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따님 오셨습니다."
수행비서로 보이는 인물의 목소리가 들렸다. 노인은 '아무쪼록 즐거운 시간 되시게...'라고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한서가 다시 옆자리에 앉을 때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그 정체가 뭔지를 아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장례식장에서 맡을법한 국화향. 그녀가 끌고 온 향기였다. 그는 고개를 돌려 노인을 안내하는 비서의 손을 봤다.
어두컴컴한 노란 조명아래 손바닥에 새겨진 별모양의 푸른 문신!
친구의 진료실을 방문한 제약회사 관계자도 비슷한 문신을 하고 있다는 걸 떠올랐다.
"아빠랑 무슨 이야기했어요?"
"어? 어! 연주가 어땠냐고 하시더군."
"그래서 뭐라고 했어요?"
"수석 바이올린 나비넥타이가 비뚤어져 있다고 했어."
그녀는 '어머.'라고 말하더니 '쿠쿡'하며 웃었다. 곧 2부가 시작되었다. 독영은 멀찌감치 떨어져 앉은 한서의 아버지와 그의 비서를 바라봤다. 비서는 뭔가를 보고하듯 귀엣말을 했고 그는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국화 향기와 문신은 제약회사가 친구의 실종과 모종의 연관이 있으리란 강한 의심을 갖게 했다. 하지만 우연이 만들어낸 심증일 수도 있다.
일단 친구와 계약한 제약회사 연구 내용이 무엇인지 독영은 모른다. 또 한서 아버지가 임원으로 있는 회사가 이 사건과 관련이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종욱이 사라진 뒤 독영은 연구를 의뢰한 제약회사에 대해 찾아봤지만, 제약회사와 관련해 공개된 내용이 거의 없었다. 신약을 개발 중인 회사는 무척 복잡한 지배구조를 가지고 있었고 산하에 있는 랩과 신약 파이프라인 역시 실타래처럼 얽혀 있어 개인이 추적하기엔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독영은 사라진 친구를 떠올렸다. 단서를 찾아야 했지만 친구는 말 그대로 증발하듯 사라져 버렸다. 남긴 것이라곤 88이 새겨진 담배 한 개비뿐. 그리고 지나가 남긴 '888'이란 숫자를 떠올린다. 폐기 단계를 멈추고 단서를 파고들려면 모든 사건의 시작과 함께 그를 찾아온 매니저 지나를 찾는 방법이 유일해 보였다. 지나에 대한 생각에 이르렀을 때쯤 한서의 남자친구가 협연자로 무대에 걸어 나왔다.
유명 피아니스트 답지 않게 처음부터 얼어붙은 모습이 선명했다. 의자에 앉자마자 손수건으로 식은땀을 연신 닦아냈다. 멀리서도 떨리는 손가락이 보였다. 유튜브에서 감상한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은 일반적인 피아노 협연곡과 달리 피아노가 오케스트라를 깨운다. 피아니시모로 멀리서 울리는 종소리가 포르티시모로 점점 커지며 관객의 주의를 빨아들인다. 그리고 오케스트라와 함께 본격적인 노래가 시작된다.
하지만 떨리는 손가락을 의식한 그는 처음부터 강하고 불안정한 터치를 했다. 러시아 정교회의 아득한 종소리가 아니라, 밥 먹는 시간을 알리는 노예선의 종소리처럼 경박했다. 템포를 놓쳤고, 심지어 오케스트라를 따라오지 못해 연주를 얼버무리는 부분마저 있었다. 그는 분명 무언가에 쫓기고 있었다.
연주가 끝났다. 관객들 모두 끝나서 다행이라고 큰 한숨을 몰아쉴만한 시간이었다. 그때 홀로 일어서서 박수를 치는 여자가 있었다. 관객의 시선이 쏠렸다. 독영은 방금 전 포르셰 안에서 피아니스트와 키스하던 여자임을 알아봤다. 한서의 남자친구는 크게 당황하여 무대에서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사라져 버렸고 준비한 앙코르곡조차 취소된 채 정기 연주회는 마무리되었다.
한서 역시 이상한 낌새를 느꼈는지 공연장에 불이 켜지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남자친구가 사라진 커튼 뒤로 뛰어갔다. 하지만 스태프의 제지로 밀려났다. 독영은 '밟을 필요조차 없도록 떨어트린 나비'를 떠올렸다. 한서는 아버지에게 달려가 보채듯 무언가 말을 했고, 그는 그제야 비서에게 뭔가를 지시했다. 비서는 그녀를 제지한 스태프에게 노인을 가리키며 몇 마디 말을 주고받았다. 그 뒤에야 무대 뒤편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독영이라고 했던가?"
공연장을 나와 주차장으로 향하려는데 뒤에서 한서의 아버지가 그를 불러 세웠다.
"한서가 나오면 집까지 부탁하네. 오늘 운전은 위험할 듯해서 딸내미 차는 가져가라고 했거든."
"무슨 일인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설명할 게 뭐 있겠나. 나비넥타이를 똑바로 매지 않은 탓이지."
그는 대수롭지 않은 어투였다.
"술을 마시고 싶다고 하면 함께 마셔주게. 집에 들어가기 싫다고 하면 근처 5성급 호텔이라면 아무 곳이나 재워주면 돼. 술을 많이는 못하는 녀석이니 잠든 뒤에도 함께 있어주면 좋겠군. 비용은 이 카드로 하게."
"왜... 제가?"
"굳이 말하자면... 자넨 한서가 믿고 따르는 선배 아닌가? 게다가..."
그는 카드를 흔들며 말을 이었다.
"신사로 보이니 말이야. 그 정도 친절을 베풀기 어려운가?"
"그전에 오늘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고 싶습니다."
"으음. 한서 말로는 뭐든 묻거나 따지는 법이 없는 사람이라던데... 변화가 있는 것인가?"
독영은 멈칫했다.
"다들 변화가 좋은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변화란 전쟁을 의미하는 것이네. 전쟁은 만물의 아버지라고 했던 헤라클레이토스 말처럼... "
그는 지하 개미굴에서 만난, 계약 담당자였던 티토, 즉 티의 질문을 떠올렸다. 티는 만물은 유전한다, 같은 강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는 등의 말을 하며 한서의 아버지처럼 전쟁은 만물의 아버지란 말을 읊조렸다. 티가 긍정적인 의미로 아포리즘을 사용한 데 반해, 한서의 아버지는 정반대로 적대적이란 차이가 있었다.
그때 노인의 곁으로 지휘자와 넥타이를 비뚤게 맨 악장이 허겁지겁 뛰어왔다. 노인은 '자, 그럼'이라고 말하며 처음 보는 디자인의 신용카드를 독영의 윗주머니에 꽂고는 뒤돌아섰다. 그가 카드를 되돌려주려는 데, 눈물이 번진 한서가 터덜터덜 걸어 나왔다. 그녀는 무너지듯 독영에게 기대 왔다.
희미한 달빛 아래 방안의 명암이 두드러져 보인다. 어두컴컴한 호텔 스위트룸 바닥에 널브러진 위스키 보틀이 보였다. 독영은 기억을 되돌려봤다. 계속 쓰러져 훌쩍이는 한서를 부축하듯 달래서 근처에서 제일 큰 호텔로 갔다. 프런트 컨시어지에게 노인이 준 카드를 내밀자 호텔지배인이 호출됐고 마치 미리 예약해 놓은 듯 스위트룸으로 안내를 받았다. 주문하지도 않은 호화로운 룸서비스 음식이 연이어 들어왔다. 한서는 독영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독한 위스키를 몇 잔이나 마셨다. 독영은 금단증세가 일어나는 듯했지만, 한서를 내버려 두고 집에 가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독영은 정신을 잃듯이 까무룩 잠들었고 잠시 후 눈을 떴을 땐, 미처 걷히지 못한 안개만 떠돌 뿐이었다.
그는 소파에서 일어나 침실방으로 건너갔다. 한서는 옷을 입은 채로 어둠 속에 잠들어 있었다. 어쩐지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떨리던 몸을 아기처럼 웅크리고는 조용히 숨을 쉰다. 어깨 부분을 토닥토닥 두드려본다. 그녀는 깨지 않는다.
독영은 몸을 돌려 카펫에 나뒹구는 술병과 룸서비스 음식을 정리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때 그녀가 어깨에 올린 손을 잡았다. 그리고 늘 있어왔던 일처럼 손을 가슴으로 이끈다. 부드러운 촉감이 전해온다. 그녀는 그대로 기도하듯 두 손을 포개 잡았다. 작고 여린 심장박동이 느껴진다.
잠에서 깬 것은 아닐까 했지만 조용히 내쉬는 숨결은 규칙적이었다. 심장소리와 숨의 규칙적인 움직임, 그리고 따뜻하면서도 부드러운 그녀의 내면은 최면에 빠져들 듯 나른한 기분을 느끼게 했다. 그가 천천히 눈을 감자, 감각은 배가된다.
아름다운 그녀가 밀어내는 더운 피가 그대로 손을 통해 몰려오는 듯했다. 차갑게 식어있던 몸은 일순 뜨거워지고 몸 안 구석구석 피가 돌아나간다. 한동안 그 생명을 느껴본다. 심장박동이 그녀에게 동조된다. 아득한 곳에서 푸른 입자가 떠오른다. 그것들은 반짝반짝 빛을 내며 그를 감싼다. 그리고 나타난 빛의 환영! 눈을 뜬다.
그녀는 밝게 빛나고 있었다. 손이 포개진 심장에서 뻗어 나온 빛줄기가 팔을 타고 내 몸까지 이어진다. 고개를 흔들며 잠에서 깨려 했지만 그것은 꿈이 아니었다. 실존하는 눈부심, 태양을 마주한 것 같은 뜨거운 빛이다. 빛 알갱이들은 붓 터치 하나하나가 픽셀처럼 표현된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에'처럼 천천히 소용돌이 치며 한서와 그의 몸을 휘돌기 시작했다.
"선배는 나를 좋아해요?"
한서가 꿈을 꾸듯 입을 열었다.
"좋아해. 너를. 하지만... 지금은..."
한서는 그의 손을 끌어안듯 잡는다.
"괜찮아요. 이젠 혼자인 걸요."
뜨거운 빛 덩어리가 부서지는 파도처럼 밀어닥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