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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흐의 눈송이

15화

by 뮤즈노트

"아뇨. 저건 코흐 눈송이와 무한대 기호 같은 데..."


그녀는 어깨를 감싸며 말을 이었다.


"그로테스크하네요."

"코흐의 눈송이? 그게 뭐죠?"


그녀는 화면 가까이 다가가 자세히 들여다본 뒤 말했다.


"맞네요. 코흐의 눈송이는 프랙털 구조의 일종이에요. 건축 쪽 전공자들도 대부분 알고 있죠. 건축은 디자인이나 구조적 안정성 측면에서 자연법칙을 지향하는 측면이 있으니까요. 그런데 왜 저런 이미지를 죽은 송아지에 흉측하게 새겨 넣은 거죠? 뉴스에선 뭐라고 하나요?"

"그게... 뉴스에 나가지는 않았어요. 시간에 밀려서요."


그는 기자와의 대화와 추파카브라를 떠올리며 프랙털에 대해 조금 더 설명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녀는 재킷 안주머니에서 제도용 펜을 꺼내 메모지에 그림을 그렸다.


"직선을 삼등분해서 가운데 부분을 정삼각형의 형태로 올리고, 올려진 삼각형의 각 변을 다시 같은 방식으로 그려나가는 식으로 만들어요. 자기 닮음 구조를 반복하는 거죠."

"그게... 어떤 의미일까요?"

"글쎄요. 누군가의 괴벽이거나 어떤 메시지겠죠? 자연계의 사물들, 예를 들어 겨울에 내리는 눈송이나 번개의 패턴, 강의 지류 모양 모두 프랙털 구조예요. 이것의 신기한 점은 직선에서 시작했으니 분명 해당 직선의 길이를 구할 수 있어야 하는데, 면적은 유한한 영역에 존재하지만, 눈송이의 둘레 길이는 자기 복제를 하기 때문에 무한으로 발산해서 정확한 수치를 구할 수 없게 돼요. 이렇게..."


그녀는 대략적인 별모양을 완성했다.


"유한한 영역에 존재하는 무한?"

"눈송이 안에 무한대 기호를 굳이 넣은 걸 보면 그런 의미일지도요."


플랜트 설계사는 소름이 끼쳐오는지 어깨를 움츠렸다. 어디선가 다시 자욱한 안개가 독영의 머릿속으로 몰려드는 느낌이 들었다. 머리를 한쪽 손으로 누르며 말했다.


"약효가 빨리 떨어지는 느낌이에요. 저는 좀 쉴게요... 아니, 서재에 들어가서 문을 잠글게요. 자정이 돼서 집에 가게 되더라도 가급적 배웅은 톡으로 드리고 나오진 않겠습니다. 안심하실 수 있게요."


그는 심심하면 안방 TV로 넷플릭스를 볼 수 있고, 출출하다면 냉장고에 있는 음식은 언제든 이용하라고 말했다. 고개를 끄덕인 그녀는 그가 건넨 열쇠 꾸러미를 든 채 활짝 열린 현관문과 중문 안쪽 복도에 자리를 잡았다. 독영 역시 서재로 들어와 문을 잠갔다.


지나의 귀고리, 빗물의 패턴, 제약회사에서 종욱을 만나러 온 사내의 문신, 종욱의 88 담배, 송아지에 새겨진 코흐의 눈송이가 떠오른다. 뒤이어 8 자 모양을 한 무한대 기호들의 행렬이 이어진다. 친구의 실종, 그것과 마찬가지로 '폐기'단계에 들어간 전담 매니저 지나의 사라짐 앞에서 무기력한 자신을 뒤돌아 봤다.


가만히 어둠 속에 앉아 있는데 휴대폰의 불빛이 들어오며 주변이 환해졌다.


영선 : 괜찮으세요? 30분이 지났어요.


톡이었다. 플랜트 설계사의 이름이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생각의 늪에서 허우적대던 그는 시간을 일깨워준 그녀가 있어 다행이라 생각했다. '괜찮다고' 톡으로 답장을 했다. 곧이어 메시지가 왔다.


영선 : 생각보다 심심하네요. 뭘 하고 계세요?

독영 : 그냥 앉아 있어요.

영선 : 오늘은 무슨 일을 하셨어요?


그는 오늘 방문한 지하 동굴과 유사한 건물을 떠올렸다. 설계사라면 뭔가 알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수상했던 그 건물의 외관 사진을 보냈다.


독영 : 병원 때문에 휴가를 냈다가... 이런 곳을 다녀왔어요. 지하에 있고 특이했어요. 깊고 넓은 토끼굴 같았죠.

영선 : 주변 빌딩 보니까... 여긴 너섬? 게다가 이건 상업 건물이라기 보단 출입구 정도로 보이네요.

독영 : 네. 상업 건물이 아니고, IT업종 회사 같은 느낌이었어요. 그런 건물을 깊은 지하에 짓기도 하나요?

영선 : 대용량의 서버를 구축하는 경우에는 종종.

독영 : 굳이 지하예요?

영선 : 예를 들어 데이터센터는 초고속케이블 연결 가능 여부나 유지보수 같은 기본 고려사항 외에도, 온도와 습도, 지진 등에 대한 안정성을 최우선적으로 따져요. 그래서 창문조차 내지 않죠. 지하에 지으면 항온항습에 유리하고 내진 설계에도 도움이 되죠. 물리적 보안에도 유리하고요.

독영 : 물리적 보안?

영선 : 예를 들면, 군사적 공격이나 테러 같은 거? 실제로 북유럽 몇몇 국가는 군사용 데이터센터를 지하에 구축하곤 해요. 하지만 민간 회사가 건설비도 높고 전기나 환기 인입 등 대규모 인프라 구축이 필요한 지하에 저런 시설을 만들지는 않아요.

독영 : 그렇군요.

영선 : 잠깐, 아까 깊고 넓다고 했죠? 좀 이상하네. 사진 위치 정보 좀 보여주실래요?


그는 사진이 찍힌 위치정보가 적힌 화면을 캡처해서 전달했다. 잠시 후, 그녀는 어떤 신문 기사를 다시 캡처해서 톡으로 보내왔다. 그 기사는 정부 보안 시설 근처에서 미지의 벙커가 발견됐다는 내용이었다. 40년 전 만들어진 것으로 볼 때, 정부 각료들의 비상 대피 시설로 추정된다는 내용이었다.


영선 : 저도 이 벙커 가본 적 있어요. 신기한 건축물은 공부 겸 취미 겸 보러 다니거든요.

독영 : 벙커와 제가 방문한 회사가 어떤 관련이 있나요?

영선 : 둘이 비슷한 위치에 있는 걸로 보여요. 사진으로 보면, 잔디밭 아래 공간이 모두 데이터센터 소유라 해도 그 정도의 공간감이 나오지 않는다는 게 이상하긴 한데... 복도 크기는 어땠나요?

독영 : 복도는 네댓 사람이 팔을 흔들며 다닐 수 있을 정도였어요.

영선 : 직접 본 건 아니라 추측이지만, 이 벙커가 만들어질 때 함께 만들어진 공간일 가능성도 있어 보여요. 상당한 깊이와 공간을 갖는 지하건물을 사기업이 정부 보안시설 인근 땅에 짓는 건 말이 안 돼요. 인허가가 어려울 테니까요. 잠깐만요.


그녀는 잠시 후 다시 톡을 보내왔다.


영선 : 맞네요. 해당 지역 공사 관련 내역을 확인해 봤는데 그 정도 등급의 공사는 최근 40년간 없어요. 기록을 누군가가 고의로 누락한 걸 수도 있지만 지하를 파는 공사는 대규모라 사람들 눈을 속일 수 없어요. 주변 빌딩 완공시점으로 따져봐도, 데이터 센터는 최소 30년 이전에 지어졌다고 봐야 할 듯해요.

독영 : 데이터 센터라면 국내에선 아마 20년 전에 지어진 게 최초일 텐데요?

영선 : 처음엔 데이터 센터가 아니었을지도요. 아마 벙커를 파는 지하 공사를 할 때 같이 했을 가능성이...

독영 : 벙커와 지하가 비슷하게 지어진 것이라면 왜 벙커만 발견됐을까요?

영선 : 사실 아직도 벙커의 존재는 과거 항공사진 등으로 유추한 것이지 정확한 용도는 몰라요. 그러니 누군가 벙커와 지하 건물을 함께 만들었는 데, 지하 벙커가 먼저 발견되자 연결 지점을 폐쇄했을 수는 있죠. 뭐 실제로 연결되었는지 어떤지 모두 상상이긴 하지만요. 지금 찾아보니 등기도 지상건물만 되어있네요.

독영 : 불법 건축물?

영선 : 모르죠. 실제론 정부 기관의 비호를 받고 있거나 정부 보안 관련 시설일지도요.


LCI란 회가 정부 발주를 계기로 만들어졌다 하더라도 비밀시설 인가까지 내주진 않았을 것이다. 그건 지나친 상상의 비약이었다. 그는 서랍에서 깨끗한 B4 종이를 꺼냈다. 생각나는 대로 최근 주변에서 일어난 사건과 이미지들을 적었다.


["우연한 것처럼 보이는 사건도 모두가 연결되어 있는 법이야."]


그는 종욱의 말을 떠올렸다. 테이블의 광원을 조절하자 핀조명처럼 종이로 빛이 모였다.


["대개는 그 복잡성을 해석하지 못하지만, 넌 오히려 그걸 해석해 냈기에 더 큰 충격을 받았던 게 아닐까란 생각을 하곤 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었지만, 무기력함에 벗어나기 위해선 친구 말대로 변화를 꾀할 수밖에 없었다. 종이에 무작위로 적힌 8과 코흐의 눈송이, 별, 지하동굴, 추파카브라, 송아지의 문장, 주조정실의 사고 등을 떠올린다. 문자와 이미지를 손으로 짚으며 눈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처음엔 좀처럼 집중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루틴 한 과정을 꾸준히 반복했다. 얼마 후, 자욱한 안개가 몰려오며 점차 몰입되는 기분이 들었다. 한 글자에서 단어로, 다시 단어에서 이미지로 건너뛰며 속도를 내본다.


갑자기 하얀 눈송이들이 하나 둘 종이와 분리되어 떠오른다. 그것은 삼차원 형상이었다. 연성치즈처럼 엉켜 붙은 덩어리들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블록처럼 하나씩 떼어내 분석할 수 있고 다시 구조화시킬 수 있는 작은 분절들로 느껴졌다. 그는 시험 삼아 몇 번씩 그것들을 흐트러트렸다가 다시 조립해 본다. 이를 응용하여 다른 형태의 눈송이를 만든다. 마치 눈을 처음 본 열대지방의 원주민처럼 빛나는 그것에 손가락을 대려 한다.


갑자기 다리부터 자욱한 안개가 찾아온다. 그 안개는 어느 틈엔가 시야를 가린다.


독영은 테이블에 머리를 박고 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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