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매니저 지나는 명백한 구조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단서는 8이란 숫자가 강조된 담배였다. 독영은 담배를 챙겨 가게에서 나와 조금 전 넘어온 산길 대신 농수로로 돌아 병원주차장으로 향했다. 그는 줄곧 8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반복되는 8이란 숫자는 90도로 회전시키면 무한 기호(∞)와 관련이 있음을 떠올렸다. 종욱의 88 담배, 그리고 송아지에 새겨진 코흐 눈송이 안의 8이란 숫자 모두 눕히면 무한대 기호가 된다. 그리고 이어 지나의 별모양 금색 귀고리와 그녀가 남긴 888이란 메시지를 떠올렸다. 플랜트 설계사는 지난밤 그에게 별모양은 프랙털 구조를 상징한다며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신기한 점은 직선에서 시작했으니 분명 해당 직선의 길이를 구할 수 있어야 하는데, 면적은 유한한 영역에 존재하지만 눈송이의 둘레 길이는 자기 복제를 하기 때문에 무한으로 발산해서 정확한 수치를 구할 수 없게 돼요.
"유한한 영역에 존재하는 무한?"
코흐의 별과 무한 기호(∞), 그것은 유한한 세계에 존재하는 영원이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됐다. 하지만 이들 개념이 그 밖의 사건들, 예를 들어 운행이 밀리고 그것이 주가조작의 신호가 되어 제약회사 주가가 폭락한 것과는 어떤 관련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다시 종욱이 있던 병원 주차장에 도착한 그는 차에 시동을 걸기 전 핸들을 잡고 심호흡하며 주변을 살폈다. 점심시간이 끝나가는 병원 정원은 여느 때와 같았지만 미묘한 변화가 느껴졌다. 간병인과 가족들이 요양 중인 노인을 데리고 산책하는 모습이 유난힌 많아 보였다. 전과 달리 휠체어를 탄 노인이 별로 없고 모두가 조금씩이라도 걸으려 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독영은 병원을 떠나기 전, 안면이 있는 담당 간호사에게 전화를 해서 종욱과 관련한 소식이 있는지를 물었다. 간호사가 답했다.
"그게... 독영씨께서 다녀가시고 난 뒤, 종욱 선생님의 퇴사 서류가 우편으로 도착했어요."
"우편으로? 병원 측에서 실종신고나 그런 건 따로 안 하셨나요? 종욱에겐 가족이 없어서, 안 했다면 저라도 신고를 하겠습니다."
"그게, 실종신고는 이해관계인이어야 가능하다고 해요. 우리 병원 쪽에서 신고를 할까도 고민했는데, 갑작스럽긴 하지만 퇴직의사가 담긴 서류를 접수했고 친필 서명과 본인 인감도장 등 형식상으로나 금전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으니까..."
"친구 말로는 제약회사에서 수주받은 연구가 있다던데요?"
"저희 병원 원장님께서 종욱 선생님 모셔오시면서 병원과 무관하게 독립적인 연구활동 지원을 보장하셔서 병원 측은 잘 알지 못하는 걸로 알고 있어요. 게다가..."
"게다가?"
"종욱 선생님 자리는 이미 다른 선생님이 맡게 되셨어요."
"그렇게 빨리요?"
"네... 노인요양병원이라 공석으로 오래 비워둘 수 없거든요."
"... 그렇군요."
독영은 전화를 끊으려다가 확인해 보듯 물었다.
"산책하는 분들 중에 휠체어 탄 환자분들이 별로 안보이시던데..."
"아... 네... 그게... 새로 오신 선생님께서 처방을 바꾸셔서... 아... 잠깐만요."
전화 너머로 누군가 지시하는 소리가 들렸다. 병원 내 정보를 아무에게나 알리지 말라는 훈계였다. 독영은 간호사를 위해 전화를 끊었다. 그는 단서를 해결할 시간이 별로 없다고 직감하고 있었다. 약을 끊은 후 나타나는 이상증세는 과거 부모님의 사고처럼 결국 기억상실로 끝나게 될지 모른다. 그 미지의 데드라인이 닥쳐오기 전에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친구인 종욱을 찾고, 매니저 지나를 구하고, 주가 조작 공범이라는 누명을 벗어야 한다. 조력자가 필요함을 절감했다.
서울 시내 한복판에 있는 고층 건물로 향했다. 차는 건물로부터 멀찍이 떨어진 인근 기사 식당 주차장에 대놓고 식사를 했다. 그리고 퇴근시간을 기다렸다. 정각 6시가 조금 넘자 건물에서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는 에어컨 실외기 근처에 서 있다가 모자를 눌러쓴 채 한 여성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영선 씨!"
"어멋."
"저예요. 독영."
설계사는 커진 눈으로 위아래를 살폈다.
"놀라게 해서 미안해요. 저쪽으로 잠깐 걸어주세요."
"네? 왜 저쪽으로?"
독영은 고개를 들지 않고 CCTV를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서부터 저기 실외기까지가 사각지대거든요."
그녀는 잠시 주춤거리다가 순순히 그를 따라가며 말했다.
"독영씨는 사람을 놀라게 하는 능력은 확실하네요."
"어떤 능력엔 반대급부가 생기는 법인가 봐요. 농담 기능과 함께 누군가를 놀라게 하는 기능이 생기고 말았어요. 시리얼과 우유처럼."
그녀는 어이없는 표정을 짓다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데 이번엔 도망자 모드인가요?"
"그런 셈이에요. 저를 만난 걸 가급적 수사기관이 모르는 게 피해가 덜 갈 것 같아 직접 찾아왔어요."
그녀의 표정이 잠깐 심각해지는 듯하더니 입을 열었다.
"이것도 농담인가요, 아니면 도움을 요청하는 건가요?"
"네. 면목없지만."
"휴우. 좋아요. 근처에 CCTV라곤 없는 오래된 전통찻집이 있어요."
찻집은 허름했지만 편안한 분위기였다. 워낙 오랜 골목길에 위치하고 있는 데다가 40년은 훌쩍 넘어 보이는 찻집이었던 터라 카메라는 보이지 않았다. 두 사람은 유자차와 대추차를 각각 시켰다. 설계사가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오늘 오전과 오후에 전화를 했었어요. 전화기가 꺼져있어서 조금 걱정하고 있었어요."
"전화를? 영선 씨는 정말 친절하신 분이네요."
"독영씨..."
"네?"
"보통의 여자는 아무리 친절해도, 한 두 번 만난 수상한 남자를 걱정해서 안부 전화까지 하진 않아요."
"안부 전화를 하지 않는군요... 아무리 친절해도."
"네."
"그럼 왜..."
"하아."
설계사는 포기했다는 듯이 낡은 찻집 한가운데 놓인 스투키를 바라봤다. 그리고 안심이 된 듯한 표정으로 그의 얼굴을 살폈다.
"표정이 오히려 더 밝아진 것 같은데, 도망자라니 이상하네요."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는데 작은 호의로 세상이 유지된다는 말에 용기를 냈어요. 물론 조금이 아니라 큰 신세가 될지도 모르지만요."
독영은 그간 있었던 사건들과 자신의 해석을 대략적으로 전했다. 모르는 편이 더 안전할 것 같아서, 지나나 한서에 대한 이야기는 최소화했다. 설계사는 골똘한 표정으로 중간중간 고개를 갸웃하며 머리를 뒤로 묶었다. 그는 그녀의 하얀 목덜미가 유난히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고 있다고 느꼈다.
"그러니까 독영씨 집에서 본 송아지처럼, 반복되어 나타나는 숫자 8의 상관성과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을 엮어서 추론하고 있는 거네요?"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유자차를 마셨다. 설계사가 말했다.
"일이 더 커지기 전에, 약을 다시 먹고 경찰에 신고하는 게 맞지 않을까요?"
"해보다 안 되면 그렇게라도 할 생각이에요. 하지만 주가조작 용의자이자 정신과 약을 먹는 환자로 특정된 상황에서 경찰을 상대로 이런 이상한 상황을 설득할 자신도 없고, 약을 먹든 안 먹든 기억상실은 언제든 닥쳐올 거란 느낌이 들어요."
"그냥 과도한 상상 아닐까요?"
"그럴 수도 있죠."
그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저는 어린 시절 기억이 없어요. 부모님이 사고로 돌아가신 시점에 즈음해서 깡그리 기억을 잃었어요. 실종된 의사 친구 말로는 성인 ADHD가 아니고 자폐스펙트럼이 거의 없는 어떤 걸 의심한다고 말했었는데, 그 말과 달리 자폐성향의 찌꺼기가 내면에 가라앉아서 이런 망상을 계속하는 것일 수도 있죠. 어쩌면 그래서 더욱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어요. 망상인지 아니면 계속 추적을 해나가며 사건을 해결해야 할지..."
"잠깐, 자폐스펙트럼이 거의 없는 어떤 거...라는 게 무슨 뜻이에요?"
"그게... 친구 말로는... 순수한 의미의 천재가 아닐까...라고."
설계사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머리를 저었다. 그는 빠르게 사과했다.
"미안해요. 이것도 웃기긴 하지만 농담은 아니고요, 의사인 친구 말을 그대로 전한 건데..."
"독영씨!"
"네. 네?"
"좋아요. 속단하진 않을게요. 그럼 천재란 걸 증명해 봐요."
"지금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바라봤다. 독영은 머뭇거리며 말했다.
"저희 집에 오셨을 때, 냉장고를 공격한 날이요. 마음이 안정돼서였는지 제 방에 있는 동안 선명한 빛의 물결을 봤어요. 그 이미지들을 마음대로 조립하고 다룰 수 있었죠. 그 빛이 천재성의 발현 같은 건진 모르겠지만 적어도 어떤 능력일 것이라 생각해요. 물론 근거는 없고 느낌뿐이에요. 다만..."
"...?"
"공교롭게도... 제가 호감을 갖고 있는 여성들과 있을 때 주로 발현이 된단 거예요."
"여성... 들?"
"그게, 그러니까, 영선 씨가 오해하는 그런 뜻은 아니고요. 구조신호를 보낸 매니저 지나 씨가 느닷없이 안아왔을 때랑, 후배를 호텔에서 재워줄 때도 빛을 봤거든요."
"와우~"
설계사는 입을 살짝 벌린 채 감탄하는 표정을 지었다.
"저랑 소개팅했던 시점에 이런저런 예쁜 여자들과 그랬다는 말씀인가요?"
"그게 갑작스럽게 그렇게 돼서... 그리고 예쁜 여자라곤 안 했는데..."
"안 예뻤어요?"
"아, 그게... 두 분 다 예뻐요..."
"예뻐요?"
"무척"
"무척 예쁘다."
설계사는 결국 황당한 듯 웃음을 터트렸다.
"독영씨는 정말 이상한 사람이네요."
"미안해요. 말하고 나니 저는 확실히 이상한 사람이군요."
"이런 이야기를 겨우 두 번 만난 소개팅 상대에게 했다간 뺨을 맞을 거예요. 신고를 당하든지."
"맞아요. 정말이지 무례한 소리를 했네요. 오늘 그냥 말을 들어준 것만으로도 고마워요. 이 일은 어떤 식이든 제가 해결해 볼게요."
독영은 자신의 처신을 자책하면서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났다. 현금을 카운터에 두고 부끄러운 듯 서둘러 찻집을 나서려 했다. 그때 그녀가 찻집 문을 연 채 말했다.
"독영씨, 어서 나와요. 정말로 천재인걸 확인해 봐야죠. 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