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엄청난 허기와 식은땀, 그리고 피로감이 몰려왔지만 독영의 마음은 안개가 서서히 걷히는 느낌이 들었다. 오랜 기간 칸막이처럼 나뉜 두뇌의 좌우 시스템 사이에 있던 얼어붙은 경계막이 스르르 녹아내리고 있었다. 이른바 억제되어 있던 의식과 사유가 서로의 경계를 넘나들며 조응하기 시작한 것이다.
독영은 결승점을 통과한 마라톤 선수처럼 극심한 허기와 피로감을 달콤하게 즐기듯 한동안 소파에 쓰러져 꿈쩍도 않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냉장고를 열어서 달콤한 음료와 바나나, 와인과 치즈를 싹쓸이하듯 입에 털어 넣었다. 음식을 우물거리면서 그는 생각한다. 초인에 가까운 지적 능력의 발현은 코인로커의 자료가 아니었으면 불가능했다. 지저인들은 마치 미래를 내다보기라도 하는 듯 능력을 제한하던 칸막이를 효율적으로 부술 망치를 건넨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왜, 내게?'
독영은 두 번째 숙제를 해야 할 때라고 느낀다. 코인로커 문에 남겨져 있던 'memento'와 IP주소를 기억해 낸다. 휴대폰 인터넷 창에 주소를 쓴다. 웹페이지 한가운데에 덩그러니 동영상 창이 하나 올라와 있었다. 독영이 클릭을 하자 동영상이 플레이 됐다.
열화 된 CCTV화면. 늦은 밤 교차로에서 신호가 바뀌길 기다리며 서성이던 그림자가 보인다. 그 사람 주변에는 낯익은 느낌의 승용차가 서 있다. 그때 신호와 상관없이 비틀대던 덤프트럭이 다가온다. 트럭은 그대로 승용차를 덮친다. 차는 종이처럼 구겨진다.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던 그림자가 뛰어와 찌그러진 승용차에서 누군가를 구출하려는 듯 필사적으로 움직인다. 마치 종이를 뜯어내듯 찌그러진 차의 철판을 가볍게 벗겨낸다. 피투성이 된 사람이 그의 손에 딸려 올라온다. OFF.
화면은 그렇게 끝났다. 순간, 독영은 이상할 정도로 숨이 가빠짐을 느낀다. 토할 듯 비척이면서 화장실을 향하다가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곧이어 깊은 잠이 찾아왔다.
독영이 잠에서 깼을 때는 오전 11시가 훌쩍 지난 때였다. 한서가 몇 번이나 흔든 뒤에야 그는 정신을 차렸다. 한서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정원 잔디밭으로 안내했다. 거대한 흰색 타프가 그늘을 만드는 야외에 지중해 풍의 음식이 가득 차려져 있었다. 이사는 먼저 와서 기다리다가 그를 보자 자리에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독영은 짧게 목례했다. 그리고 여전한 허기를 느끼며 한동안 음식에 집중했다.
"도통 소용이 없더군."
반짝이는 은제 포크를 든 채로 이사가 말했다. 독영은 그 말의 뜻을 파악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이사는 벌써 식사를 마쳤다는 듯 입을 닦으며 말했다.
"어제 자네가 가져온 자료 말이야, 대학 수학과 교수진, 우리 쪽 연구원들에게도 맡겨봤지만 소수체계에 대한 정교한 학습 과정의 일부라는 것을 빼곤 딱히 이렇다 저렇다 원하는 답변이 없더군. 교묘한 녀석들 인 만큼 밑도 끝도 없는 암호를 던진단 말이지."
그는 독영을 보며 화이트 와인으로 입을 가시며 말했다. 독영이 그때 입을 열었다.
"그 자료는 신약 연구에 대한 메시지라고 생각했습니다."
"신약? 어째서?"
"그에 앞서, 현재 진행 중인 신약에 대해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저도 그로 인해서 공매도 세력인지, 지저인인지 따위에 얽혀 들었으니 알아두면 좋을 듯합니다."
독영은 종욱의 연구, 그리고 그의 실종이 이사의 제약회사에서 개발 중인 신약과 관련 있으리라 의심하고 있었다. 보다 더 정확히 내용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이런... 그건 회사 기밀이야. 게다가 아무리 쉽게 설명해도 자넨 전공자도 아니니 이해를 못 할 것이네."
그때 눈치를 보던 한서가 끼어들었다.
"아빠, 조금이라도 말씀해 주세요. 네?"
독영 역시 이사를 따라 화이트 와인으로 입술을 적셨다.
“사실, 굳이 말씀을 안 해주셔도 알 것 같습니다."
"음... 어떻게?"
그는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독영을 바라봤다.
"센트럴 도그마. 생명체의 유전정보가 전해지는 흐름에 관한 이야기죠. 우리 몸의 유전정보는 DNA에 암호로 코딩되어 저장됩니다. 그리고 RNA로 전사된 후, 단백질에 이르러 모든 정보는 구체화되어 발현합니다. 즉, DNA-RNA-단백질로의 정보전달은 선형적이고 그 반대로의 흐름은 성립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죠."
"그거야 그렇지. 일종의 초기 중심원리에 대한 설명이지."
"그런데 초기 중심원리는... 선형적 흐름과 반대되는 케이스가 발견됐습니다. 구체적으로는 RNA에서 DNA가 만들어지는 흐름이 에이즈 바이러스 등에서 발견했고, 단백질 간 정보이동도 초기 중심원리에선 불가능하다고 알려져 있었는데 깨졌죠."
"흠. 광우병을 일으키는 프리온 단백질은 DNA나 RNA 없이도 단백질 간 정보이동이 가능하니까 깨졌다고 할 수 있지."
"기사에서 찾아본 바로는 신약인 X-1000도 단백질 복제로 뇌 속의 독성 단백질을 없애는 원리지요?"
"음... 그렇네."
"잘 아시겠지만 단백질 간 정보 이동은 상당한 기술적 난제가 있습니다. 특히 단백질 이동은 자연스럽지 않다는 게 문제였죠. 그런데 반대로 생각해 보면, 유일하게 깨지지 않은 센트럴 도그마의 난제. 즉, 단백질에서 RNA로 정보를 역번역할 수 있다면 치료제는 쉽게 대량 양산할 수 있고 효과도 확실해집니다."
"끙."
한서의 아버지는 얕은 신음소리를 냈다.
"결국 신약은 센트럴 도그마의 마지막 난제인 단백질에서 RNA로의 역번역 연구라고 생각합니다."
이사는 독영의 말이 끝나자 인상을 찌푸렸다.
"어떤 기사에서 봤나?"
"기사는 모호하게 독성 단백질을 건강한 단백질이 대체한다 정도로 나와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유추만으로 알아낸 것인가? 하룻밤 사이에?"
독영은 이사의 반응에서 자신의 추론이 맞았음을 직감했다.
"제 주치의가 공교롭게도 얼마 전 실종됐습니다. 이 일과 연관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이야기는 한서를 통해 들었네. 우리 회사는 신약 개발 파이프라인이 워낙 복잡한 편이라, 우리 쪽 연구 일부를 담당했는지도 모르지. 전혀 아닐 수도 있고 말이야."
"주치의가 담당했던 게 어떤 연구였는지 알 수 있습니까?"
"그야 대략적인 것은 알아낼 수는 있지. 그런데 자네가 유추한 신약 개발의 원리는 감탄할 만 하네만, 지저인에게 받은 자료와는 대체 무슨 상관이 있는 걸까?"
방금 전 이사는 독영의 요구에 잠시 망설이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그리고 마치 정보를 거래하듯 자료의 의미를 추궁하고 있다고 느꼈다. '종욱의 실종'에 대한 단서를 얻기 위해선 더 깊이 이사의 환심을 살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지저인들이 코인로커에 남긴 소수 체계에 대한 자료는, 정확히는 센트럴 도그마에 대한 은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