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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 회사

13화

by 뮤즈노트

내비게이션에서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란 안내가 흘러나왔지만 이상하게도 건물은 보이지 않았다. 독영은 근처 도로변에 주차를 하고 천천히 주변을 걸었다. 고층 빌딩 숲이 둘러싼 한가운데 출입 금지 푯말이 있는 잔디밭이 있었다. 그리고 코너 모서리에 이르러서야 노출 콘크리트로 지은 단층짜리 작은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회사 표지판은 없었고, 굳게 닫힌 철문 옆에는 카메라가 딸린 초인종이 있었다.


그는 멀찍이서 그 건물을 사진으로 찍었다. GPS 지도로 목적지 위치를 다시 확인한 뒤 초인종을 눌렀다. 처음에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다시 초인종을 누르려는 데 '철컹'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그는 망설이다가 손잡이를 비틀고 건물로 들어갔다. 센서등이 켜지듯 천정 전체를 뒤덮은 LED조명의 불이 켜졌다. 눈이 적응하는 데 필요한 잠깐의 시간이 지나고 AI로 만든 듯한 여성 목소리가 들렸다.


"방문 목적을 말씀해 주십시오."

"계약하러 왔습니다. 지나 씨란 분이 이곳 주소를 알려줬습니다."


독영이 명함을 꺼내자, 정면에 하얀 벽면이 열리며 숨겨져 있던 엘리베이터가 드러났다.


"엘리베이터에 탑승하란 건가요?"


이번엔 아무런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엘리베이터에 오르자 문이 닫혔다. 내부에는 층별 버튼은 물론 비상버튼이나 스피커 구멍 역시 없었다. 완벽에 가까운 하얀 상자였다. 안전 점검을 어떻게 통과했는지 알 수 없었다. 무게 중심이 위쪽으로 쏠리는 게 느껴졌다. 지하로 내려가는 듯했다.


"쉬익"


SF영화에서 들어봤음직한 사운드를 내며 문이 열렸다. 두리번거리며 밖으로 나왔다. 역시 LED가 촘촘히 깔린 천정이 지나치게 밝은 빛을 쏟아냈지만 벽면은 모두 어두운 회색이었다. 흑백 영화에 들어온 듯 기묘한 명암의 대조를 이뤄내고 있었다.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갈림길에 도착하면 기존의 불이 꺼지고 한쪽 복도에 불이 켜졌다. 아무런 표식 없는 회색 벽면과 넓은 복도, 복잡한 코너와 갈림길이 이어졌다. 천적을 기만하기 위한 토끼굴과 닮았다고 느꼈다. 마침내 좌측에 있던 방의 불이 들어오고, 복도의 불이 모두 꺼졌다. 그는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갔다.


도그레이스를 할 정도로 큰 방 한가운데 긴 테이블이 놓여있었고, 그 끝에는 은발의 남자가 앉아 있었다. 30대에서 60대까지 나잇대가 가늠되지 않았고 머리카락 역시 새치인지 염색을 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독영이 멈칫거리자 남자는 손을 뻗어 자신과 반대편 끝에 있는 의자를 가리켰다. 의자에 앉자마자 남자의 쇳소리가 섞인 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오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초독영씨."

"지나... 씨가 계실 줄 알았습니다만..."

"저는 토티라고 합니다. 편하게 티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계약 담당자죠. 실제로는 이일 저일 시키는 대로 하고 있지만요."

"미로 같군요. 분위기가 삼엄해서 지나 씨 같은 분이 이런 곳에서 일하고 있으리라곤 생각지도 못했어요."

"분위기, 분위기라..."


티는 말을 반복하곤, 작은 리모컨을 들고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한쪽 벽면 전체에 불이 들어오더니, 고층 건물에서 한강을 바라보는 듯한 시원한 화면으로 전환됐다. 화질이 놀랍도록 좋아서 순식간에 전망이 좋은 호텔 라운지에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독영은 소개팅 상대에게 보낸, 지나가 문자로 준 사진을 떠올렸다. 그것은 실제로 촬영한 것이 아니라 이 화면을 찍어 보낸 듯했다.


"최신 LED에 리얼엔진을 얹었죠. 주변 고층 빌딩에서 찍어서 전용 케이블을 통해 이곳으로 전송됩니다. 그러니까 한강 모습은 실시간이나 다름없죠."

"영화 스튜디오에서 사용하는 기술인데... 실제로 보는 건 처음입니다."


티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몸을 돌려 스크린을 보며 말했다.


"물이란 신기해요. 강은 변화가 없는 것 같지만 늘 변하죠. 한번 발을 담근 물에 두 번 담글 수는 없는 법이란 말처럼... 후후. 아! 혹시 이 말, 아시나요?"

"모릅니다."

"전쟁은 만물의 아버지이며 만물의 왕이다... 이래도요?"

"그런 말을 모른다는 게 계약에 문제가 되나요?"


독영은 쇳소리만큼 신경을 긁는 듯한 남자의 거만한 말투에 목소리가 커졌다. 그는 분노 비슷한 이상한 적의를 느끼면서도 이렇게 반응하는 자신이 낯설었다.


"하하하. 그럴 리가요. 그냥 스몰토크입니다. 아이스 브레이킹이 필요하니까."

"계약에 앞서, 지나 씨를 만나고 싶습니다만..."


독영은 기괴한 건물과 계약 담당자의 태도에서 지나의 안위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남자는 자신 앞에 놓인 계약서를 볼펜으로 똑똑 두드리다가 입을 열었다.


"계약을 위한 사전 조건이 완비되면 만날 수 있어요. 이건 규정이니까 저도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런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는데요?"

"하지만, 지금 들었죠."


티는 볼펜을 내려놓고 의자를 돌려 그의 몸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몸을 기울인 채 말했다.


"지정 연애인가요? 비지정 연애인가요?"

"지나 씨를 만나서 상의해 보고 싶습니다."


티는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노노. 그렇게 애매해선 안 돼요. 일이 꼬인 것도 초독영씨께서 어제 전담 매니저의 코칭과 달리 맘대로 행동한 것과 계약 제안을 거절해서죠. 지나 양이 경고했겠지만, '리타이어먼트'(retirement) 단계에 들어가면 적용되는 규정이 까다로워집니다. 저로서도 난감한 일이죠."


독영은 남자에게서 직접적으로 '리타이어먼트'란 단어를 듣는 순간 '폐기'가 단순한 말장난이 아님을 새삼 깨달았다. 어쩌면 상상보다 끔찍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느껴졌다.


"이 건물에서 짐작하셨듯 저희는 보안을 생명으로 합니다. 어설픈 짝짓기 플랫폼 회사가 아니란 말이죠. 상호 간 계약은 위험을 공유하는 것이기에 신뢰를 바탕으로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신뢰란 여러 가지 의미죠. 계약상 지켜야 할 조항도 있지만, 확신이 없는 당사자가 매니저를 신뢰하고 지시대로 계약을 이행할 충분한 의지를 갖고 있느냐란 걸 보여주는 것도 포함됩니다."

"의지를 어떻게 보여주란 거죠?"

"지정입니까? 비지정입니까?"


독영은 더 머뭇거릴 수 없었다.


"지정으로 하겠습니다."

"좋습니다. 지정 상대는 누구입니까?"


막상 지정이라고 답을 하긴 했지만 망설였다. 그의 머릿속엔 아름다운 한서의 모습이 떠올랐다. 곁에 있기만 해도 두근거리고 온몸에서 부드러운 향기가 풍긴다. 그녀의 친절은 독영을 사로잡았지만, 이미 남자 친구도 있고 그와는 삶의 조건 자체가 맞지 않다. 어떤 식이든 문제상황에 끼워 넣고 싶지 않았다.


"독영씨의 지정 상대는 지나 양과 서로 마주친 적이 있더군요. 바로 어제. 아니, 그제였던가."


티는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듯 말했다. 독영은 지나와 데이트 계획을 위해 만나던 날, 레스토랑 앞에서 차창을 내리고 인사하던 한서를 떠올렸다. 그리고 뒤이어 테이블에 함께 머리를 기대고 있던 플랜트 설계사를 생각했다. 남자가 말했다.


"계약을 위한 사전 조건을 말씀드리죠."

"사전 조건이란 게 있었나요?"

"매니저 계약 단계를 벗어나는 바람에 번거로워진거죠. 저를 탓하진 마시길. 후후."


독영은 남자를 바라봤다.


"지정 상대에게 내일까지 고백을 하십시오. 어떤 식이든 상관없습니다만, 지정 상대가 명확하게 초독영씨로부터 구애를 받았다는 걸 느끼는 수준이어야 합니다."

"당사자밖에 모르는 걸 누가 어떻게 평가하죠? 게다가 이곳은 상대와 이어질 수 있게 코칭을 해주는 곳 아닙니까? 저 혼자 알아서 구애한다면 무슨 의미가..."

"잠깐!"


남자는 검지 손가락으로 천정을 가리켰다. 정적과 함께 낮게 울리는 공조음 비슷한 것이 들려왔다. 티는 소리가 끝나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지금의 선택은 회사가 강제한 게 아닙니다. 신뢰하지 못할 고객 하나 때문에 보안과 평판이 떨어질 위험을 감수할 이유도 없고요. 계약을 원치 않으시면 지금 그대로 나가시면 됩니다. 만약 회사의 제안을 따르겠다면, 계약 조건이 완비될 때까지 질문은 묻어두시고 따르시면 됩니다. 구애로 인해 최악의 결과가 벌어진다 해도 계약 이후, 지나 양이 코칭을 통해 바로 잡아 줄 겁니다. 간단하죠?"


남자는 차분한 어조였으나 얼음처럼 차갑고 단호했다. 앉은 자세 그대로 문을 향해 손을 뻗었다. 방을 나가기 전, 독영은 뒤돌아 그에게 물었다.


"지나 씨는 괜찮은 겁니까?"


티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계약이 실패한다 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요."


독영은 남자의 눈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경찰에 신고할 일이 없었으면 합니다."

"하하하. 신고할 내용이 뭘까 궁금하긴 하지만... 정말이에요. 아무 일도 없어요."


이번엔 티가 독영의 눈을 노려보며 말했다.


"어디에 있든 케이크는 케이크일 뿐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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