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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인로커 혈투

23화

by 뮤즈노트

설계사와 헤어진 뒤 한동안 홀로 거리를 거닐면서 독영은 다음 할 일을 떠올려봤다. 현재 주어진 확실한 단서는 제약회사 공매도와 관련된 뉴스임을 떠올렸다. '와이파이에 연결할 수 있다면 관련 기사를 검색할 수 있다.' 도망자와 비슷한 신세란 점을 떠올린다면 차를 버리고, 장소를 자주 옮길 필요성을 느꼈다. 그는 공공 와이파이가 제공되는 지하철역으로 들어갔다. 늦은 시간임에도 많은 사람들이 귀가를 서두르고 있었다.


그는 지하철 노선도를 유심히 살폈다.


"8 선형 디자인!"


차를 이용해 출퇴근하느라 지나쳤던 바뀐 지하철 노선도가 눈에 띄었다. 얼마 전부터 기존의 복잡한 노선도 대신에 국제표준인 8 선형(Octolinear)을 적용한 사실을 떠올렸다. 8 선형 디자인은 수평, 수직, 그리고 45도 대각선 방향의 직선만으로 구성되었고, 2호선 순환선을 원형으로 표현하여 중심에 둔 것이 특징이었다.


'직선만으로 구성된 유한의 영역에 존재하는 순환하는 무한!'


그는 끌리듯이 2호선 순환선에 올랐다. 그는 출입문 한쪽에 기댄 채 휴대폰으로 주가조작 관련 기사를 검색했다. 공매도와 제약회사 주가 폭락 이후의 기사는 보이지 않았다. 제약사의 적극적인 조치 때문인지, 아니면 확실한 단서를 잡을 때까지 언론노출을 최소화하는 수사기법 탓인지 알 수 없었다. 다만 해당 제약회사 정보를 검색했을 때 신약성분명칭이 세계보건기구가 부여하는 국제일반명(International Nonproprietary Names)을 획득했을 정도로 진행이 구체화되었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해당 신약의 개발은 국내 소재 바이오벤처랩이 주도하고 있는 듯했고, 제약사는 일부 직접투자와 지분소유를 통해 랩에 대한 지분 대부분을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그는 신약과 관련된 기사를 더 상세히 찾아봤다.


신약명 X-1000(ex thousand) : 치매치료에 특화된 신약물질로 최근 국제일반명을 획득했다. 이는 글로벌신약 물질로 인정받음과 동시에 향후 기술이전과 판매에 있어 중요한 척도가 된다. 현재까지 알려진 신약물질의 기전은 1997년 노벨생리의학상을 받은 이론에 기반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기사가 너무 짧다고 느꼈다. 그는 AI검색을 통해 신약 관련 레퍼런스 링크를 찾아냈고, 신약과 관련한 논문 초록을 발견했다.

ABSTRACT :... 기존의 바이오 중심원리(센트럴 도그마)에 따르면, 단백질 간 정보이동은 불가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광우병에서 발견되는 변형 프리온 단백질의 경우, 단백질 간 정보이동이 가능하단 점이 스텐리 프루시너에 의해 밝혀졌다. 본 논문에서 제안하는 신약은 변형 프리온 단백질의 접힘 구조를 독성 없는 상태로 만들어 정상 프리온 단백질에 적용하였다. 이를 통해 망가진 신경전달 구조를 정상적으로 회복시켜 장기강화(long-term potentiation)와 기억력을 증대시키는 것을 확인했다. 해당 바이오 기전을 통한 신약 개발이 성공할 경우, 신경내과 질환 및 안티에이징 약품에도 활용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독영은 논문 초록을 보며, 오델로 보드게임을 떠올렸다. 검은 돌과 하얀 돌이 있고 자기편의 돌 사이에 상대편 돌이 끼어있으면 자기편과 같은 색으로 뒤집는다. 결국 보드판을 많이 물들인 색깔이 이기게 된다. 변형 프리온이 검은 돌이라면, 인간이 뇌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온통 검은 돌로 물들게 된다. 치매 같은 치명적인 질병은 이런 식으로 주변 뇌세포를 파괴한다. 하지만 검은 돌의 전략을 흡수한 하얀 돌이 검은 돌을 하얗게 물들일 수만 있다면? 신경구조는 정상화될 뿐 아니라 뉴런 간 연결이 강화된다. 이른바 감염으로 비정상적이 된 세포를 역감염(reverse templating)시켜 정상으로 만드는 방식이었다.


그는 피로해진 눈으로 멍하니 지하철 주변을 살폈다. '노인요양병원에 근무하던 친구 종욱의 연구가 이 제약회사와 연관이 된 것은 아닐까?' 하지만 그가 남긴 연구 자료는 깡그리 사라진 상태다. 게다가 복잡한 실험 데이터와 논문을 읽어 본다고 한들 의학과 생물학에 문외한인 자신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기존의 기억을 모조리 되살리는 능력이 있다고 해도 중고등학교나 대학교 '생물과 환경'이란 교양 수업에서 들은 정보가 전부였기 때문이다.


독영이 고개를 들어 올렸을 때, 다시 8 선형 지하철 노선도가 들어왔다. 지나가 남긴 888이란 숫자와 종욱이 남긴 것과 동일한 88 담배의 구조신호... 그리고 그녀는 '저를 찾아오세요'라고 말했음을 떠올렸다. 그녀는 어떤 식이든 종욱의 실종과 연결돼 있다고 느꼈다. 그리고 회사 전체가 폐기 단계에 들어섰다는 다급한 말에서 그녀 역시 모종의 위기에 빠져 있음이 분명했다. 8이란 숫자는 그녀를 찾아오도록 흘려준 유일한 단서였다.


지나는 구체적인 정보와 행동을 암시했을 가능성이 크다. 독영은 2호선과 맞닿은 8호선 역을 찾아봤다. 공교롭게도 단 한 개의 역만이 2호선 순환선의 접점이었고 그곳은 잠실역이었다. 그는 잠실에서 8호선으로 갈아타고 8호선 출발역에서부터 8번째에 해당하는 가락시장역에 내렸다.


어떤 단서가 있을까 싶어서 역사를 꼼꼼히 살피던 그의 눈이 멈춘 곳은 코인로커였다. 2열로 쌓인 코인로커에는 CCTV촬영 중이란 스티커가 붙어있었다. 모자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터치스크린을 조작하자 보관함 상태가 떠올랐다. 그중 8번 보관함만이 붉은 화면이었고 '장기보관'이란 글씨가 선명했다. 8번 보관함 찾기를 선택하자 '이용료 결제'화면이 떴다.


독영은 두 가지 이유로 망설였다. 첫째, 결제는 신용카드로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카드를 이용할 경우 수사기관에 동선이 노출될 수 있었다. 둘째는 이용료 결제를 하고 락커문이 열리는 순간 자동으로 물건을 맡긴 사람에게 휴대폰 문자로 통보되는 시스템이 문제였다. 둘 다 어떤 식이든 흔적을 남기게 된다.


하지만 8번 락커의 주인이 '폐기'단계에 접어든 지나와 그 회사라면, 그들에게 자신이 여기까지 왔다는 사인을 주는 셈이 된다. 그들과 만날 수 있는 유일한 방도일 수 있다. 막연한 추론이지만 시도해보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느꼈다. 독영은 지갑을 뒤적이다가 한서 아버지가 건넨 신용카드를 떠올렸다. 수사기관이 어느 범위까지 손을 뻗쳤는지는 몰라도 한서 아버지의 신용카드라면 자신의 카드를 추적할 때보다는 더 오랜 시간이 걸릴 듯했다.


독영은 한서 아버지의 신용카드로 결제를 시도했다. 다행히 카드는 정지되지 않은 상태였다. 비밀번호는 '0888'을 입력했다. 놀랍게도 8번 락커가 열렸다. 쭈그려 앉아 락커 안을 들여다봤다. 비닐 파일로 구획된 50cm는 될법한 문서 꾸러미가 놓여있었다. 그는 등산용 백팩을 열고 문서 꾸러미를 쑤셔 넣었다. 문을 닫으려는 데 일련의 숫자로 된 인터넷 주소가 8번 락커문 뒷면에 수성펜으로 적혀 있는 것을 보았다.


[https://88.**.***] memento


숫자 밑에는 'memento(기억하라)'라는 라틴어가 쓰여 있었다. 인터넷 주소를 기억해 둔 뒤 손가락으로 주소를 지웠다. 독영은 지하철 역내 화장실로 들어가 문을 닫고 문서를 훑어보았다. 맨 앞에는 속독 관련 기술을 요약한 문서가 나왔다. 그다음은 수의 기본 체계, 정수론을 거쳐 유클리드 기하학에 대한 문서가 나왔다. 뒤를 이어 미적분학, 무한집합론의 칸토어, 부르바키의 구조주의 수학을 지나 프랙털과 카오스 이론에 대한 최신 논문으로 이어졌다.


특이한 점은 이들 문서가 수학, 특히 소수를 중심으로 논의가 집중되도록 편집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정수론은 완전수와 메르센소수에 대한 설명으로 이어지고, 다시 해당 설명이 리만가설과의 연관으로 이어진다. 다시 리만 가설이 양자역학의 원자궤도 에너지 준위와 깊이 연관되어 있다는 측면에서 물리학의 논의를 다룸과 동시에 구조주의 언어학과 기호학이 그 뒤를 따라 a, b, c... 순으로 인덱스화되어 있었다.


누군가 화장실문을 두드렸다. 독영은 헛기침을 하고 문을 두드려 사람이 있음을 알렸다. 하지만 노크는 점점 크고 거칠어졌다. 잠복! 누군가가 그가 올 것을 예측하고 잠복해 있다가 화장실로 따라 들어온 것이 분명했다.


"초독영씨! 지금 한가롭게 숨어있을 때가 아닐 텐데!"


거친 저음의 쇳소리. 목소리는 지하 사무실에서 만났던 티가 분명했다.


"계약 담당, 티? 지나! 지나 씨는 무사한가요?"


그는 문서를 가방에 넣으면서 다음 행동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일단 나와서 얘기하자고! 아주 곤란한 상황 아닌가?"


독영은 혼란스러웠다. 지하에 있던 LCI를 방문했을 때처럼 티는 여전히 고압적이었다.


"당신이 시킨 대로 연애 상대에게 고백을 했어요! 회사가 폐기됐든 어쨌든 이젠 그쪽이 의무를 이행할 차례 아닌가요?"


티는 거칠게 문고리를 흔들어대며 모골이 송연하게 웃었다.


"하하핫. 의무라. 이런 일이 생길 줄 알고 지나 양을 말렸는데... 예상대로 아주 귀찮게 돼버렸지 뭔가! 지나 양의 잘못된 판단은 여기까지로 마무리하자고."


티는 더 이상 설득할 생각이 없는 듯 문짝을 손도끼 같은 걸로 찍어대기 시작했다. 큰 소음과 함께 나무짝이 뚫려나가기 시작했다. 독영은 문고리를 잡고 숫자를 셌다. 티가 문짝을 뜯는 순간에 맞춰 문을 박차고 나갈 생각이었다.


'쾅! 쾅!'


그가 '셋'을 셈과 동시에 문을 밀치려는 순간, 화장실 밖에서 엄청난 소음이 들렸다.


"와장창!"


사람이 날아가 타일벽에 달린 거울에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거칠게 주고받는 타격음이 이어졌다. 화장실 문틈으로 여러 개의 그림자가 빠른 속도로 어른거렸다. 손도끼가 화장실 문틈 밑으로 '까라라랑' 소리를 내며 미끄러져 들어왔다. 독영은 재빨리 손도끼를 집어 들고 심호흡을 했다. 뒤이어 쫓아온 대여섯 명의 급박한 발소리가 들렸다. 싸움은 더욱 격렬해졌다. 수전이 터져 나와 물바다가 되며, 핏물 비슷한 것이 화장실 바닥에 흘러들기 시작했다.


독영은 변기를 밟고 뚫린 화장실 문 위로 휴대폰 카메라를 올려 바깥 상황을 살폈다. 티는 검은 옷을 입은 사내 여섯을 상대하고 있었다. 놀라운 것은 티가 가진 힘이었다. 그것은 괴력이라 부를만한 것이었다. 한 손으로 검은 슈트를 입은 사내의 멱살을 잡고 마치 인형을 던지듯 벽을 향해 던지자 달려오던 두 명의 사내가 함께 고꾸라졌다. 그들을 피해 몸을 날린 또 다른 남자를 몸을 살짝 돌려 피하는 가 싶더니 막무가내로 휘두르는 듯한 러시안 훅이 남자의 정수리에 꽂혔다. 남자는 공기 빠진 풍선처럼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때, 뒤에 나자빠져 있던 남자가 기회를 노리다가 바닥에 떨어져 있던 칼을 쥐고 몸을 날렸다. 티는 순간 '욱'하는 소리를 내더니 손날을 휘둘러 남자의 목을 가격해 바닥에 때려눕혔다. 티는 흘끗 자신의 옆구리를 봤다. 날카로운 칼이 박힌 상태였다. 티는 자신의 갈색 정장 안쪽을 살펴 출혈을 살피곤 칼을 빼지 않은 채, 주춤거리며 화장실의 깨진 거울 앞에 섰다. 얼굴에 묻은 피를 터져 나온 수전 물줄기로 닦고는 손수건을 꺼내 깨끗이 얼굴을 정리했다. 그리고 독영을 향해 말했다.


"지나 양은 당신을 대단하다고 여긴단 말이야. 그 또래 여자 아이들은 그게 문제야."


그는 물로 입안을 헹궜다. 바닥에 나뒹굴며 신음하는 슈트 만들 바라보며 깨끗이 옷깃을 고친 그가 말을 이었다.


"이럴 바엔 진실을 알고 희생되는 것도 나쁘지 않지."


티는 수수께끼 같은 말을 남긴 채 그대로 화장실밖으로 나가버렸다. 그가 사라지고 망설이다가 문고리를 잡고 살며시 열려는 데 거칠게 화장실 문이 뜯겨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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