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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랜트 설계사

14화

by 뮤즈노트

'케이크... 초콜릿무스케이크'


독영의 눈이 번뜩였다. 그가 말의 의미를 따져 물으려는 순간, 조금 전 공조기가 도는 듯한 낮은 소음이 크게 들려왔다. 동시에 '철커덩' 소리를 내며 방안의 불빛이 붉은색으로 바뀌었다. 티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옷매무새를 만지며 스페인어로 혼잣말했다.


“로 베이아 베니르, 호데르.” (Lo veía venir, joder 이럴 줄 알았지, 젠장.)


티는 독영의 계약 서류를 덮으며 말했다.


"계약을 원한다면 사전 조건은 이틀 내에 이행할 것, 그리고..."


티는 입가에 냉소를 머금었다.


"이곳에서 빠르게 벗어날 것. 보시다시피 급한 일이 생겨 배웅은 어렵기도 하고, 전담 매니저 주장대로라면 초독영씨에겐 쉬운 일일 테니까요."


독영이 뭔가 말하려는 데, 티는 어느 틈엔가 문밖으로 사라졌다. 공조기의 '웅웅'거리는 소음이 커졌고, 어디선가 콩을 튀기는 듯한 소리도 들려왔다. '화재라도 난 것인가' 싶었지만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았다. 독영은 빠르게 문밖으로 나왔다. 더 이상 길을 안내하는 불빛은 켜지지 않았다. 방에서 새 나온 붉은 불빛 만이 규칙적으로 깜빡이다가 꺼졌다.


암흑. 바로 앞의 손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의 어둠이 사위를 감싼다. 휴대폰을 꺼내 주위를 비췄지만 회색의 벽은 오히려 어디까지 길이 이어져 있는지 착시를 일으키게끔 만들었다. '악의적인 미로다' 이것은 명확한 의도를 가지고 설계된 건물 구조란 생각이 스친다. '무엇을 지키기 위해서? 아니면 무엇의 공격을 막아내기 위해서?' 독영은 휴대폰 플래시를 끄고 호흡을 집중한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미로처럼 복잡한 이곳에서 빠르게 벗어나라고? 이것도 계약을 위한 사전 테스트일까?'


독영은 지나온 길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웅웅 거리는 소음은 귀를 찢을 듯 더 커지기 시작한다. 순간, 독영은 방에 걸어간 그 자세 그대로 뒤돌아 선다. 그리고 녹화된 필름을 역재생하듯이 뒤로 걷기 시작한다.


'하나, 둘, 셋... 십칠, 십팔, 십구, 왼쪽 턴!, 하나, 둘, 셋... 열하나, 턴!..."


빌딩에 들어올 때, 일부러 걸음 수와 꺾어진 코너의 개수를 외운 건 아니었지만 어쩐지 몸이 자연스럽게 반응했다. '긴장한 탓에 무의식이 작동했던 걸까?' 주변에서 일어난 수상한 사건들의 연쇄. 그것은 우연하게도 '8'이란 숫자로 연결되어 있다. 하지만 엉켜가기만 하는 퍼즐을 도저히 풀어낼 자신이 없었다. 그저 눈앞에 보이는 작은 실끈을 붙잡으려 애쓸 뿐.


그는 차로 돌아와 시트에 앉았다. 한강 어딘가에서 날아온 괭이갈매기가 잔디에 떨어진 과자 부스러기를 쪼아 먹었다. 조수석에 놓인 두툼한 약 봉투 꾸러미를 바라봤다. 부모님의 죽음 이후를 떠올린다. 혼란 속에서 살아온 이십여 년이 어떤 긍정적인 기억을 남겼는가를 돌이켜 봤지만 지워진 기억과 마찬가지로 액자에 담을만한 순간은 없었다. 문득 사라진 주치의이자 그의 유일한 친구인 종욱의 말이 떠올랐다.


약을 끊어보는 건 어때... 우연한 것처럼 보이는 사건도 모두가 연결되어 있는 법이야. 대개는 그 복잡성을 해석하지 못하지만, 넌 오히려 그걸 해석해 냈기에 더 큰 충격을 받았던 게 아닐까?


독영은 출발하기 전, 창문을 열고 약봉투를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집으로 돌아온 독영은 시계를 본다. 복용 시간을 향해 초침은 쉼 없이 움직인다. 약을 끊고 밤을 제대로 넘길 수 있을지 두려움이 일었다. 누군가와 함께 있고 싶은 욕망이 간절했다. 어제 만난 플랜트 설계사의 메시지가 떠올랐다.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몇 번을 망설이다가 그녀에게 톡을 남겼다.


그는 꼼꼼하게 샤워를 했다. 집안도 깨끗이 청소하고, 혹시나 싶어서 위험해 보이는 물건은 따로 모아 창고에 넣은 뒤 열쇠로 잠갔다. 열쇠는 베란다 창문을 열고 화단에 던졌다. 아무런 메시지도 없는 휴대폰은 서재 충전기에 놔두고, 소파에 앉았다. 약효가 모두 소진되는 밤을 향해 시간이 흘렀다. 석양이 만들어낸 긴 그림자가 이어지다 이내 어둠이 찾아왔다. 불현 시계 초침 소리가 거슬리는 느낌을 받았다.


TV를 켰다. 지난밤, 기자 리포트를 담은 USB가 꽂혀 있는 상태여서 영상은 송아지가 굴러 떨어지는 장면에 멈춰있었다. 그는 송아지의 등판에 커다랗게 새겨진 별 모양과 그 기호 안에 담긴 '8'을 완벽한 어둠이 찾아올 때까지 쓸쓸히 바라봤다.


"띠띠띠띠 띠리링"


현관의 센서등이 켜졌다. 누군가 집에 들어왔음을 알아차렸다. 센서등이 다시 꺼졌다.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 중문을 열었다. 그곳엔 플랜트 설계사가 광장의 동상처럼 서 있었다.


"아!"


기대하지 않던 방문에 독영은 짧은 말을 내뱉었다. 그녀는 천천히 손을 들어 현관에 잔뜩 쌓인 우산더미를 가리켰다.


"저 우산들 틈에 있는 게, 제 우산?"

"그게..."


엉뚱하게도 오해할만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변명을 하려 우물거리다 이내 포기했다. 애초에 지나와 작전을 짜며 계획된 만남을 가진 건 사실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위급한 본인 상황만을 앞세우며 메시지를 보낸 것 역시 뻔뻔한 짓이었다.


"미안해요. 호의로 대해주셨는 데... 제가... 우산도... 오늘 갑자기 보낸 메시지도... 그게, 그러니까..."


그녀는 사과를 듣고 있다가 신발을 벗었다. 휴대폰 카메라로 주위를 둘러보며 조심스레 한발 한발 내딛으며 거실로 들어섰다.


"참고 삼아 말하지만 지금 상황은 라이브로 남동생 SNS 계정에 녹화되고 있어요."


캄캄한 거실엔 TV만 켜져 있었다. 그녀는 불을 켜는 대신 소파에 엉덩이를 반쯤만 걸터앉았다.


"솔직히 화나고 놀랐어요. 본인 집 주소와 현관 비밀번호. 그리고 꼭 와주시면 좋겠어요라니... 무슨 일일까, 얼마나 다급한 일이길래... 싶었어요. 밖에서 보니 불은 꺼져 있고 전화도 안 받길래 올라와 본 거예요. 그랬더니 저 우산들..."


독영은 얼토당토않은 행동을 했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그는 이기적인 요구에 익숙한 사람만이 이기적인 요구를 자연스럽게 할 수 있다는 걸 몰랐다. 생각에 잠겨 있던 그가 고개를 들자, 그녀는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웃고 있었다.


"하... 웃으면 안 되는 데... 솔직히, 이 상황이 너무 이상해요. 황당하고 웃기기도 하고."


그녀는 말을 이었다.


"처음 만난 남자가 보낸 메시지에 무슨 일일까 싶어 걱정돼서 온 것도 웃기고, 집에 왔더니 선녀 옷 훔쳐가듯 우산 훔치는 남자였다는 것도 황당하고요. 그래서 집에 돌아가야지 했어요. 그런데 어쩔 줄 몰라하는 독영씨를 본 순간 어이없게도 화가 풀려버렸어요. 그런데도 화를 내는 상황이 당연하니까 계속 화내는 연기를 하고 있고요."

"면접장에서 욕하는 상황처럼 느껴졌겠군요."

"맞아요. 바로 그거."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달빛만이 가득한 공간에서 눈을 흘기듯 하고 이 방 저 방을 살피듯 돌아다녔다. 그리고 다시 거실로 나와 말했다.


"다행히 집 안에 이상한 점은 없네요."

"..."

"많은 사람들과 부딪히며 일하는 게 일상이다 보니 언제부턴가 사람이 보여요."


그녀가 선채로 말을 이었다.


"어떤 꿍꿍이가 있나, 이 사람은 나한테 뭘 원하나... 웃고 있지만 나를 싫어하는 사람도 있고, 같이 욕을 주고받아도 깨끗한 바탕의 사람이 있다는 것도요. 어제 만났을 때 독영씨에게도 어떤... 느낌을 받았어요."

"..."

"제 직감이니까 설명하긴 어려운데... 예전에 잡지에서 미녀 연예인과 인터뷰 한 내용을 읽은 적이 있어요. 질문이 '당신은 자신이 예쁘단 걸 압니까?'같은 거였는 데, '중학교 2학년 전까진 전혀 몰랐어요.'라고 대답을 하더라고요. 미녀나 미남조차 자신의 아름다움을 깨닫는 시점이 있구나..."


그녀는 다시 소파에 걸터앉았다.


"이 사람은 미남미녀의 어린 시절처럼 자신이 누구인지 아직 모른단 느낌. 그래서 연애까지는 무리겠지만, 친구가 되면 좋겠다는 느낌."


그 말에 독영은 큰 위로를 받았다.


"고마워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투약 중인 약을 끊으려는데, 겁이 났어요. 제가 겁이 많은 편이라... 현재로선 곁에 있어줄 친구들도 마땅치 않았고요... 큰 실례를 했어요. 늦었으니 택시 불러드릴게요."

"약을 끊고 혼자 있을 때 일이 생기면요?"

"집에 가신 뒤엔... 괜한 걱정 하시지 않도록 곧바로 응급실에 가서 이런저런 검사를 하며 밤을 보낼 생각입니다. 문제가 생겨도 병원이라면 대처가 가능하겠죠."

"거짓말이란 게 보여요."

"어쩌면... 어쩌면, 이런 상황에서 부를 수 있는 누군가가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부르면 와주는 사람이겠죠."

"..."

"제가 어쩐지 인류애의 대표선수가 된 것 같네요. 가슴에 UNDP마크라도 달고 올걸 그랬어요."


그녀는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긴 듯하더니 말했다.


"자정까진 괜찮을 듯해요. 어플로 찾아보니 바로 앞에 야간 운행 버스가 있더라고요."

"꼭 그러실 것까진..."

"동정심이나 그런 건 아니에요. 아니, 약간은 있겠지만 그게 다는 아니에요."

"와 주신 것만으로도 고맙습니다. 아마도 별일 없을 겁니다."

"아니, 그렇게 하고 싶어요. 진짜의 나라면, 아마도 그렇게 했을 거예요. 대신, "


그녀는 말을 이었다.


"독영씨는 내 안전을 위해 서재로 가 있고, 저는 현관 출입문을 연 채로 그 근처에 있을 거예요. 방문 열쇠는 모두 제게 맡겨주셔야 안심이 될듯해요. 자정까지 삼십 분마다 '괜찮다'는 톡을 보내시고, 위급하면 소리를 지르든해서 알리세요. 제가 바로 119를 부를게요. 참고로 만약의 상황에 대비해서 남동생에게도 이곳 주소를 보내놨어요. 유도대학을 다니고 있고 성격이 사나워요."

"그렇다면 자정까지만 부탁드릴게요. 그리고..."


독영이 말했다.


"사나운 남동생의 조르기에 죽지 않도록 조심할게요."


그녀는 살짝 웃으며 말했다.


"유머를 하신 거죠? 농담도 할 줄 아시네요. 안심이 되네요."


그 역시 낯설다고 생각했다. 누군가를 웃겨본 일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금단 증세의 하나가 농담하는 능력이 생기는 거라면 괜찮을 듯싶었다. 그는 열쇠 꾸러미를 맡긴 뒤 크게 심호흡을 하고 서재로 들어가려 했다. 그때 여자가 말했다.


"어? 송아지 등에 저런 걸 새기는 경우도 있나 보죠?"


그가 뒤돌자 여자가 TV화면을 가리켰다.


"별모양 안에 8자요?"


그가 물었다.


"아뇨. 저건 코흐 눈송이와 무한대 기호 같은 데..."


그녀는 어깨를 감싸며 말을 이었다.


"그로테스크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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