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저를 찾아 오세요

18화

by 뮤즈노트

두 사람은 클림트의 그림 <키스>처럼 빛나는 빛의 흐름으로 이어져 있었다.


'번쩍.' 독영의 뇌 한구석에서 섬광이 빛났다. 야산의 '꿩소리'가 울렸고 기이하게 죽은 송아지에 새긴 별이 빛났다. 지나의 별 모양 귀고리가 흔들리는 이미지도 떠올랐다. 독영이 얼어붙은 듯 허공을 보고 있자, 한서는 잠에서 깨어난 목소리로 말했다.


"아, 선배. 나... "

"응, 아!"

"술 냄새에 엉망이네요..."

"괜찮아."

"미안해요."


그녀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술이 덜 깬 상태라 약간 비틀대며 욕실로 걸어 들어갔다. '방금 전 빛의 환영은 무얼까, 빛이 찾아온 순간만큼은 되려 온전한 내가 된듯한 정신과 육체의 합일감이 느껴졌다.' 하지만 후배와 함께 있으니 더는 생각의 고리를 연결하기 어려울 듯 했다. '이젠 어쩌지?' 독영은 이대로 집에 가야 하나 아니면 노인의 말처럼 새벽까지 함께 있어야 하나라는 답 없는 고민을 시작했다.


샤워기에 물이 쏟아지는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독영의 휴대전화 진동이 요란하게 울려왔다. 그는 침대에서 일어나 거실 유리 테이블에서 울리고 있는 전화기를 향했다. 발신자 번호가 뜨지 않는 화면을 끄려다가 수신버튼이 눌렸다.


"독영씨!"

"...!"

"저예요."

"지나?"


그는 반가움에 어쩐지 목소리가 잠겼다.


"지금 바빠요?"

"한서가... 그러니까 회사 후배가 많이 취해서."

"많이 취해서?"

"호텔에서 재워주고 있었어요."

"호텔에서? 재워주고? 있는 중이다?"


지나가 한 단어씩 곱씹듯이 말을 이었다.


"그 여자는 뭐해요? 설마... 샤워라도 하나요?"

"그게..."


독영이 말을 이었다.


"네. 그게 그러니까, 샤워 중... 이죠"


수화기 반대편에서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긍정적인 부분을 찾자면, 같이 샤워하는 걸 방해 안 하게 돼서 다행이네요. 앞으로 어쩔 생각이죠?"

"어쩌냐고요... 나는"


그는 소파에 앉았다. 머리를 감싸 쥔다.


"지나 씨가 걱정됐어요. 계약담당자인 티가 어제, 아니 이젠 오늘이군요, 좋아하는 사람에게 고백을 해야 계약진행이 가능하다고 했고..."

"그래서 호텔에 왔고 샤워를 하고... 결국 고백은 했나요?"

"그게... 비슷해요... 좋아한다고 했어요."

"와우!"


그녀는 감탄의 느낌이 전혀 없는 감탄사를 내뱉었다. 수화기 너머에서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 같은 것이 희미하게 들려왔다.


"전혀, 뭘 상상하는지 모르지만 그런 게 아니에요. 후배는 오늘 남자친구 음악회가 엉망이 돼서, 술을 많이 마셨고 상처받아 만취한 사람과 밤을 보내고 연인이 되는 건... 지나 씨 말대로 관리된 기억도 아니고, 무엇보다 이런 식으로 시작하고 싶진 않아요."

"결론은, 고백은 했지만 아직 아무 일은 없었단 얘기 같군요."

"... 비슷하죠."

"계약 사전조건을 이행했을 뿐인데 왜 변명하듯 말하죠. 초독영씨"


독영은 지나의 질문을 생각해봤지만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잠시 후, 전화기 너머의 키보드 소리가 사라지고 휴대전화로 메시지가 오는 진동이 들렸다.


"오늘 예술의 전당 프로그램 확인해 보느라 늦었네요. 지금 시간이 없어서, 사전 조건 달성 이후의 구체적인 지시를 하면 좋겠지만 일단 메시지에 있는 내용으로 대화해 보세요. 최대한 진심을 담아서... 보통 여자라면 엄청난 상처가 되겠지만, 압도적으로 예쁜 여자들은 연애 문제에 있어서 거부당한 적이 없어요. 그래서 오히려 운이 좋다면 독영씨 행동에 긍정적인 마음을 가질 수 있어요."

"일단 만나서 얘기해요. 계약 외에도 꼭 묻고 싶은 것들이 있어요."

"아뇨. 이제부터 잘 들으세요. 지금 할 일은, 메시지에 있는 대로 후배를 달래주고 호텔을 나와 집으로 가는 거예요. 그리고 지리산 백패킹 정도에 맞는 짐을 챙기시고 아침 전에는 집을 떠나야 해요. 출근도 하면 안 되고요."

"그게 무슨... 연애를 위해 지리산 전지훈련이라도 가는 건가요?"

"호오라. 초절정 미녀에게 고백하는 미션을 성공하시더니, 유머 아이템을 획득하셨나 봐요. 상황 자체는 별로 맘에 들진 않지만 뭐, 유머는 맘에 드네요. 진짜 유머는 위기에서 빛을 발하는 법이죠."

"..."

"미안해요. 독영씨. 더 얘기하면 좋겠지만... 어떤 일이 생기든 의도한 건 아니란 걸 믿어주세요. 피해가 없도록 정상으로 되돌려 놓기 위해 최선을 다할 거예요."

"무슨 피해요? 정상이라 해도 역시 현상적인 정상이겠죠? 초코무스케이크가 안전한 것처럼?"

"하아. 네. 솔직히 말하면, 그 정도가 최선이에요."

"... 폐기 때문에 그런 건가요?"

"그것도 그렇지만... 회사 전체가 폐기 단계로 들어갔어요. 물론 형태는 다르지만 폐기 시의 행동요령은 같아요."

"행동요령이요? 무슨 말이죠?..."


지나가 말이 없자 그가 말했다.


"어쨌든 집을 나왔다치고.... 어디로 가면 되죠?"

"보통의 경우라면 태풍이 지나갈 때까지 피해 다니는 게 전부예요. "


지나는 단호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는 그녀의 목소리를 기다렸다.


"독영씨는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특별한 사람이에요."

"뭐라고요, 잠깐!"


그녀는 그의 말을 끊고는 차갑고 냉정한 목소리로 힘줘 말했다.


"저를 찾아오세요."


'딸깍'


전화는 갑자기 끊겼다. 재발신 버튼을 눌러봤지만 '없는 번호'란 안내만 나올 뿐이었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다. 나에게도 지나에게도. 하지만 짐작조차 할 수 없다.'


지나가 보낸 메시지를 확인했다. 별다른 지시나 설명은 없었다. 그저 두 명의 피아니스트에 대한 이야기를 써 보낸 게 전부였고, 글 아래에는 연주곡이 링크되어 있었다. 거실에서 한서를 기다리는 동안 몹시 외로운 기분이 들었다.


뜨거운 샤워를 마친 한서가 코끝이 빨개진 채 거실로 나왔다. 그녀는 부끄러운 듯 거실 불을 껐다. 야경의 희미한 불 빛만이 빛나고 있었다. 그녀는 아마도 젖은 머리에 샤워가운만을 입고 있었던 듯하다. 그리고는 소파에 정물처럼 허리를 꼿꼿이 펴고 앉아 있다가 갑자기 그를 끌어안았다. 한서에겐 잠이 찾아올 듯한 따뜻함이 있다고 느꼈다. 세상이 무너져도 그녀를 안고 있다면 따뜻한 온기 속에 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한서를 바라봤다. 희미한 명암 속에서도 눈물 때문에 빨개진 코끝과 뺨의 홍조가 느껴졌다. 그녀는 말없이 그의 손가락을 만지작 거렸다. 정적을 깨고 독영이 말했다.


"내 손이 라흐마니노프가 아니라, 글렌 굴드의 손이었으면 좋겠어."

"...?"

"친구가 보내준 글을 봤는데, 라흐마니노프는 큰 키만큼 긴 손가락을 가지고 있어서 자신만 연주할 수 있을 법한 곡을 썼대. 그런데 글렌 굴드는 연주 전에 손을 따뜻한 물에 담갔다는군."


그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내 손은 언제나 차가워. 그래서 먼저 누군가가 따뜻하게 다가오길 기대했는지 몰라."


한서가 독영을 올려다봤다.


"물에 손을 담그면 따뜻함은 흉내 낼 수 있으니까..."


그는 손을 올려 한서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상처를 안 보이게 덮는 큰 손보다, 춥지 않게만이라도 해주고 싶어."

"..."

"아픈데 춥기까지 하면 최악이니까."

"... 선배는... 이상해."


한서는 독영의 손을 끌어내려 잡았다.


"나... 샤워하면서 술이 깨버려서... 엄청 부끄러운데... 하나도 부끄럽지 않게 해 주네."


독영은 지나가 보내준 글렌굴드의 명반,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머리맡의 블루투스 스피커를 통해 플레이했다. 창문을 타고 흐르는 빗물을 악보에 얹어 놓은 듯했다. 아름다운 피아노 소리가 방안을 감쌌다.


"선배, 내일 날이 밝아도.. 우리 괜찮겠지?"

"응."

"서로 멀어지는 거 아니겠지?"

"그래.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어. 내 손이 다시 차가워지는 것 말고는 말이야."


한서는 살짝 웃었다. 안심한 듯 독영의 손에 가볍게 키스했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나 술 때문인지 너무 졸려. 춥지 않게 해 줘."


한서의 몸을 따뜻하게 안아주자 이내 편안한 표정이 되었다. 잠시 후 그녀는 깊은 잠에 들었다. 상처받은 아름다운 여성을 품에 안고 빗방울이 맺히기 시작한 창밖을 바라보며 피아노 독주를 끝까지 들었다.


음악이 끝난 뒤엔 거실에서 조용히 술병을 정리했다. 침실에선 한서가 벗어놓은 옷을 침대맡에 가지런히 개어 놓은 다음, 그녀 구두에 묻은 먼지를 옷소매로 닦아 주었다. 방을 나가기 전, 거위털 충전재가 들어간 이불을 덮어주고 한서를 위해 메모를 남겼다.


비 내리는 새벽녘, 호텔 밖을 나섰다. 여명을 가린 어둠의 구름을 사이로 환청처럼 꿩의 울음소리를 듣는다. 그는 친구의 병원이 있던 야산과 송아지가 파묻힌 농장의 야산에서 울던 꿩소리를 함께 떠올렸다.


'두 곳은 멀지 않다.'


비를 맞고 하늘을 올려다 보며 지나가 남긴 말을 떠올렸다.


"독영씨는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특별한 사람이에요.", "저를 찾아오세요."


그는 어둠의 거리를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keyword
월, 화, 수, 목, 금, 토, 일 연재
이전 17화별이 빛나는 밤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