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은유? 은유라..."
독영의 말에 이사는 다소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독영이 말을 이었다.
"우주에서 역으로 흐르지 않는 것... 비가역적인 것에 대한 은유입니다."
"우주에서 비가역적인 것이라면, 흠... 시간? 엔트로피는 열역학 법칙에 따라 비가역적인 원리를 갖고 있고, 통상 시간이 선형적으로 미래를 향해 한 방향으로 흐르는 것에 대한 근거로 엮어서 설명하곤 하지."
"그렇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엔트로피와 그것에서 파생되어 나온, 역으로 흐를 수 없는 시간 개념에 의해 유지됩니다. 그런데 신약의 경우, 기존 도그마를 뒤집고 정보의 역행을 다룹니다. 바꿔 말하면 시간을 거꾸로 거슬러 흐르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개발 중인 신약이 시간을 거꾸로 흐르게 한다?"
독영은 시간을 거꾸로 흐르게 한다는 점에서 이미 영생을 떠올렸다. 수 없이 그에게 나타난 8이란 숫자, 그것을 옆으로 눕히면 무한대 기호(∞)가 된다. 지저인들은 자꾸만 영원과 영생에 대한 단서를 독영에게 흘리고 있었던 셈이다. 하지만 왜 하필 자신에게 그런 정보를 주는지는 헤아리기 어려웠다.
어젯밤 노트북을 통해 보게 된 CCTV 영상에 그 단서가 숨어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정확한 이유를 알게 되기 전까지는 신약이 일종의 '영생'과 관계돼 있다는 자신의 해석을 공공연히 내비치고 싶진 않았다. 독영이 생각에 빠져 있자, 이사가 재촉하듯 되물었다.
"신약에 대한 자네 해석은 그렇다 치고, 지저인들이 건넨 소수 체계 자료는 무슨 뜻이지?"
"소수는 프라임넘버, 의미를 그대로 해석하면 가장 중요한 숫자란 뜻입니다. 1과 자신으로 밖에 나눠지지 않기에 가장 자존적인 숫자, 일찍이 사람들은 소수의 중요성을 직관적으로 알고 있었으니 그렇게 이름 지은 것이겠죠. 그리고 현재에도 소수는 중요합니다. 아시다시피 실생활에서 사용되는 대부분의 암호체계는 엄청나게 큰 소수끼리의 곱을 암호키로 사용합니다. 인수분해를 하는데 어마어마한 시간이 걸리니까요. 이 말은 결국 소수에 대한 이해만 충실하다면 각종 보안시스템을 무력화시킬 수 있다는 뜻이죠. LCI가 민간 회사가 접근 불가능했던 정보를 소유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기존의 암호보안 체계를 무력화시킬 만능키, 즉 소수체계에 대한 탁월한 이해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사의 눈이 빛났다.
"그놈들은 자체 데이터센터를 운영할 정도로 뛰어난 IT기술을 갖고 있지. 자네 말도 일리가 있어. 혹시 아나, 세계 최초로 양자 컴퓨팅을 안정화시켰을지도 모를 일이지. 그런데 의문은 남네."
이사는 하얀 천으로 입가를 닦은 뒤, 의자 등받이로 몸을 눕히며 물었다.
"왜 소수자료를 자네에게 넘겼나 하는 점이네. 처음에 자네가 '왜 나인가?'라고 질문했을 때 설명했듯이, 자넨 지저인이 꾸민 공매도 공작의 희생자로 세팅돼 있었을 뿐인데 말이야. 짚이는 게 있다면 말해보게."
독영 역시 계속해서 의문을 품어왔던 점이다. 이사의 설명대로 한서와 같은 회사에 근무하고 있다는 점은 지저인에겐 매력적인 옵션으로 생각되었을 것이다. 여차하면 둘을 공범으로 엮을 수도 있을 테니 말이다. 또한 막대한 공매도 이익을 취하기 위한 희생자란 설명도 일리가 있다. 하지만 지저인이 속독법 뒤에 소수자료를 배치했다는 건, 독영에게 그 자료를 읽으라고 독촉하는 듯 느껴지기도 했다. 독영은 모든 것이 확실해지기 전까지는, 이사에게 자신이 단순한 희생자가 아니라는 추론을 굳이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들은 제가 코인로커로 자료를 찾으러 오리란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저를 지하철 화장실에서 제거하면 언론에 크게 보도가 될 테고, 코인로커에 있던 자료도 중요한 증거물로 세간에 회자가 되겠죠. 그리고 몇 가지 익명의 제보를 곁들인다면 탐사 보도 프로그램 등을 통해 신약에 대한 세세한 내용들이 흘러나가 온 세상이 알게 되겠죠."
"놈들은 결국 신약 개발을 멈추도록 하는 게 목표고, 그 경고의 의미로 자네를 활용하려 했다는 말이로군. 하지만 소수 자료와 신약개발은 은유라고 하기엔 거리가 너무 먼데..."
"실제로는 매우 가깝습니다. 코인로커에서 얻은 소수 자료 책자에 보면 리만 가설이 등장합니다. 1970년대에 소수의 규칙성을 설명하려는 리만가설을 연구하려던 학자들이 크게 놀라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단순히 수학적인 공식이라고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원자의 에너지 분포를 설명하는 양자역학의 공식이었다는 것이죠."
"수학에서 다루는 정보가 물리적인 현실과 이어져 있다는 것이로군."
"그렇습니다.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은 여럿이 있지만, 암호와 해독, 코딩과 디코딩이란 시스템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소수를 활용한 보안시스템과 생명체 유전정보 시스템도 리만 가설과 에너지 준위 공식의 동일성처럼 놀랍도록 닮아있죠. 한마디로 말해, 지저인은 소수 체계에 대한 궁극의 이해를 이미 이루었다라고 경고하는 것이죠."
"끙. 자네 말대로라면 단순한 경고라기 보단 강력한 선언이로군. 신약 개발을 멈추지 않는다면 소수에 대한 초월적인 이해를 토대로 우리 회사를 말살시키겠다는 뜻처럼 느껴지니까 말야."
"동시에 요구라는 생각입니다."
"요구? 어떤?"
"정확히 설명하긴 어렵지만, 소수가 곧 세상의 원리고, 그걸 지저인이 독점하고 있다면 신약개발의 원리 역시 자신들의 것이고, 그것을 돌려달라는 뜻처럼 여겨집니다."
갑자기 이사는 박수를 쳐서 독영 곁에서 그의 손을 잡고 있던 한서를 깜짝 놀라게 했다.
"아빠, 깜짝이야."
"한서야, 이런 표현은 좀 상투적이지만... 네 선배라는 사람은... 천재 같구나."
"..."
"순수한 의미의 천재말이다."
독영은 종욱이 건넨 것과 비슷한 표현에 내심 놀랐다. 이사는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우리 한서도 자네에게 흠뻑 빠진 듯하고... 솔직히 저 녀석이 만난 남자들은 형편없는 놈들이었지만 이번엔 달라. 예술의 전당에서 첫눈에 알아봤지. 어떤가..."
"뭘 말씀입니까?"
"자넬 어떤 식이든 곁에 두고 싶군. 급작스럽게 뭘 요구하는 건 아니네. 우리 회사로 아예 이직해서 천천히 경력을 쌓아보는 건 어떨까 싶군."
"감사한 제안입니다만, 일단 제 주치의를 구하고 나서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음... 우리도 노력해 보겠네만 당장은 시간이 걸리니..."
이사의 말에 독영이 강조하듯 말했다.
"지저인을 지상으로 끌어낼 방법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