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집으로 돌아온 독영은 지나의 지시대로 등산용 가방 안에 빠르게 짐을 챙겨 넣는다. 옷은 물에 젖지 않도록 비닐봉투로 두 번씩 감았다. 휴대용 전원과 노트북을 챙기고 가방의 지퍼를 잠갔다. 준비는 끝났다. 소파에 걸터앉아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다시 들으며 천천히 방 안을 둘러봤다. 문득 부모님과 마지막으로 찍은 어린 시절의 사진 액자가 보였다. 그는 액자에서 사진을 뺀 뒤 품 안에 넣었다.
'돌아가신 부모님은 20년 뒤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빠지게 될 아들의 모습을 상상이나 하셨을까?'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와 시동은 켜지 않은 채로 시트에 앉았다. 매니저인 지나를 신뢰한다고는 해도 외로움 컨설팅 주식회사란 이상한 단체의 지시에 따라 막무가내로 도망을 다니는 건 합리적인 태도가 아니었다. 그는 운을 시험해 보는 사람처럼 출발선에서 총성이 울리기를 기다렸다.
잠시 후, 전화가 울렸다.
"선배님. 접니다."
뜻밖에 지난번 만나 추파카브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던 기자의 전화였다.
"아침 일찍이라 미안합니다. 급한 일 때문에..."
"괜찮아요."
"어제 감사부에서 제게 이것저것 묻길래 뭔가 이상해서 알아보고 있었어요."
"아, 저도 어제 퇴근 즈음해서 감사부와 통화를 했어요. 그쪽에도 뭔가 확인할 게 있었나 보네요."
"그게... 괜찮으신가 해서요."
"괜찮냐니...?"
기자는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그 역시 이례적인 감사부 연락이 이상하다고 느끼고 새벽 당직반으로 경찰서를 돌며 취재를 하다가 '주가 조작 사건' 관련 첩보를 접했다고 했다. 방송사 직원이 연루된 공매도 세력이 제약 회사의 신약 개발 실패 가능성 기사를 막았다는 내용이라고 했다. 유진은 추파카브라 기사와 함께 잘려나간 경제 관련 단신 뉴스를 떠올렸다.
세력은 시간이 밀려 해당 뉴스가 잘려나간 다음날, 그것을 출발 신호로 받아들인 듯 대량의 공매도를 했다고 한다. 장 마감이 돼서야 해당 회사에 공매도 폭탄이 떨어졌다는 뉴스가 나왔다고 한다. 주식 찌라시에는 이 사건에 대해 특정 세력이 신약 개발 실패를 미리 알고 방송사 직원을 매수해 전날 뉴스를 삭제했다는 내용이 실려있었다. 당연히 제약회사 주식은 폭락했고 공매도 세력은 엄청난 이익을 봤다고 전했다.
"뭔가 오해가 있는 거겠죠. 단순히 운행이 밀렸을 뿐인데..."
"그럴 수도 있죠. 그런데 세력이 모인 것으로 알려진 텔레그램 캡처 이미지가 증거처럼 함께 돌고 있습니다."
"캡처 이미지?"
"당일 16시 뉴스 운행을 밀리도록 만들어 뉴스를 막을 꺼라면서 저희 방송 운행표 이미지가 나와요... 그리고..."
"..."
"선배님 이름이 등장하죠."
"내 이름!?"
"아... 역시 모르고 계셨나요?"
독영은 시트 뒤로 머리를 뉘었다. 의도한 건 아니고, 피해가 없도록 정상으로 돌려놓겠다는 지나의 말을 떠올렸다.
"그런데 혐의를 받고 있는 사람에게 이렇게 전화해도... 괜찮겠어요? 나중에 곤란 해질 텐데..."
"그게, 모함일 수 있으니 너무 겁먹지 마시고 성실히 수사에 협조하시라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오전에 시경캡에게 정보 보고도 해야 하니까 취재 목적도 있고요."
독영은 수사기관에 통화기록과 내용이 발각될 때를 대비한 기자의 재치 있는 답변이란 걸 알고 있었다.
"사실 어제 감사부 전화에서 금감원과 수사기관 단어까지 나오길래, 쌔한 느낌을 받았어요. 짐도 이미 싸서 막 떠나려는 참이었고요."
"혹시 도주.... 한단 말씀인가요? 그럼 바로 영장 칠 텐데..."
"해야 할 일이 있어서요. 게다가 무고한 사람을 궁지에 몰 정도 세력이면, 내가 모르는 계좌로 돈도 잔뜩 넣어놓았을지도 모르죠. 수사나 재판 과정에서 혐의를 뒤집어 씌우는 것도 어렵진 않을 거예요."
독영은 차에 시동을 걸고 기어중립 상태에서 액셀을 몇 번 밟으며 큰 소음을 일으켰다. 미리 정보를 알려준 기자가 고마웠다. 가급적 통화 전에 계획된 도주임을 확실히 암시하려 했다.
"선배님, 그러시면 곤란해지실 거예요. 수사에 협조하시면 제가 돕겠습니다."
"그나저나... 추파카브라 말이에요."
"네... 네?"
독영은 천천히 핸들을 꺾어 주차장을 나왔다.
"난 믿어요. 유니콘도, 귀로 날아다니는 코끼리도.... 신뢰할만한 사람이 봤다고 하면 믿을 거예요."
그는 도로로 나오자 액셀을 밟았다.
"믿는다는 건 머리가 아니라..."
"..."
"마음의 문제니 까요."
그는 마지막 말로 기자에 대한 고마움을 표하고 전화를 끊었다. 회사에는 모바일 인트라넷을 이용해 장기휴가를 낸 뒤, 유심을 빼고 전원을 끈 뒤 조수석에 휴대폰을 던졌다. 수사기관과 지리한 서류 작업을 함께하기엔 시간이 아까웠다. 결과도 통화에서 말 한대로 흘러갈 것이다.
운행시간이 밀린 것을 변명하기 위해선 한서를 포함한 기자, 엔지니어 등 많은 사람들을 거론해야 한다. 게다가 수상쩍은 돈이 입금된 계좌라도 발견된다면 궁지에 몰릴게 뻔했다. 무엇보다 영장이 나와 유치장에 들어가 버리면 유일한 친구인 종욱을 찾는 것은 아예 불가능해진다.
그는 와이파이가 되는 인근 카페를 찾아 주차했다. 근처 ATM기에서는 계좌 상태를 확인했다. 다행히 수상한 곳에서 입금된 내역은 없었다. 그는 넉넉하게 현금을 뽑았다.
'약을 끊은 뒤 심해진 강박과 빛의 등장은 어떤 의미일까?'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것은 부모님의 죽음과 동시에 일어났던 것과 동일한, 기억 상실의 전조일 수도 있다. 하지만 긍정적으로 보면 기억을 되찾을 수 있는 계기일 수도 있다. 최근 빛을 보게 되면서 뇌 회로의 논리가 또렷해짐을 느꼈다. 분위기를 풀어줄 유머감각도 생겼다.
빛을 본 상황들을 떠올려 본다. 그것은 설계사 영선과 함께 있던 밤, 종이에 그려놓은 정보를 큐빅 맞추듯 가상의 공간에서 조립했던 신비한 경험, 그리고 한서에게 따뜻함을 느끼던 순간이었다. 마치 고승의 화두가 '번쩍'하듯 이미지가 떠올랐고 연달아 푸른빛의 입자를 본 것이다.
'꿩소리, 어쩌면 송아지가 죽은 농장과 종욱의 병원은 연결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그는 카페를 나와 병원 뒤 야산으로 내비게이션을 설정하고 차를 몰았다.
'주가 조작 사건, 지나와 외로움 컨설팅 주식회사란 곳도 연결되어 있는 것일지도.'
지나가 나타난 뒤로 이상한 사건이 연이어 벌어졌음을 떠올렸다. 그렇다면 매니저 지나의 회사가 폐기 단계에 들어간 이유 역시 수사기관의 움직임 때문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지하 데이터센터와 첨단 설비를 운영할 정도의 강력한 기술과 정보력을 갖추고 있으니 독영을 희생양 삼아 사건을 조작하는 것 역시 어렵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왜 자신이어야 하는지 의문이 남았다. 지나는 분명히 신뢰할만한 사람이었다. 추파카브라든, 하늘을 나는 코끼리든 믿을 수 있다. 그렇다면 지나도 계약 담당자 티와 같은 냉혈한이 득실대는 회사에 의해 이용당하다가 곤경에 빠진 것일지 모른다.
병원 야외 주차장에 주차를 했다. 차에서 나와 꿩소리가 들렸던 방향으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가파른 각도여서 물을 챙겨 오지 않았음을 후회했다. 한 시간여를 헤매다가 정상에 오르자 시원한 바람이 이따금 불어와 땀을 식혀줬다. 그는 탁 트인 정상에서 지형을 살폈다. 예상대로 뉴스에서 봤던 한우농가와 같은 오렌지색 지붕을 발견했다.
비가 온 뒤 미끄러워진 야산의 비탈을 구르듯이 내려왔다. 축사에는 붉은 페인트로 쓴 경고문이 붙어있었다.
외부인 절대 출입금지! 전염병 발병 시 고소하고 손해배상!
그는 농가로 가서 문을 두드려봤으나 커다란 개 두 마리만 맹렬히 짖을 뿐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동네를 한 바퀴 돌아봤다. 논밭이 펼쳐져 있고 군데군데 소를 키우는 축사들이 모여 있는 작은 시골 마을이었다. 마을 초입에 문이 열린 오래된 구멍가게가 보였다.
"실례합니다."
구멍가게 안, 방에 누워있던 주인 노파가 흘끔하더니 다시 TV로 시선을 돌렸다. 유진은 물과 함께 가게에서 제일 비싸 보이지만 자욱한 먼지가 내려앉은 홍삼음료 세트를 집어 들었다.
"산비탈 바로 밑에 농가에는 아무도 없나요?"
"워디?"
"주황색 지붕집이요."
"아... 박씨네... 에혀. 그 냥반 또 싸우러 갔겄지. 이장이며 군수며 농협이며 아주 허구헌날 주변사람 괴롭히는 게 일인 사람이니께."
"소가... 자꾸 죽는다던데..."
"소 죽는 거야 뭐 소 키우는 사람이면 하루이틀 봐. 짐승이 그럴 수도 있고... 그런데 그걸 기냥 누가와서 죽였네, 약을 탔네, 주사를 놨네...쯔쯧."
노파는 뒤늦게 독영의 질문이 이상했다고 느꼈는지 고개를 돌려 말했다.
"근디 뭔 일이여? 박씨를 찾게..."
"아닙니다."
독영은 현금을 꺼내 계산을 치렀다. 거스름 돈을 꺼내주던 노파는 멈칫하더니 갑자기 그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총각은 서울에서 온 거여?"
"네..."
"그럼... 뭐시냐... 이거... 뭔지 알겄어?"
노파는 그를 향해 주먹을 쥐었다 가위를 내는 걸 반복했다.
위험에 빠져있다면 주먹다음 가위를 내세요.
"...!!!"
독영은 노파의 손짓이 지나가 보낸 메시지임을 알아차렸다. 노파가 돈통의 돈다발과 담뱃갑을 집으며 말을 이었다.
"며칠 전에 쬐끄마하고 아주 예쁜 아가씨가 와서, 허리 아파 못올리던 짐도 옮겨주고 그렇게 싹싹하게 도와주더니... 서울에서 훤칠한 남자가 오면 주먹과 가위를 내달라고 부탁하는 겨. 그러마!하고 돌아보니 돈을 이렇게나 많이 놓고 갔는디 영 부담시러워서... 이게 뭔 뜻인지 알거라 했는디 어찌 알겠는가?"
노파는 자신이 쥐고 있던 담배를 독영에게 건넸다.
"88담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