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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배와의 음악회

16화

by 뮤즈노트

“정말 공포영화가 따로 없었어요.”


그녀는 독영이 정신을 잃은 이후의 일을 말해줬다. 톡 대화가 갑자기 끊긴 후, 한동안 규칙적으로 종이에 뭔가를 쓰는 소리가 났다. 잠시 후 그 소리는 발작적으로 바뀌어갔다. 그녀가 방에 귀를 가져다 대자, 주문을 외우는 것 같은 웅얼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열린 현관문 밖으로 몇 번이나 나갈까 고심했지만, 결국 남기로 했다. 이유는 그녀도 모른다고 했다. 중요한 순간, 독영이 유일하게 의지한 존재가 그녀 자신이라고 믿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계획대로라면 방문 밖으로 새어 나오는 소리가 심해지면 119를 불러야 했다. 하지만 그녀가 집에 남기로 결심하고 서재로 다가가려는 순간, 독영이 있던 방문이 '철컥' 소리를 내며 열리고 있었다. 영선은 거실을 가로질러 안방으로 뛰어 들어가 문을 닫았다. 발걸음 소리에 귀 기울이며 나가보려 했지만 이따금씩 주방 테이블이 부서질 듯 쿵쿵 거리는 소리가 들려서 포기했다. 한동안 안방 문 앞에 서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얼마 뒤 소리들은 점차 안정되어 가기 시작했고, 냉장고 문을 여는 소리와 그릇이 달그락 거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부엌엔 칼이 있을 텐데 위험한 상황이 벌어지면 안 되리라 싶어 용기를 내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고 한다. 그리고 맨손으로 햄과 양상추를 집어 들고 번갈아 가며 입에 쑤셔 넣고 있었던 그를 보았다.


그녀 손에는 어디서 구했는지 알 수 없는 망치가 들려 있었지만 독영은 그 이야긴 하진 않았다. 아마도 플랜 B였을지도...


"놀라게 해서 미안해요."

"..."

"맞서봤어요. 더 이상 도망칠 수 없어서요."


그는 크게 한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다행히 약을 끊는다고 정신을 잃는 건 아니란 걸 알게 됐으니 혼자서 그럭저럭 대처할 수 있을 듯해요."


설계사는 조금은 안심이 된 듯했지만 여전히 불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또 뭔가 알아낸 게 있나요? 금단 증세요."

"발작이 일어나면..."

"..."

"유효기간이 지난 냉장고 음식을 공격하는 능력이 생기는 듯해요."


설계사는 그제야 안심이 된 듯했다.


"하아... 다행이네요..."


그녀가 말했다.


"독영씨!"

"네?"

"유머코드가 독특하긴 한데 처음보다 훨씬 좋아요. 냉장고 공격능력과 함께 유머 능력도 생겼나 봐요."

"정말 그랬으면 좋겠어요."

"원한다면, 내일 출근 전까지 있어 드릴 수 있어요."


독영은 그녀의 말이 무척이나 위로가 됐다. 한동안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따뜻한 말을 충분히 감상하듯 곱씹다가 말했다.


"진짜 괜찮아요. 잠깐 정신이 혼미해지긴 했지만 컨트롤할 수 있단 생각이 들어요. 집에서 걱정하기 전에 어서 들어가세요. "


그녀는 주섬주섬 짐을 챙겼고 그는 자신의 신용카드가 등록된 어플로 모범택시를 불러주었다. 택시에 그녀가 오르기 전, 독영이 말했다.


"오늘 정말 고마웠어요. 복잡한 문제들이 좀 있어서... 해결될 때까진 연락을 못 드릴 수도 있어요. 나중에 어떤 식으로든 폐 끼친 거 보답할게요."


그녀는 생각에 잠긴 듯하다가 입을 열었다.


"세상은 거창한 희생 타령이 아니라, 조그만 친절과 호의로 유지된다고 생각해요. 친구로서 밥을 산다면 꼭 나갈게요."


택시의 떠나는 뒷모습을 보며 독영은 전에는 없던 따스한 감정이 훑고 가는 걸 느꼈다.


다음날 오전, 출근하여 휴가로 밀린 업무를 처리했다. 중간중간 아득한 안개가 몰려왔고, 그때마다 옥상에 올라가 발작이 지나간 뒤 내려오길 반복했다. 다행히 전조증세가 먼저 있어 대처할만했고, 발작 역시 현재로선 1분 정도로 길지 않았다. 그는 옥상을 오르락내리락하면서 LCI의 요구를 떠올리고 있었다.


'내일까지는 고백을 해야 한다. 하지만 누구에게?' 플랜트 설계사는 이상하리만큼 푸근한 느낌이다. 신뢰를 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곤혹스러운 일을 감당했다. 더 이상 그녀를 이용하는 식으로 괴롭히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오랫동안 짝사랑해온 한서는 어떨까? 한서에게 고백하고 망신을 당하고 회사 생활이 불편해지는 건 사소한 일이다. 그녀를 좋아하는 건 사실이었지만, 지나를 만나기 위한 목적으로 고백을 한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게다가 이미 남자친구가 있지 않은가? 공연한 불쾌감을 주면서까지 후배를 문제에 끼어들게 하고 싶진 않았다.


"선배님?"


한서가 말을 걸자, 깜짝 놀랐다.


"오늘 저녁에 시간 있으세요?"

"아... 별로... 없어. 왜?"

"음악회 표가 있는데 가실 수 있나 해서요."

"음악회?"


한서는 R석이 찍힌 예술의 전당 공연티켓을 흔들었다. 옆자리의 깐족거리는 동료가 끼어들며 말했다.


"야~ 남자친구 연주회 티켓이구나! 객석 자리 채우는 용도론, 늘 프리한 독영씨가 딱이지. 하핫"


한서가 쏘아보자 동료는 '아...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점심이나 먹으러 갈까?'라고 중얼거리며 사라졌다.


"그런 건 아니에요. 선배님. 티켓이 두 장인데 같이 갈 사람이 없어서요... 사실 아빠도 오시는 데, 제가 혼자 앉아있는 걸 보면 분명 옆에 앉아 같이 보자고 하실 거예요. 중간중간 아는 척하시면서 아주 귀찮게 하실 게 뻔해요. 제발요~. 응?"

"나라도 괜찮다면 갈게."

"정말요? 고마워요. 퇴근 후에 제 차로 같이 가요."


그녀는 진심으로 기뻐했다. 건네받은 티켓을 봤다. 지자체 소속 오케스트라의 정기 연주회였다. 후원사에 한서 아버지 회사의 로고가 인쇄돼 있었다. 그녀의 남자친구는 맨 마지막 순서였고, 프로그램은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 1악장이었다.' 정보를 찾아보니 상당한 난도가 있는 곡으로 유명했다. 오후 내내 유튜브를 통해 다양한 오케스트라와 피아니스트의 조합으로 그 곡을 들어 봤다. 발작 증세가 한결 완화된 느낌이 들었다. 음악이 가져다주는 예상치 못한 효과였다.


오후는 별 다른 일 없이 지나갔다. 다만, 퇴근 전쯤 감사부에서 전화가 와서 밀려버린 운행시간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오는 바람에 한서를 먼저 보낼 수밖에 없었다. 운행 사안을 가지고 감사부에서 전화가 온 것은 이례적이었지만 주조정실 근무자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성실히 대답했다. 대화 중간, 세상은 작은 호의로 유지된다는 설계사의 말이 떠올랐다. 감사부는 '대면해서 더 상세히 말씀 여쭐 수도 있습니다.'라며 긴 통화를 끊었다.


저녁 퇴근길은 혼잡했다. 하지만 내비게이션의 지시를 따르지 않고, 오로지 감에 의지하여 골목을 우회하여 목적지에 도착했다. 심지어 미리 출발한 한서보다 음악회장에 먼저 도착할 수 있었다. 주차를 해놓고 콘서트홀 로비로 들어가려는 데 낯익은 흰색 포르셰가 눈에 띄었다. 지난 주말 지하철 역 앞에서 우연히 봤던 한서의 남자친구 차였다. 잘 빗어 넘긴 머리에 귀공자풍의 하얀 피부와 갸름한 외모. 그는 뜻밖에도 차 안에 누군가와 함께 있었다. 언뜻 살피니 젊은 여자와 키스를 나누고 있었다.


안내 방송이 나오고 공연이 시작됐다. 한서 옆에서 공연을 보는 내내 방금 전 포르셰 안에서의 광경이 떠올라서 집중할 수 없었다. 안개가 몇 번 몰려왔지만 중간에 좌석이동이 어렵다는 걸 깨닫고 호흡을 가다듬으며 버텼다. 다행히 공연 1부가 끝나고 인터미션이 있었다. 손바닥이 흠뻑 젖은 독영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분수대 쪽으로 나가 바람을 쑀다. 한서가 따라 나왔다.


"한서야. 남자친구는 만났니?"


돌아보니, 한눈에 봐도 재계 거물임이 분명한 노신사가 두 사람을 내려보고 있었다. 키가 190cm는 돼 보일 정도로 컸는데 적당한 살집이 붙어서 더 거대해 보였다.


"아빠!"


한서가 눈을 흘기며 일어나는 바람에 독영도 엉거주춤 함께 일어났다.


"공연 전 리허설 끝나고 분장실로 바로 들어간다고 해서 아직 못 봤어요. 저희 일은 알아서 한다니까. 참."


핀잔을 주곤 있지만 애교가 섞인 목소리였다. 아빠와 공연을 보는 건 싫다고 했지만 부녀관계는 돈독해 보였다.


"여기는 저희 회사 독영 선배예요."


한서의 부친은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악수를 청했다. 독영은 그의 손아귀 힘이 생각보다 세서 놀랐다.


"천방지축이라 걱정인데, 늘 잘 도와주신다고 들었습니다."

"아닙니다. 오히려 한서 씨가 많은 도움을 줍니다."


그의 목소리는 친절했지만 동굴 깊은 데서 울려 나오는 듯한 저음에, 존칭을 사용하는 어투에서 위압적인 느낌이 든다. 한서는 남자친구가 있는 대기실에 들르겠다며 아버지의 비서처럼 보이는 인물과 사라졌다. 독영 역시 자리를 뜨려는데 그가 분수대 곁 의자에 털썩 앉으며 말을 걸었다.


"이런 공연은 자주 다니시는가?"


독영은 고개를 저으며 아니라고 말했다.


"솔직히 클래식엔 문외한입니다. 오늘 공연 프로그램보고 유튜브로 관련 영상을 찾아 들어본 게 답니다."


그는 금색 담배케이스 같은 걸 꺼내 테두리를 만지며 물었다.


"오늘 공연 어떤 것 같소? 전문적인 평을 기대하는 게 아니니 솔직히 말해봐요."


독영은 연주를 떠올렸다. 안개가 몰려오는 시점은 기묘하게도 오케스트라가 불협화음을 일으키는 부분이란 걸 깨달았다. 템포가 늦거나, 독주 부분에서 미세하게 음정이 맞지 않으면, 불쾌한 느낌이 찾아왔다.


"유튜브로 본 거랑 현장은 전혀 다르다는 걸 알았습니다."

"허허. 그야 당연한 거고."


노인은 꽤나 집요한 면이 있었다. 그는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곡을 모르기 때문에 뭐가 좋은지 잘못된 지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

"다만?"

"수석 바이올린의 나비넥타이가 비뚤어진 게 거슬렸습니다. 좋은 레스토랑인데 웨이터의 옷사이즈가 안 맞는다든지, 창에 써붙인 영어 문장에 정관사를 잘못 표기한 부분이 있다든지.. 그런 사소한 어긋남에 민감한 편입니다."

"저런. 나비넥타이라... 흥미로운 평이지만 솔직하진 않구먼."

"말씀드렸듯이 솔직함은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음악적으로 어긋남이 뭐냐고 물으신다면 설명할 순 없습니다. 저 역시 이런저런 실수를 하며 사는 데다 클래식 관객으로선 애초에 부적합한 사람일지 모르니까요.

"허헛. 다행히 자기 평가엔 솔직한 편이군."


그는 금색 케이스를 여전히 만지작 거리며 말했다.


"저 녀석 남자친구가 알아야 할 덕목이죠. 자기 성찰 말이오. 그리고..."

"..."

"부적합하단 걸 아는 거. "


독영은 차 안에서 다른 여성과 키스를 나누는 한서의 남자친구를 떠올렸다.


"태풍은 나비의 날갯짓에서 시작된다고들 하지요?"


독영은 대답 대신 노인의 눈을 바라봤다. 그는 천천히 하품을 한 뒤 말했다.


"하아음. 그렇다고 나비를 바로 잡아선 안됩니다. 최대한 자유롭게 높이 날도록 띄운 다음..."


노인은 금색 케이스를 펼쳐 나비 날갯짓처럼 하늘로 올리더니 손바닥에 떨구며 케이스를 잡아 '탁' 닫았다.


"떨어트리는 거지요."


노인은 케이스를 안주머니에 넣으며 말했다.


"밟을 수고도 없게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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