 테니 내심 불안해하고 있을 겁니다. 그쪽 부장과 점심하시면서 이번에는 그냥 넘어가겠다고 말씀해 주세요. 좋아할 겁니다."


부장은 자신에게 맡겨진 일이라곤 밥 먹으면서 생색내는 것뿐이란 사실이 마음에 들었다.


"이야~ 아주 깔끔하구먼. 말 수가 없어서 깜빡깜빡하는데, 독영씨는 정말 인재라니까."


한서가 미안한 표정으로 덧붙였다.


"선배님, 운행 말고 다른 일도 많으시니까... 외주 PD와 통화해서 시간 체크하는 건 제가 할게요."


부장이 즐거운 발걸음으로 콧노래를 부르며 회의실을 나간다. 한서가 곁으로 다가와 테이블에 걸터앉았다. 이상하게도 갓 샤워를 마친듯한 은은한 샤워코롱 향이 그녀의 몸에서 풍겨왔다. 그는 긴장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어젯밤 지나가 자신을 안았을 때 느꼈던 평온함과는 정반대의 팽팽한 긴장감이었다.


"죄송해요. 선배님. 부장님께 제 탓이라고 말했어야 하는데... 어제 괜히 16시 뉴스 이야기를 해서..."


샤워코롱 향을 몸에 두른 한사의 입술과 큰 눈을 마주하자, 독영은 의자에서 부자연스럽게 일어나며 말했다.


"아냐. 이참에 정리를 해놓는 게 편해. 변화를 줄 때 조금씩 삐걱 거리는 건 당연하고 말이야. 걱정하지 마."


한서의 얼굴은 밝아졌다. 그에게 보상이라도 주듯 멋진 미소를 보이며 그의 소매를 살짝 잡았다 놓았다. 그는 얼굴이 빨개져 회의실을 나오자마자 보도국 에디터에게 전화를 했다. 에디터는 자신의 말 한마디에 프로세스가 바뀐 것이 흡족한 듯했다. 기사가 잘린 기자에게도 사과한다고 하자 너그러워진 에디터가 말했다.


"뭐 꼭 그럴 필요는 없지만, 그래주면 나야 좋지. 기사는 2개가 잘렸어. 하나는 주식시장 관련 스트레이트 기사라 넘어가도 되고, 하나는 경력 신입기자 첫 리포트라 좀 그랬거든..."


에디터는 경력 신입 기자의 이름을 알려주었다. 기자에게 전화를 했지만 통화가 되지 않았다. 내일 잠깐 커피라도 마시자고 사내 메신저로 문자를 남겨놓았다. 최종적으로 외주 PD와 통화까지 끝마치자 허기가 몰려왔다. 시계를 보았을 때는 이미 퇴근 시간이 지난 뒤였다. 부장과 한서가 다가와 늦은 저녁이나 같이 먹자고 말했다. 그제야 매니저와의 저녁 약속이 떠올랐다.


"미안해요. 저녁 약속이 있어요."

"어머, 누구랑요?"


한서의 되물음에 독영은 무의식적으로 대답해 버렸다.


"아... 그게... 외로움 컨설팅."


부장이 의외라는 표정으로 사람 좋은 너털웃음을 지었다.


"허허허. 외로움은 극복하는 거지. 조오치. 암튼 좋은 시간 보내고 오늘 저녁은 법인카드로 결제하고 나한테 올려! 휴가 때 나와서 일을 했는 데 그 정도는 해줘야지."


회사를 걸어 나오며 하늘을 본다. 조금 전 회의실에서의 아득한 느낌을 떠올렸다. 많은 말을 쏟아내며 순간적으로 완벽한 해결책을 제시했다. 그는 전혀 기존의 자신답지 않았다는 게 마음에 걸린다. 하늘빛이 석양의 붉은빛에서 밤의 경계로 넘어가는 푸른색으로 바뀌어간다. 프랑스 사람들은 이때를 가리켜 개와 늑대의 시간이라고 했다. 개인지 늑대인지 분간되지 않는 변화. 미묘한 어둠으로 전환이 시작되고 있는 것일지 모른다.


부모님의 갑작스러운 사고와 증상의 발현은 양에서 음으로의 변화였다. '계속 도망치기만 하는 것이 옳은 일일까? 잃은 것들 중 다시 찾아와야 하는 것은 없을까?' 레스토랑에 들어가기 전 복용할 약을 주머니에서 만지작 거렸다. 그때 누군가 그의 허리를 끌어안는 통에 바닥에 약을 떨궜다. 갑작스러운 힘에 밀려 주춤거리다 봉투를 밟는 통에 약은 찌그러져버렸다.


"안녕~ 늦은 줄 알고 뛰었는데... 다행히 같이 늦었네요. 일이 바빴나 보죠?"


그의 허리에 손을 감은 채 환한 미소를 띤 지나가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상한 하루를 보상해 주듯 안심이 된다. 허리에 감은 손을 풀며 바닥에 떨군 약봉투를 주으려는 데 이번엔 경적 소리가 울렸다. 흰색 BMW X시리즈의 짙게 선팅 된 창문이 내려오더니 한서가 외쳤다.


"선배님, 오늘 정말 고마웠어요. 친구분과 좋은 저녁 시간 되세요. 안녕~"


동시에 두 명의 여자에게 인사를 받은 셈이다. 낯선 느낌에 머뭇거리는 유진을 뒤로하고 후배 한서는 창을 올리곤 속도를 높여 사라졌다. 문득 조용해진 지나를 내려다본다. 그녀는 실눈을 뜨고 멀어져 가는 BMW를 바라보다가 알쏭달쏭한 혼잣말을 했다.


"엄청 예쁘네. 강적이고... 일이 늘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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