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노크 소리에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데, 한서가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녀는 얇은 면티와 핫팬츠 스타일의 트레이닝 복을 입고 있었다.
"선배, 쉬고 있었어요?"
"응? 잠깐 생각을 하고 있었어. 이래 저래 정리가 안 돼서 말이야."
한서가 살갑게 그의 곁으로 와서 소파에 앉았다.
"어때요? 생각은 정리가 됐어요? 선배 일은 아빠에게 잘 말해뒀으니 걱정 말아요."
"글쎄. 나보다는 사실 내 친구가 걱정될 뿐이야."
"친구요?"
"응. 내 주치의이자 친구지. 공교롭게도 며칠 전 사라져 버렸거든."
"그랬군요. 하지만 너무 걱정 말아요. 아무리 지저인이라 하더라도 선배 주변인까지 공격하진 않을 거예요."
"왜 그렇게 생각해?"
"저야 오래전부터 아빠 얘기를 어깨너머로 들어왔을 뿐, 그들을 잘 모르긴 하지만..."
"..."
"그들은 정확한 논리에 따른 공격만 한다고 해요."
"정확한 논리라는 게 표적만 공격한다는 건가?"
"대충 덮어놓고 공격하는 쪽보다는 수술하듯이 정교하게 시나리오를 짠다는 뜻이죠."
그를 안심시키려 꺼낸 이야기였지만 도리어 상념이 늘어버렸다. 독영은 지나의 주도면밀한 소개팅 시나리오를 떠올렸기 때문이다. 만약 한서 아버지인 이사의 말대로 LCI가 공격을 해오는 것이라면 독영의 절친인 종욱의 실종도 연관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한서가 말을 이었다.
"별일 없을 거예요. 아빠가 저렇게 몰입하는 건 저도 처음이거든요."
한서는 독영의 표정을 살피다가 말을 이었다.
"그때 저녁때 같이 있던 여자, 아빠가 말씀하신 지저인 맞죠? 그 여자도 지저인이라니... 보기엔 평범해 보였는데요."
한서는 팔로 몸을 감싸며 소름이 끼친다는 듯 떨었다.
"지저인을 외모로 알 수 있는 건 아니겠지. 그저 상징적인 비유로 그렇게 부르는 것일 테니까 말이야. 일종의 초코무스케이크처럼."
"초코무스케이크?"
"누군가 했던 비유야. 테이블에 놓인 초코무스케이크는 특별할 게 없지. 그런데 당뇨환자 모임 테이블에 초코무스케이크가 놓여있다고 생각하면 어때?"
"글쎄... 어떨까요? 당뇨식 제한이 있으니 환자들은 그걸 탐낼까요?"
"그럴 수도 있지. 욕망에 가득 찬 눈동자로 지켜볼 수도 있고, 한편으론 자신을 놀리는 저질스러운 조크로 생각하고 경멸의 눈으로 초코무스케이크를 바라볼 수도 있겠지."
"초코무스케이크를 누가 테이블에 갖다 놨는데요?"
"아무도 몰라. 중요한 건 초코무스케이크의 관점이 돼 보는 거야. 탐욕의 시선, 경멸의 시선을 받는 채 방치된 케이크의 입장에서."
"흠. 선배 얘길 듣다 보니 더 무서워졌어요."
"미안. 무서우라고 한 이야긴 아니었어."
독영이 뭔가를 말하려는데 갑자기 한서가 키스를 해왔다. 진득한 키스였다. 그는 입을 맞추는 동안, 엉뚱하게도 지나의 귀여운 얼굴을 떠올렸고, 설계사의 따듯한 손을 생각했다.
한서는 독영에게 얼굴을 떼고 말했다.
"혼자 있기 무서워요. 나, 재워주지 않을래요?"
"하지만... 아버님이 아시면, 무서운 비서를 시켜서 거꾸로 매달지도 모르는데?"
"훗. 아빠는 별채에서 따로 주무세요."
"발각되면 매달리는 건 확실한가 보네."
"거꾸로 매달려 있는 선배와 키스하는 것도 로맨틱하겠는걸요."
한서의 몸에선 특유의 향수냄새가 은은하게 풍겨왔다. 부유함의 최대치를 소유한 가정에서 태어나서 곱게 자라온 여자의 삶은 어떤 것일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따지고 보면 게스트룸조차 곳곳에 있는 사물들 모두 특유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듯 느껴졌다. 그녀의 몸이 곧 풍성한 부드러움이 되어 선물처럼 안겨왔다.
"나, 그때 선배가 재워준 날,... 계속 생각이 났어요."
"..."
"선배한테선... 뭐랄까... 특유의 분위기가 향수처럼 나요. 계속 생각나고 안겨있고 싶게 해요."
"오이 비누 한 박스를 더 주문해야겠네."
"쿠쿡. 유머하는 선배는 첨보네. 그동안 왜 안 했어요? 더 매력적인데..."
그녀는 독영을 끌어안고 키스를 했다. 갑자기 독영의 머리에선 수많은 정보들이 입체적인 도형과 수가 되어 떠올랐다.
'각성의 순간이 왔다.'
하지만 지나나 설계사와 있을 때보단 훨씬 강렬한 신호였다. 그는 큐빅처럼 조합되고 다시 산란하는 시냅스의 번개들을 관찰한다. 그녀의 몸을 훑으며 소용돌이치는 빛의 잔상을 보았다. 지금으로서는 금단증상과 함께 몰려오는 이 능력 속으로 뛰어들 수밖에 없다고 느낀다. 끝이 어떻든 간에 온몸을 불확실성의 바다에 던지고 살아남기만을 기대하는 수밖에 없었다. 독영은 카메라로 자신을 지켜보는 듯한 의식이 존재하고, 그의 행동과 몸을 움직이는 의식이 따로 존재함을 깨닫는다. 그는 두 의식을 애써 통합하려 하지 않고 관찰한다.
잠시 후, 잠든 한서에게서 팔을 빼고 침실 문을 닫았다. 그는 코인로커에서 복사한 자료를 뒤적인다. 첫 장에 뜬금없이 등장한속독법. LCI는 독영에게 속독을 배울것을 요구하는듯 했다. 독영은 차분히 부분을 읽어 나가려했지만 고양된 정신은 자꾸만 그의 의식을 빠른 속도로 앞서갔다.
속독은 기술이다. 그렇기에 상당한 훈련량을 요구한다. 통상적으로 사용하는 훈련은 그려진 점을 따라 빠르게 읽는 안구 운동법이다. 기능적 형태에 가까운 속독법이어서 단어와 문단을 읽는 속도를 향상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또 다른 방법은 보다 과학적 근거에 의지하고 있다. 안구로 들어온 정보는 내가 의식해서 정보로 받아들였든 그렇지 않든 그 이미지를 뇌로 전달한다. 사진을 찍듯 입력된 페이지의 전체정보가 뇌에 투사된 상태라면 그것을 재빨리 처리하는 훈련을 통해 빠르게 정보를 습득한다. 전자가 기능적이라면 후자는 처리 프로세스, 즉 집중력이 고양된 상태에서 이해력을 증강시켜 정보를 찍어내는 방식이다. 그는 직관적으로 두 가지 방식을 조합한다.
전에 시도했던 루틴에 따라 한 글자에서 단어로, 다시 단어에서 문단으로, 단락으로 건너뛰며 속도를 내본다. 산책하듯 천천히 걷기 시작하던 두뇌는 조금씩 속도를 높여감에 따라 좌뇌, 우뇌, 뇌간과 대뇌피질이 긴밀히 조응한다. 소수를 향해 일관되게 정리된 자료에 대한 탐구. 그는 유클리드 기하학을 거쳐 미적분학, 부르바키의 구조주의 수학을 지나 프랙털과 카오스까지 연결된 이론 모두를 섭렵한다. 또한 분기되어 기술된 학문의 변종들, 역학, 정치학, 경제의 영역뿐 아니라 언어학, 컴퓨팅까지 그 안에 있는 자료를 마스터한다.
어느새 동이 터오고 있었다. 그리고 불현, 깨달음이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