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어두워진 밤하늘 아래, 청계천을 오가는 외국인들이 보인다. 하천 중앙 너머에는 길게 목을 뺀 왜가리 한 마리가 물고기를 잡으려 수면을 경계하고 있었다. 독영은 설계사와 아이스커피를 든 채 경계석에 앉아 왜가리를 보고 있었다.
"왜가리는 무슨 생각을 할까요?"
그녀의 물음에 독영이 답했다.
"전에 읽은 박쥐가 된다는 건 어떤 것일까? 란 논문이 떠오르네요. 과학적 환원주의를 비판한 글이었죠 "
설계사는 무릎을 감싸고 독영을 바라봤다.
"그런 논문을 다 기억해요?"
"1980년 물리과학호 저널에 발표한 토마스 네이글 논문."
그녀는 감탄한 듯 '와'라고 짧게 말했다.
"아까 노래방에서 뭔가 달라진 걸 느꼈어요. 어린 시절 기억이 조금씩 되살아나면서 과거에 읽은 책이나 공부했던 게, 검색창에 단어만 치면 결과물이 나오듯 떠올라요."
"정말 천재가 된 걸까요?"
그가 처음으로 작게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
"사람은 누군가의 생각을 알기 위해 뇌과학이나 신경생리학 같은 학문을 만들었어요. 생각도 의식도 모두 뇌의 작용이라고 생각하니까요. 하지만 과학자가 박쥐를 잡아서 뇌를 열고 시냅스와 해마의 구조 하나하나를 분석한다고 한들 우리는 박쥐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는 알 수 없어요. 그게 환원주의의 맹점이죠."
"컴퓨터의 GPU와 마더보드를 분해한다고 해서 유튜브에 있는 쇼츠를 그 안에서 찾을 수 없다는 말인가요?"
"네. 뭐든 분석하여 최초의 단위까지 샅샅이 밝히면 진실을 알게 될 것이란 기대를 하곤 하지만 헛된 기대예요. 예를 들어 박쥐는 눈이 아주 나빠서 초음파로 모든 사물을 파악해요. 그런 박쥐가 본다는 건 어떤 경험일까, 허기지다는 것, 사냥한다는 것, 박쥐에게 색깔이란 어떤 느낌일까... 우리는 알 수 없어요."
그녀는 다시 왜가리를 보며 물었다.
"박쥐에 대해선 아무것도 알 수 없다? 일종의 불가지론이군요."
"나의 근본적인 인식 구조를 박쥐처럼 바꾸지 않고, 즉 내가 진짜 박쥐가 되기 전에는 상상으로 추론했던 모든 것은 의미 없다는 뜻이기도 해요."
"사람에게도 해당되겠네요. 백 퍼센트 사랑하고 이해한다고들 하죠. 그렇지만 내가 네가 아닌 이상, 너를 이해하는 건 불가능하다."
"맞아죠. 재밌는 건, 그 법칙은 나 자신에게도 해당돼요."
독영은 그녀를 바라봤다.
"아까 노래방에서 어린 시절의 나를 봤어요. 그 아이는 태어날 때부터 독특한 의식 체계를 갖고 있다는 걸 어렴풋이 알고 있었어요. 수학자 괴델의 어린 시절처럼요. 괴델은 불안신경증을 겪으며 자신이 부모를 뛰어넘는 지능을 갖고 있음을 깨달았죠. 부모보다 자신의 능력이 낫다는 사실을 깨달은 아이는 어떨까?... 부모에 대한 반항 따위를 떠올리겠지만 아이들의 사고체계는 전혀 다르죠."
"...?"
"그건 공포예요."
오랜 기다림 끝에 왜가리가 사냥에 성공했다. 작은 물고기를 한입에 꿀꺽 삼키고 만족스러운 듯 걸음을 옮겼다.
"부모에게 의지해도 될까, 그들이 나를 보호해 줄 수 있을까... 따위의 공포부터, 내가 뭔가 잘못된 건 아닐까, 이 세계의 진짜 모습은 무엇일까... 같은 방향 상실의 공포일 수도 있지요. 그런데 인간은 어린 아이나 어른이나 공포를 떨치기 위해 다양한 상상과 내적 논리를 구조화하기 마련이니까... 적어도 당시의 그 아이는 나름의 최선을 다해 두 세계의 접점을 이으려 애쓰며 살아가려 발버둥 치고 있었어요. 그리고 억지로 정상적인 인간이 되는 길을 택했고, 박쥐를 닮은 아이는 정상적인 것처럼 보이는 인간이 돼버렸어요. 원래 삶은 방치되고 버려진 셈이죠."
"제가 도움이 된다면 도울게요."
설계사는 그의 손을 다시 꼭 잡으며 말했다. 독영은 그녀의 손을 포개 잡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까 기억을 되살린 것만으로도 충분해요. 당신을 찾아가야겠다고 마음먹었던 것과 비슷하게 이젠 위험에 빠지지 않도록 제가 신경 쓸 차례란 확신이 들어요."
"하지만!"
"도움이 필요하면 꼭 찾아올게요. 약속해요."
그녀는 독영의 단호한 입장에 더 이상 말을 잇는 대신 목에 차고 있던 넥레이스를 빼서 그의 목에 둘러줬다. 둥근 원형의 은색 펜던트 안에는 푸른색 큐빅이 박혀있었다. 독영은 목걸이를 만졌다. 설계사가 조용히 말을 했다.
"당신은 이상한 사람일 수도 있고, 어쩌면 정말로 내가 조금도 이해 못 할 박쥐일 수도 있어요. 당신을 온전히 이해하는 건 영영 불가능할 지도요. 하지만..."
그녀는 독영의 얼굴에 머리를 포개듯 다가왔다.
"당신은 박쥐로 변한다고 해도... 아마도 좋은 박쥐가 될 거예요."
"응. 좋은 박쥐가 될게요."
"목걸이는 박쥐로 다시 태어난 생일 선물, 문제를 해결하고 돌아오면 더 큰 선물을 줄게요."
푸르고 붉은 조명이 색색이 반짝이는 수면 위에 두 사람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왜가리는 날갯짓을 두어 번 하더니 깊은 밤으로 사라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