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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저인 미스터리

24화

by 뮤즈노트

독영은 화장실 문이 벌컥 열리는 순간, 피냄새와 섞인 국화향을 맡고 흠칫했다.


"독영씨, 이사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자리를 옮기시지요."


사내는 바닥에 나뒹구는 일행을 가리려는 듯 막아선 채로 그를 문쪽으로 정중히 안내했다. 화장실 문 앞에는 포머드로 머리를 말끔히 넘긴 비서가 서 있었다. 예술의 전당에서 이사를 수행하던 비서임을 단박에 알아차렸다. 독영은 이대로 도망칠까도 싶었지만 이미 두 겹 세 겹으로 슈트를 입은 또 다른 남자들이 효율적으로 길목을 차단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가야만 합니까?"


독영의 말에 비서가 끄덕였다.


"이사님 말씀이니까요. 장담하지만 나쁘지는 않을 겁니다. 한서 씨도 기다리고 계시니까요."


비서는 주의 깊게 독영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이끌었다. 지하철역 출구를 나서며 화장실 쪽을 뒤돌아봤다. 부상당한 남자들은 어느샌가 사라진 듯했다. 화장실 문 앞에는 수리공 옷을 입은 작업자들이 '작업 중'이란 테이프를 치고 이미 청소를 시작하고 있었다. 뉴스에 날법한 끔찍한 결투가 벌어진 것은 착각이었나 싶을 만큼 신속하고 깔끔한 뒤처리였다. 일반적인 회사의 대처라고 보기엔 지나치게 체계적이고 능숙했다. 게다가 비서를 포함해 슈트를 입은 남자들은 법이나 경찰 따위는 전혀 개의치 않아 한다는 게 이상했다. 도로에는 검은색 신형 BMW 7시리즈 3대가 대기하고 있었다. 비서는 그를 가장 앞차로 안내했다.


차는 분당을 지나 서판교의 고급주택가에서 적당히 떨어진 대저택에 멈춰 섰다. 천평은 넘을 듯한 대지에 2미터 이상의 담장이 둘러싸여 언뜻 중세의 성벽과도 같았다. 독영은 차에서 내리면서 도망칠까도 생각했지만, 익숙한 목소리에 멈칫했다.


"선배, 걱정했어요. 괜찮은 거예요?"


넓은 마당을 가로질러 뛰어온 것은 뜻밖에도 한서였다. 그녀는 차에서 내린 독영을 부둥켜안았다. 그녀의 목소리와 따뜻한 체온이 느껴지자 마음이 안정이 되는 듯했다. 그녀는 독영의 앞머리를 한참이나 쓰다듬으며 꼼꼼하게 살폈다. 잠시 후 손을 이끌고 대저택으로 향했다.


가구라곤 전혀 없는 넓은 거실 한가운데 고급스러운 소파가 놓여 있었다. 천정은 3층 정도 높이까지 뻗어있어 박물관에 들어온 듯한 공간감이 느껴졌다. 벽난로를 배경으로 소파에 기댄 한서의 아버지는 비서와 귀엣말을 나누고 있었다. 그는 독영이 들어서는 걸 보면서 손짓으로 앉을 것을 권유했다.


"꽤 큰 소동이 있다고 들었네. 몸은 괜찮은가?"

"네. 달리 다친 곳은 없습니다만... 조금 놀랐습니다."

"그 난리통에 놀랐다... 정도라니 비범한 친구로군."


정장을 입은 젊은 여성 두 명이 따뜻한 커피를 내왔다. 한서 아버지는 커피를 권하면서 말을 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자네가 오기 전, 내 신용카드를 준 게 다행이라고 한서와 얘기하고 있었네. 조금이라도 위치 파악이 늦었으면 저쪽에 쥐도 새도 모르게 당했을 거야."


독영은 거짓이라 느꼈다. 신용카드 사용을 이사측에서 알았다해도 그들의 대응은 지나치게 빨랐다. 티라는 남자가 독영이 올것을 알고 매복하고 있었던 것과 같이 그들도 인근에서 독영을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독영은 내색하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저쪽이라면?"

"음... 글쎄... 말해도 좋을지..."

"혹시 주가 조작 관련한 혐의라면 솔직하게 소명해 드릴 수 있습니다."


그때 한서가 끼어들었다.


"맞아요. 아빠. 선배는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에요. 제가 보증할게요."

"훗. 한서야. 믿을만한 사람이니 내 카드도 주고 너도 돌봐주라고 하지 않았겠니?"


그는 비서에게 뭔가를 지시했다. 비서는 독영 앞 티테이블에 컬러 인쇄된 종이를 내려놓았다. 종이에는 암호화폐 계좌창이 프린트되어 있었고, 한눈에 봐도 억 단위 금액이 찍혀 있었다.


"이게... 뭐죠?"

"자네 말이 사실이라면, 이 계좌의 돈은 저 쪽이 누명을 씌우려고 보낸 거라고 봐야겠군. 당사자가 알아차리기 어렵게 암호화폐로 대가를, 아니 대가처럼 보이는 돈을 송금한 것이지."


독영은 정교한 덫에 걸려들었음을 인정해야 했다. 이사는 팔을 벌리고 소파에 깊숙이 기대며 말을 이었다.


"현실의 사법체계에서 무죄란, 도덕적 결백과는 상관관계가 없네. 충분히 소명할 수 있다고 자신하지만, 수사 기관 앞에서 할 수 있는 말이라곤 '나는 몰랐다.'뿐일걸? 운행표, 자네가 매수됐다는 텔레그램 캡처, 계좌 정보까지... 정황 정도가 아니라 직접 증거가 명백한데 무고하단 소명이 재판정에서 통할까?"

"... 왜 하필 저죠?"

"왜 나일까? 불의의 사고를 당하면 그런 생각을 한 번쯤은 하게 되지. 쉽게 말하자면, 전쟁이 벌어졌고 자넨 불의의 민간인 희생자라고 생각하면 기분이 나을지도 모르겠군."


한서가 독영 곁에 바짝 다가가 앉으며 어깨를 감싸며 말했다.


"아빠, 다 말씀해 줘요... 선배도 알 자격이 있어요."


이사는 딸의 채근에 미소를 머금었다. 품 안의 금색 케이스에서 담배를 꺼냈다.


"우리 딸이 누군가를 이렇게 좋아하는 걸 보는 건 솔직히 처음이라 놀랐네. 그날 대체 무슨 수를 쓴 건가?"


한서가 눈을 흘기자 '허허' 너털웃음을 지은 이사는 말을 이었다.


"좋아. 얼마 전 공매도 세력에 당한 제약회사 말이야... 사실 우리 회사와 일부 관계가 있다네. 장부상으로 드러나진 않지만. 어쨌거나 저 쪽은 세력과 판을 짜고 공격을 하고 있는 것이지. 그 과정에서 자네가 표적이 된 것이고 말이야."

"제가 표적이 된 이유를 아직 모르겠습니다."

"혹시 최근에 이상한 접근이 있었나?"

"이상하다면?"

"회사나 사람, 어떤 것이든 말이야."


그때 한서가 놀란 듯 입을 열었다.


"선배, 그 결혼정보회사 비슷한 거!"


독영은 본능적으로 매니저 지나 이야기를 피했지만 더 이상 숨기기 어렵다고 느꼈다. 게다가 LCI에 속한 티와 이사 쪽 사람들이 화장실에서 혈투를 벌인 터였다. 그는 최대한 간결하게 그간의 일을 전했다.


"흠. 이제야 그림이 그려지는군. 외로운 컨설팅 회산지 뭔지 이상한 설정으로 자네의 관심을 끈 다음, 내 딸을 얽히게 만들 속셈이었던 거지. 공교롭게도 자넨 내 딸과 함께 근무하고 있는 데다가 듣기로는 약을 처방받기 위해 신경정신과를 주기적으로 들린다고 하니까 딱 교집합적인 존재, 활용도가 높은 대상인 셈이지."


독영은 지나가 한서를 보고 혼잣말로 '일이 늘겠군.'이라고 한 기억과 한서에게 고백을 하도록 강요한 티를 떠올렸다. 그는 티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느꼈다. 하지만 매니저 지나가 이 일에 연루되어 있다고는 상상하기 싫었다. 그녀는 자신과 계약을 맺지 못하면 '폐기'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지나 역시 자유롭지 못한 상황에서 LCI로부터 어쩔 수 없이 이번 일을 수행하고 있다는 말인지도... 생각이 이쯤 이르렀을 때 이사가 입을 열었다.

"그날 처음 자넬 보면서 느낀 게 뭔지 아나?"

"모르겠습니다."

"자넨 쓸데없이 친절한 면이 있단 점이야."


독영을 나무라는 투였다. 비서가 재떨이를 가져다주자 한서의 아버지는 재를 떨궜다. 독영이 질문했다.


"적 입장에선 한서를 직접 공격하는 게 낫지 않았을까요?"


"그쪽은 어설픈 아마추어가 아니야. 내 딸이 자신의 아버지 회사를 공격한다는 건 상식적으로 맞지 않으니까 수사기관에서 간단히 소명할 수 있지. 하지만 자네를 이번 건으로 엮은 뒤에 심리적으로 조종한다면 어찌될까, 우리 딸은 자네를 도우려 할테고 저들은 공격, 우린 수세에 몰리겠지."

"저는 한서에게는 그냥 직장 선배일뿐입니다."

"얼마 전까진 그랬을지 모르지. 하지만 그쪽의 심리 공격 매뉴얼은 꽤 대단해. 자네가 그들 매뉴얼의 코치를 받은 대로 한덕에 내 딸이 저렇게 됐으니 말야."

"아빠, 그런 게 아니래도! 선배는 누구에게 조종 당해서 나한테 친절히 대해준게 아니라니까!"


이사는 딸에겐 못이기겠다는듯 웃으며 '알겠다'라며 팔을 휘저었다.


"어쨌거나 다행히 딸까지 엮이기 전에, 눈치를 채고 손을 썼지. 너섬에 있는 지하 소굴을 수사 기관과 함께 털었네. 물론 놈들도 순순히 당하지 않고 모든 증거를 인멸한 후였지만. 하여간 재빠른 놈들이라니까."


독영은 '폐기'단계에 들어갔다는 지나의 말을 떠올렸다. 한서는 아버지의 말에 기분이 상한듯 두 사람이 대화를 끝내길 바라는 눈치로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독영은 묻고 싶은 게 있었다.


"상대에 대해 조금 더 알고 싶습니다. 말씀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이사는 하품을 한 뒤, 손목시계를 보며 말했다.


"음... 한서도 피곤한 듯하고, 시간이 늦었군... 그러면 한가지만 간단히 답해주기로 하지."

"저쪽이라 부르는 자들은 누굽니까."

"좋아. 우리 공통의 적에 대해 답해주지. 우리는 저쪽을 지저인이라고 부른다네."

"지저인?"

"그래. 미스터리 소재로 다뤄지는 지하에 사는 또 다른 인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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