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설계사의 안내에 따라 굽이굽이 좁은 골목길을 따라 도착한 곳은 코인 노래방이었다. 독영이 멈칫해서 간판을 올려다보자 설계사는 그의 팔을 끌고 노래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자판기에서 보리차와 이온음료를 뽑은 뒤, 지폐교환기에서 만원 짜리를 꺼내 천 원으로 바꿨다. 그런 다음 복도 끝방으로 가서 문을 열었다.
"노래를 천재적으로 잘하는 편은 아닌데."
독영의 농담을 무시한 채, 설계사는 천 원을 넣은 다음 팝송 메들리를 선곡했다. 그리고 음악소리가 나오자 독영의 귀에 소리치듯 말했다.
"독영씨를 추적 중인 경찰에게는 의외의 장소여야 하고, 밀폐돼서 독영씨가 난동을 부려도 괜찮은 곳, 언제든 뛰어나가서 신고나 도움을 청할 수 있으니 저에게도 안전한 장소, 이 세 가지를 만족하는 조건은 이곳뿐이에요."
"늘 꼼꼼하시군요. 감탄했어요."
"설계사는 언제 있을지 모를 클라이언트의 변덕이나 설계 변경에 대비해야 하니까요."
"플랜 B"
"맞아요."
그녀는 거의 소리를 지르는 수준이었다. 독영은 가까이서 투명한 갈색으로 아름답게 빛나는 그녀의 눈을 보며 말했다.
"누군가 말했어요."
"뭐라고요? 음악 소리 때문에 안 들려요."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마이크를 뽑아 그의 손에 쥐어줬다. 마침 노래방 기계에선 'love me tender'가 구슬프게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는 마치 노래 간주에 맞춰 대사를 하는 밤무대 가수가 된 듯 말을 읊조렸다. 에코 때문에 웅웅 말소리도 울렸다.
"낯선 장소에 있을 땐 그곳을 잘 아는 사람을 자연스럽게 의지하게 된다고요. 부모님에 대한 기억은 사라지고 없지만 아마도 엄마와 함께 있을 때 이런 느낌일 것 같아요."
"든든하단 말씀?"
"든든해요."
"하지만 난 독영씨 엄마가 아니에요."
"엄마는 아니죠."
구슬픈 엘비스 프레슬리의 노래가사가 화면에 떠올랐다.
러브미 텐더 러브 스위트, 네버 렛미 고우
(나를 부드럽게 사랑해 줘요. 다정하게 대해줘요. 날 버리지 말아 줘요.)
설계사는 화면을 보면서 말했다.
"소개팅으로 만난 남자에게 엄마랑 있는 것처럼 든든하다란 말을 듣는 여자가 되다니..."
그녀는 어느새 음악을 타는 듯 고개와 다리를 까딱하면서 말을 이었다.
"바이올린 레슨까지 받아가며 귀하게 자란 외동딸이 회사에선 작업자들에게 욕을 하고, 치열한 연애 시장에선 엄마 취급을 받는 걸 알면, 아무리 온화한 우리 부모님이라도 까무러치실걸요?"
독영은 또다시 사과하려 했지만 그녀는 콧노래를 섞어서 'and we'll never part(우린 절대 떨어지진 않을 거예요)'를 따라 부르며 말했다.
"좀 시끄럽긴 하지만 언제든 편할 때 시작해 보세요... 빛을 보고 천재가 되는, 그거요."
독영은 마음을 가다듬고 심호흡했다. 눈을 감기 전에 마지막으로 설계사를 바라봤다. 그녀는 화면의 이미지를 보며 여전히 노래 가사를 읊조리고 있었다. 그 역시 음악의 멜로디를 따라가며 방에서 했던 것처럼 숫자와 사건들, 이미지의 조합을 떠올렸다. 한동안 좀처럼 집중할 수 없었다. 그때 설계사가 그의 손을 잡아줬다. 부드럽고 한 없이 따뜻한 손이었다. 그 손에서 뻗어 나온 작은 빛의 무리가 순식간에 그를 집중된 상태로 이끈다.
노랫소리가 점점 아득해지기 시작한다. 시야는 조리개를 닫는 것처럼 작은 원통모양으로 줄어들더니 이내 완벽한 어둠이 찾아왔다. 그는 정적이 흐르는 꿈속을 걷기 시작했다.
뜻밖에도 어린아이가 보인다. 그 아이는 몹시 불안해하고 있다. 분리불안을 겪는 아이처럼 떼를 쓴다. 젊은 부부는 웃으며 아이를 할머니와 할아버지에게 안아서 넘긴다. 엄마아빠와 떨어지기 싫어 발버둥 치는 아이를 간신히 달래서 소파에 눕힌다. 울다 지친 아이는 그렇게 잠이 들었고, 잠시 후 세상은 갑자기 붉은빛으로 변한다. 깊은 잠에서 깬 아이는 이미 모든 걸 알고 있는 눈빛이다.
어린아이로서는 감당 못할 거대한 슬픔의 파고가 밀려오고 뒤, 이어서 덮쳐온 죄책감과 자기혐오일지 모를 감정의 소요가 쓸어버리듯 아이의 마음을 해친다. 놀랍도록 발달된 직관화된 공감각적 사고는 아인슈타인이 밝혀낸 시간의 동시성이란 환상을 뛰어넘는다. 미래를 이미 본 아이는 불행이 닥쳐옴을 알고 있음에도 부모님을 지키지 못했다는 사실, 교통사고를 방조했다는 심한 자책으로 괴로워한다. 심한 발열과 경련이 뒤따랐고, 끝없는 잠이 이어진다.
아이의 몸은, 장기 기억을 저장한 대뇌피질 시냅스를 끊어낸다. 그건 심적 충격에 대응하기 위한 생존의 방편이었다. 즉 내적 사고시스템을 재조합함으로써 기억, 감정, 다정다감한 성격도 단절될 수밖에 없었다. 아이는 두 세계 중 하나를 선택함으로써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질서가 있어 예측가능한 세계를 선택함으로써 다시는 그런 지옥을 겪지 않는 길을 택했다.
멀리서 작은 개똥벌레 같은 불빛이 날아와 그의 손바닥에 앉는다. 슬픔이 찾아왔다. 동시에 서서히 시야가 밝아오기 시작한다. 아이유가 다시 부른 '사랑이 지나가면'의 멜로디가 귀에 들어온다. 어디선가 다가온 따뜻한 손이 그의 뺨을 닦아준다. 그리고 그의 머리를 가만히 품에 안아 준다. 그녀의 부드러운 가슴과 은은한 여인의 향기가 독영의 존재 전체를 위로한다. 그는 따뜻한 엄마 품에 안긴 아이처럼 멈추지 않고 눈물을 흘렸다. 설계사는 온몸으로 그를 안은채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좋은 사람은 울어도 돼요. 눈물도 좋은 사람을 위한 것일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