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레스토랑은 캐주얼한 수제 햄버거 집이다. 회사 식당에서 점심과 저녁을 해결했기에 근처에 이런 가게가 있는 줄도 몰랐다. 그런데 번쩍거리는 인테리어와 달리 하나씩 뜯어보면 세밀함이 부족했다. 값비싼 통유리에는 영어문구를 필름으로 붙여놨지만 문법이 엉망이었다. 웨이터 역시 청회색 정장에 스트라이프 문양의 나비넥타이를 매고 있었지만 대개는 옷이 크거나 작아 보였다. 사이즈에 맞도록 바꿔 입으면 될 텐데 이해가 가지 않았다.
"질서와 무질서가 섞여있는 햄버거 가게네요."
그의 말에 지나가 대답했다.
"카오스와 프랙탈."
"...?"
그녀는 일회용 물수건으로 손가락 하나하나를 정성껏 닦으며 말을 이었다.
"질서에서 무질서로 가는 세계의 변화양상을 엔트로피라고 해요. 그런 양상을 해석하려는 이론이 카오스와 프랙탈이죠. 카오스는 혼돈과 무질서를 의미하지만, 그 무질서는 자기 닮은 꼴의 기반을 품고 있어요."
"무질서의 기반은 사실 질서라는 건가요?"
"무질서를 닮은 우연한 만남도 체계적인 패턴이 기반인 건 마찬가지!"
"지나 씨는 감탄하게 하는 면이 있네요."
그녀는 어깨를 으쓱하며 양손을 펼쳐 보였다. 그리고 웨이터를 불러 능숙한 솜씨로 주문을 했다. 셰프 특제 한우 소고기 버거, 아일랜드 드레싱을 얹은 케이준 샐러드, 웨지 프라이, 마늘 빵을 추가한 토마토소스 홍합찜과 하몽과 루꼴라 피자, 생맥주 두 잔. 웨이터는 주방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와서 재차 주문을 확인했다. 그는 카오스와 프랙탈의 햄버거 가게다운 일처리라고 생각했다.
"좀 그런가?"
지나의 말에 그가 답했다.
"마음껏 드세요. 어차피 오늘 저녁은 회사가 내는 거예요. 법인카드로 처리할 거니까."
"아뇨, 함께 먹는 데 시킨 게 적은가해서... 요즘 옆구리 살이 자꾸 붙는 것 같아서 운동량을 늘리고 있어요."
"아... 그런 뜻이었군요."
보이지도 않는 옆구리살을 만지작거리는 동안 그는 주문표를 보며 감탄하고 있었다.
"지나 씨는 전문적 지식이 있어 보이는 데 뭘 전공했나요?"
"삐이익!"
그녀가 고개와 함께 검지 손가락을 좌우로 흔들며 말했다.
"피해야 할 질문이에요. 특히 내일 소개팅에서요."
"아..."
"첫 만남에 호구조사는 뻔해요. 상대에게는 별 볼일 없던 남자들의 기억을 불러일으키죠. 또 다른 재미없는 소개팅 게임이 시작되는구나~라는 호루라기 소리 같은 거예요. 하지만... 뭐... 오늘은 친목의 목적도 있으니, 담당 매니저에 대해서도 알 필요가 있겠죠? 한번 맞춰 보세요."
역시 엉뚱한 듯 보이지만 자신감이 넘치고 논리 정연하다. 그녀가 사용하는 어휘들을 보면 인문학과 과학의 경계를 넘나 든다. 그는 '포기'라고 짧게 대답했다. 그때 웨지 프라이가 나왔다. 그녀는 뜨거운 감자를 손으로 집어먹기 시작했다. 배가 고팠던지 입이 번들번들해지도록 먹고 난 뒤에야 입을 열었다.
"굳이 전공을 따지자면 수학에 가깝달까... 카오스 현상에서 보이는 파이겐바움의 보편상수 델타값은 4.6692016..."
"대단하군요. 그런 상수 값을 전부 외우고 있는 건가요?"
"흠. 모든 상수를 외우고 있진 않아요. 재능이 있지만 압도적 천재는 아니었어요. 고등학생 때 수학 국가 대표 비슷한 걸로 세계대회에 참가하긴 했지만요. 그 얼토당토않은 대회를 치르러 독일까지 갔죠. 열몇 시간 혼자서 저가 경유 비행기를 타고 무려 독일까지요. 구대륙에 수학문제 따위를 풀기 위해 갔다는 게 정말 황당하지 않아요? 아무튼 거기엔 천재란 단어가 아니면 외계인으로 분류할만한 애들이 바글바글 했죠."
"사람들이 그렇게 똑똑했나요?"
지나는 '하하' 호탕하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능이 아니라 외모요. 외모가 다들... 무슨 스타워즈에서 스카이워커와 한솔로가 처음 만난 선술집 있잖아요. 기괴한 외계인들이 가득한 곳 말이에요. 그 술집 한가운데 있는 느낌이었다고요."
그녀는 한솔로 총을 맞는 외계인과 닮은 프랑스 남학생 이야기를 한참 동안 이야기했다. 잘난 척하는 학생이 못마땅했던 그녀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네 생각의 오류를 간단히 설명해 주겠다' 그리곤 그의 몫으로 주최 측에서 제공한 도넛을 모조리 꿀꺽 삼켜버렸다고 한다. 프랑스 학생은 분을 못 이겨 결국 눈물을 터트렸다. 물러서지 않고 그녀는 '계속 징징대면 구멍 한 개짜리 도넛과 같은 위상구조로 만들어 버리겠다'라고 말해 진정시켰다고 했다. '그건 협박 아닌가?'싶었지만 그는 입을 다물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가진 않았어요. 교육의 밀도와 방향이 마음에 안 들었거든요."
"하지만 대학이 꼭 공부 때문에 가는 건 아니잖아요. 취업할 때 간판이 되어주기도 하고 교풍이란 게 싫든 좋든 몸에 배기도 하니까..."
"그렇죠. 대학교는 사회적 향기, 그러니까 소시지에 숯불 향을 입히는 훈연 과정이기도 하죠. 그런 것에 젖게 되면 독특함이 사라져요. 그냥 먹음직한 소시지가 돼버리죠. 저는 훌륭한 스승님 도움과 독학으로 지식을 습득하며 나란 개체가 갖는 독특함을 살리려 노력해 왔어요."
그녀의 말을 곱씹고 있을 때 음식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홍합과 버거, 피자와 샐러드까지. 하지만 제일 서빙이 쉬울 듯한 맥주는 여전히 나오지 않았다. 웨이터는 잠시만 기다리라는 말만 반복했다. 그녀는 맥주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고 다시 음식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포크나 젓가락이 아닌 수저를 짧게 잡고 홍합을 벗겨내 먹으면서, 샐러드를 한입 가득 넣었다가는 버거와 피자를 조각내서 단숨에 삼켰다. 한동안 폭풍 같은 식사를 바라봤다. 포크와 나이프, 수저의 움직임은 무질서해 보였지만, 한편으로는 중세 기사의 검처럼 절도 있고 유려했다. 병기가 번쩍이는 전쟁터, 경이적인 솜씨의 식사였다. 입을 벌린 채 감탄하는 것을 흘끗 본 그녀가 깜빡 잊은 듯한 목소리로 서류파일에서 종이를 꺼내며 말했다.
"내일 시나리오예요. 무난하게, 두 번째 만남에 키스정도까지 가능하게 뽑아본 거예요.
식사하면서 읽어보세요."
그는 아직 사용하지 않은 포크를 내려놓고 종이를 받아 읽어보았다. 거기엔 몇 가지 행동지침이 적혀 있었다.
1. 첫인상 : 통화, 인사, 장소 정하기 (톡이나 문자 금지) - 예의
2. 장소 : 지금 식사하고 있는 레스토랑 - 대화 소재
3. 단점 : 혀에 구내염 패치 부착 - 단점 감추기
4. 불운과 희생 : 비 오는 날씨와 우산 - 주차장 달리기
5. 경계선 : 지하철역 - 신사다움
"이게 대체 무슨 소린지..."
"이제야 든든하네. 자, 이제 하나씩 설명해 줄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