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데이트 당일에 벌어진 일

11화

by 뮤즈노트

'좋아하는 사람은 따로 있다'


독영은 공작 꼬리처럼 우아한 드레스를 입고 있던 한서가 떠올랐다. '그녀를 말하는 것일까?' 하지만 굳이 지나에게 되묻는 것도 이상했다. 그녀는 비즈니스 관계에 있는 매니저일 뿐이니까... 그는 얼버무리며 전화를 끊고 소개팅 장소로 향했다. 레스토랑 한 켠에서 먼저 기다리고 있던 지나는 친한 친구처럼 활짝 웃으며 다가왔다.


"잠깐, 이 얼굴 뭐야. 부엉이가 '헤이, 브로'라고 하겠네요."

"부엉이?"

"지쳐 보여요."

"그야 지쳤으니까요."

"무슨 일이 있었어요?"

"추파카브라를 추적했거든요."

"추파카브라... 추파카브라를 추적했다라..."


그녀는 놀라거나 되묻는 기색도 없이 같은 단어를 반복했다. 명품이 분명한 사첼백에서 파운데이션 퍼프를 꺼내 능숙하게 그의 눈두덩을 두드렸다. 여자가 바르는 화장품 향을 이렇게 가까이서 맡아보는 건 처음이다. 선원을 유혹했던 아름다운 세이렌의 머리 결에 실려온 향처럼 매혹적이고 그리움을 부르는 은은한 향취였다. 그는 심장 근처에 기분 좋은 압박을 느낀다. 눈을 감고 향에 집중한다. 문득, 빗방울을 볼 때처럼 어떤 패턴이 서서히 맴돌기 시작한다. 순간, 그녀의 목소리에 깨어났다.


"역시 남자들은 면적이 크네요... 산 지 얼마 안 됐는데 금방 다 써버리겠네."

"남자들? 고객용 화장품인가요?"

"왜요?"

"그거 지나 씨 건 줄 알고..."

"제 거요? 훗. 며칠 전 이 퍼프로 구레 나루가 멧돼지 수염처럼 자란 아저씨 뺨을 두들겨줬죠. 면도를 잘못해서 피부염도 잔뜩 있던데..."


독영은 흠칫 놀라며 몸을 뺀다. 그녀는 목욕하다 도망가는 아이 팔을 잡아끌듯 본인 앞에 데려다 놨다.


"오이 비누만 쓰시던 분이 꽤 예민하게 구시네."

"그래도... 피부염은 좀..."

"일단, 아아아~~"

"아~~?"

"입을 벌리라고요."


지나는 그의 입에 재빠르게 구내염 패치를 붙여줬다. 그녀의 손가락이 혀에 잠깐 닿았다. 쓴 에칠 알코올 맛이 느껴졌다.


"손 소독은 열심히 했으니 걱정 말아요."

"하지만 피부염은..."


그녀는 가늘게 눈을 흘기며 독영의 뺨을 두들기던 퍼프로 자신의 눈 밑과 볼을 톡톡 두드렸다. 그리고 화장품을 백에 넣었다.


"준비 완료!"

"지나 씨도 힘들겠군요. 오이 비누 쓰는 남자 얼굴에 자기 화장품을 두들겨야 하고... 입에 손을 넣어야 하고..."

"동정하는 건가요?"

"그보단 싫을 것 같아서..."

"화장품은 아깝지만, 수천만 원이 오가는 비즈니스니까요, 전략적 투자죠."


그녀는 싫은 말도 평범하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저는 저쪽 코너, 보이지 않는 사각에 앉을 거예요. 계산대 CCTV를 통해 그쪽을 볼 수 있으니까."


그는 그녀가 시키는 대로 시원스러운 통창이 있는 곳에 앉는다. 잠시 후 레인코트의 비를 털며 소개팅녀가 들어왔다. 초반 진행은 순조로웠다. 이미 메뉴를 알기에 능숙하게 음식을 주문했다. 레스토랑 웨이터를 화제로 삼아 이야기도 건넬 수 있었다. 여자는 눈이 커서 약간은 겁먹은 듯한 인상을 풍겼고 말 수도 많지 않았다. 노란색 카디건이 잘 어울리는, 놀이 공원 솜사탕을 닮은 이미지의 여성이었다. 동그란 인상과 달리 건설 회사 소속의 플랜트 설계사였기에 주로 남자들과 일을 많이 한다고 했다.


"현장에서 일하는 게 쉽지만은 않겠네요."


그녀는 고개를 살짝 숙였고 '네'라고 말을 얼버무렸다. 그리고 자신의 대답이 짧았음을 깨달은 것인지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업종이 그러니까... 입사 면접에서 면접관들이 욕을 해볼 수 있냐고 했어요. 당시엔 전공을 살려서 갈 수 있는 회사로서는 유일했으니 절박했죠. 한바탕 욕을 했어요. 엄숙한 면접 자리에서, 그것도 처음 본 사람들 앞에서요."

"다행히 그 욕이 마음에 들었나 보네요."

"음... 그건 모르겠어요. 다만... 욕을 하는 순간, 내가 아닌 듯한 생각이 들었어요. 면접장에서 욕을 하는 누군가가 있고, 나는 그걸 한 발짝 비켜나서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이요. 성격과 전혀 다른 일을 해야 할 때, 그런 기묘한 느낌을 떠올려요. 그리고..."


독영은 말을 기다렸다.


"조용히 살다가 자신과 전혀 다른 행동이나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도 그렇지 않았을까... 심리적인 회피라고 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뭔가... 정해진 운명이 있고 그 설계도에 이미 끼어 들어가 있다, 좋게 말하면 나는 회사와 현장이란 네트워크를 잇는 링크의 노드로서 작동할 뿐이라는... 느낌."


처음 만난 사이다. 남녀가 잠깐 저녁을 함께하는 소개팅일 뿐이다. 그럼에도 여자는 솔직하고 투명하게 자신을 드러내고 있었다. 말을 마치고 맥주를 마시던 상대는 자각하듯 '어!'라고 반응하며, '쓸데없는 소리를 했다'라고 자책했다. 고개를 숙인 그녀를 향해 독영은 입을 벌려 손가락으로 혀를 가리켰다.


"여기여어. 이 즈항색이 구내여엄 패치에에요."

"..."

"말 주변도 없고 처음 만난 사람 앞에선 버벅거려서, 입이 아파 그런다고 핑계 대려고 붙였어요."


상대는 잠깐 멈칫하더니 고개를 숙이고 '쿡쿡' 웃었다. 독영이 말을 이었다.


"저도 솔직하게 말씀드리는 거예요. 저의 찌질한 고백보단 훨씬 훌륭한 말이었요."


두 사람 주변에 긴장감은 물러나고 어느덧 느긋하고 편안한 분위기가 감돈다. 생맥주의 손잡이를 잡은 채 테이블 바닥에 손으로 머리를 기댄 채 쉬었다. 별다른 말도 없었다. 어쩐지 그래도 될 듯한 느낌을 서로에게 느꼈다. 밤 10시쯤 영업시간이 다 되자 두 사람은 밖으로 나왔다. 예상대로 우산은 감쪽같이 없어진 상태였다. 독영은 차를 가져오겠다는 말을 할까 망설인다. 그때 소개팅녀는 자신의 핸드백을 열어 3단 접이식의 작은 우산을 꺼냈다.


"직업적으로 늘 플랜 B를 마련해 놔요. 이건 비상용 우산. 저는 이만 들어가 볼게요. 우산은 있으시죠?"

"아... 괜찮으시면 차로 집까지 모셔다 드릴게요."

"술 드셨잖아요. 전 괜찮으니 꼭 대리 운전 불러서 들어가세요."


마음이 풀어진 나머지, 지나와 세운 계획과 달리 그는 맥주를 마셨다는 걸 깨달았다.


"아... 술을..."

"오늘 즐거웠습니다."


상대는 꾸벅 인사한 뒤 우산을 펼쳤다. 붉고 푸른 신호등 빛이 반사되는 도로를 건넌다. 이내 어렴풋한 빗내음만 남긴 채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독영은 소개팅녀가 사라질 때까지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곁에 지나가 조용히 다가와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의도했던 계획은 엉망으로 끝났네요."

"정해진 거죠, 설계도에 끼인 것 같은."

"운명론적이네요."

"저분이 비슷한 말을 했어요. 아마도 그렇게 될 만남이었나 보죠."


그제야 독영은 지나를 바라본다. 편의점에서 산 포장도 뜯지 않은 우산을 작은 몸으로 잔뜩 끌어안고 있었다. 그 모습이 어쩐지 처연하기도, 귀엽기도 했다. 하지만 공연한 수고를 하게 만든 듯해서 미안함이 몰려왔다.


"고마워요. 미안해요. 애쓰셨는데... 계약은 역시 어렵겠지만, 계좌번호와 금액 알려 주시면 오늘 서비스료는 따로 보내드리겠습니다. 덕분에 상대방과 자연스럽게 이야기할 수 있었으니까요. 솔직히 처음으로, 낯선 사람 만나는 게 즐거울 수도 있겠구나 했어요."

"서비스료라니, 그럴 필욘 없어요."


지나는 잠깐 생각을 하더니 우산 더미를 독영에게 안기고 명함을 꺼내서 윗주머니에 꽂아줬다.


"마음이 바뀌면 이곳으로 찾아오세요. 폐기는 며칠 미뤄둘 수 있으니까요. 참고로 로비에 도착해서 이 명함만 내밀면 책임자를 만날 수 있을 거예요."

"책임자? 지나 씨가 아니고?"


독영은 우산 더미를 든 채 지나를 바라봤다. 그녀는 휴대폰에 뭔가를 입력하면서 말했다.

"그 우산은 선물이에요. 다 가져가세요."


지하철 역까지 데려다주겠다고 했지만 지나는 거절 했다. 잠시 후, 광택으로 번쩍이는 검은색 마이바흐가 나타났다. 그녀는 스르르 열린 뒷 문으로 차에 올랐다. 업무용 법인 차로 보기엔 지나치게 고급스러웠다. 서서히 차가 움직이기 시작할 때 짙게 선팅 된 창문을 내리고 지나가 손을 흔들며 말했다.


"나는 독영씨의 전담 매니저란 걸 잊지 말아요. 안녕~"


한동안 빗속에 서 있던 그는 집에 귀가했다. 우산을 현관에 쏟듯이 내려놓는다. 1회용 비닐우산부터 고가의 장우산까지 형형색색이었다. 우산더미를 바라보며 잠시 한숨을 쉬다가 일부는 신발장에 넣고 나머지는 구석에 세워 놓았다. 옷을 벗고 샤워를 하려는 데 USB와 명함이 윗 주머니에서 떨어졌다. 그는 몸을 씻은 뒤 건조기에서 트레이닝복을 꺼내 갈아입었다. 바닥에 떨어진 USB를 주워 세톱박스에 꽂는다. 불 꺼진 거실 소파에 앉아 기자에게 보내준 취재 리포트를 재생하며 지나가 건넨 명함을 만지작 거렸다.


TV화면이 밝아진다. 처음 나타난 것은, 원경으로 잡은 야산이다. 카메라가 줌인(zoom in)해 들어가자 산 아래 자리 잡은 농장이 보였다. 이어 미니 포클레인이 땅을 파는 모습 뒤에 농장주의 인터뷰가 흘러나왔다.


"아 그러니까, 멀쩡한 송아지가 폐사했다고! 몇 번 신고했는데 공무원들은 서류니 신고니 뭐니 얘기만 해싸코. 지들이 나와서 조사를 해보겠다든가 도통 말도 없고 말야. 이 일대 농장에서 죽은 소가 한 두마리냐고... 지난 달만 해도..."


기자는 농장 주 말을 잘라버리고, 사인이 질병이란 확인서가 있어야 사체를 폐기해 주는 행정을 비판했다. 곧이어 죽은 송아지가 등장했지만, 뿌옇게 블러 처리가 되어 어떤 상태인지는 알 수 없었다. 독영은 TV를 끄려 리모컨을 찾았다. 순간, '꿔꿔꿔' 이상한 꿩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는 화면으로 시선을 옮겼다. 멘트를 마친 기자의 뒤편, 매장을 위해 파 놓은 구덩이로 굴러 떨어지는 송아지. 그 위로 숫자를 닮은 어떤 기호가 잠깐 스쳐갔다.


"8?"


화면을 확대해 본다. 별 모양 안에 선명한 '8'자가 송아지의 한쪽 등에 부자연스러울 만큼 크게 새겨있다.

농장에서 새긴 개체 번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꿩 울음소리, 지나가 암호처럼 남긴 888, 병원에서 마주친 남자의 손에 새겨진 별, 베란다 유리창에 맺힌 물방울이 만들어낸 패턴들이 뒤엉킨 이미지가 떠오른다. 다시 머릿속이 아득해지고 있다. 독영은 비척대며 일어나 약을 꺼내 침과 함께 삼키고 다시 쓰러지듯 소파에 눕는다. 처음엔 태풍처럼 머릿속을 소용돌이치며 휘돌던 이미지들은 점차 속도를 줄여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쓸쓸히 소파에 누워 죽은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SF 영화처럼, 경찰이 죽음의 원인을 밝히려 자신의 뇌를 스캔해 봐도 아무런 기억도 찾지 못하리란 생각이 들었다.


어린 시절과 부모님에 대한 기억이 모조리 사라져 껍데기만 남은 채 홀로 죽은 남자. '장례식장에서 죽음을 애도할 여자 한 명 없는 삶이란 무엇일까?' 문득 독영은 지나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그는 등밑에 깔려 있던 명함을 들어 휴대폰 불빛에 비춰보았다. 검은 바탕에 금색 글씨로 적힌 주소 한 줄. 그리고 '8'을 옆으로 뉘인 것 같은 '기호'가 반짝이고 있었다.

keyword
월, 화, 수, 목, 금, 토, 일 연재
이전 10화추파카브라와 이상한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