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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다움에 관하여

9화

by 뮤즈노트

그녀는 홍합찜의 토마토소스를 마늘빵으로 깨끗이 긁어 작은 입에 쏙 넣었다. 그리고 우아한 손동작으로 손수건을 꺼내 입가를 닦고는 잘 먹었다는 듯 만족한 숨을 내뱉었다.


"상대에겐 오늘 집에 가서 전화로 연락을 하세요. 독영씨는 말이 별로 없지만, 목소리가 근사해요. 소리에 민감한 여성들에게 어필할 수도 있고, 장소 지정할 때 오해가 없도록 하기 위해서예요. 왜냐하면 만나는 장소를 독영씨 회사 주변의 이 레스토랑으로 해야 하거든요."

"상대도 일을 끝내고 여기까지 오려면 힘들 텐데... 배려를 하려면 제가 가는 편이 낫지 않을까요?"

"보통은 그렇게 생각하기 쉽죠. 그런데 사람은 경제학적으로 투입된 자원과 수고로움을 고려해요. 비싼 수업료를 낸 청중의 집중력이 월등히 올라가는 것과 같은 이치죠. 상대가 힘들게 이곳까지 왔다면 최대한 오늘 만남이 유의미했으면 좋겠단 태도를 갖게 돼요. 심리학의 기초 원리죠."

"상대가 오기 어렵다고 하거나 곤란하다고 하면..."

"정중한 게 중요해요. 톡 따위로 잡지 않고 예의 바르게 전화로 약속을 잡는 사람이라면 일단 들어보자는 생각이 들죠. 그럴 때, 잘 아는 멋진 맛집이 인근에 있어서 그렇다. 초대하고 싶다. 다음에 만날 땐 남극 세종기지에서 만나자 해도 그쪽으로 가겠다고요. 이렇게 하면 상대는 응할 거예요."

"그런데 이 레스토랑이 그렇게 맛집인가요? 전 미식가가 아니라서요."

"일단 첫 만남 분위기로는 나쁘지 않고, 음식도 서비스에 비해선 제법이에요. 무엇보다 무질서와 질서가 뒤엉켜 있어서 이야깃거리가 돼요. 함께 가볍게 웨이터 흉을 볼 수 있고요. 이런 특이한 공간에서의 대화는 상대와 자연스럽게 동조하며 같은 편이 되게 만들죠. 동질감을 줘요."

"일부러 이 식당을 골라서 메뉴를 골고루 시킨 이유가 있었군요."

"무질서는 질서에 기반하는 법이니까."

"그런데 구내염 패치와 주차장 항목은 뭔가요?"


독영이 물었다.


"내일 입안에 패치를 붙여드릴 거예요. 상대방에게 구내염이 있어 패치를 붙였다고 하면, 말 수가 적거나 어눌해도 그러려니 이해해요. 다시 말해 여러 단점에 대한 주의력을 분산시키고, 부정적인 인식은 불편한 혓바늘로 모으는 거죠. 어차피 혓바늘은 나을 테니까 상대 입장에서도 큰 문제는 아니라 생각할 테고요. 실수가 있어도 상대가 이해할 여지를 주죠."


고개를 끄덕이며 지나의 다음 설명을 기다렸다.


"예보에 따르면 내일 오전부터 비가 올 거예요. 상대는 우산을 가져오겠죠. 그런데 이런! 우산이 없어져 버려요. 그래서 빌딩 상가의 편의점을 갔는데 그곳도 우산이 다 팔리고 없죠. 게다가 하필이면 독영씨는 이 건물 주차장이 꽉 차서 100m 거리의 공영주차장에 주차를 했네? 결국 여성분에게 입구에서 잠깐 기다리라고 하고, 비를 맞으며 차까지 뛰어가서 차를 가져와요. 그리고 그 분과 드라이브를 하는 거죠."

"아... 음... 물어볼 게 한두 가지가 아닌데..."

"이 일대 우산이 증발하는 건 제가 조치해 놓을 거예요. 차만 공영주차장에 주차하시면 돼요. 낯선 곳에서 우산을 잃어버리는 상황은 당황스럽죠. 그런데 믿음직하게 자신을 위해 비를 쫄딱 맞는 수고를 하는 뒷모습에 호감을 갖게 돼요. 반대로 독영씨는 이 장소와 공간이 익숙하고 무슨 일이 일어날지 시나리오를 숙지하고 있죠. 그러니 어색한 연기를 하지 않아도 자신감이 드러나게 되어 있어요. 상대는 은연중에 그걸 또 감지하고요."


잘 짜인 영화 같은 스토리라고 생각했지만 실제로 가능할지는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녀가 말했다.


"근데 상대분 집까지 데려다 주진 마세요. 환승이 필요 없는 지하철 역에서 내려주시고 차에 있는 우산을 빌려주세요."

"그건 또 왜죠? 비도 많이 올 텐데 집까지 데려다주는 게?"

"첫 만남에서 확신을 줄 필요는 없어요. 이 사람은 나에게 반했다... 같은 확신이요. 그러면 독영씨에 대해 궁금해하고 공상하는 즐거움이 줄어들어 버려요. 이 사람이 원래 매너가 좋아 잘 대해 준 것인가, 나에게 호감이 있는 것인가 헷갈려야 해요. 그래서 경계선을 지하철역에서 그어놓는 거죠. 집에 들어간 뒤에도 우산이란 오브제를 볼 때면 첫 만남의 광경이 떠오르죠. 자연스럽게 감정의 싹이 틔도록 해야 해요. 여자 쪽에서 나중에 우산을 돌려준다는 핑계로 연락하기도 좋고요. 우산은 비 오는 날의 사건이고, 두 사람만 공유하는 기억이죠."

"괸리된 기억!"

"빙고!"


독영은 시나리오화 한 일목요연한 설명을 들으며 거부감이 느껴질 듯도 했지만 그런 마음이 들지는 않았다. 아마도 지나라는 사람이 태생적으로 갖춘 친근함 때문이라 생각했다. 그녀의 말을 듣고 있으면 스위스 초원을 거니는 양 떼를 만지듯, 자연스레 수긍하게 되는 힘이 있었다. 독영은 휴대폰을 꺼내 문자창에 글씨를 입력하며 물었다.


"언제나 이런 공식이 통하나요?"


지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모든 이야기엔 형식이 있어요. 아마추어는 형식에 얽매이지만, 뛰어난 작가는 형식 위에서 춤을 추죠. 독영씨는 내 고객이자 이야기의 주인공이고, 이제 춤을 출 차례지요."


독영은 자신의 휴대폰을 깨끗이 비운 접시 옆에 놓으며 말했다.


"멋진 비유네요."


그의 휴대폰 창에는 이런 글이 있었다.


<집에서 남긴 888은 무슨 뜻인가요? 폐기와 관련 있나요?>


지나는 휴대폰의 글을 흘끗 보았다.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듯 말이 없어졌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옆으로 와서 테이블에 걸터앉았다. 검고 깊은 눈동자가 영혼을 뚫어보듯 독영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방금 전, 회의실의 한서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두근대는 긴장감 대신 그리움과 따뜻한 햇살이 주는 평온함이었다. 또 한 가지, 후배인 한서와는 달리 지나에게선 세련된 호텔의 샤워코롱 향이 아닌 막 자른 풀에서 나는 예의 그 신선한 향기가 풍겼다.


"당신은 타고난 신사네요."


고개를 잠깐 숙였다 뭔가를 결심한 듯 머리를 들어 올린 그녀가 말했다.


"무슨 뜻인지는 그 상황이 벌어지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 거예요. 벌어지지 않는 게 최선이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에요. 그렇다고 해서 뭔가 치명적인 상황이 일어난다는 건 아니에요. 전에도 말했듯이 현상적으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요."

"초코무스케이크처럼?"

"응. 초코무스케이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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