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연결, 노드, 88 담배

12화

by 뮤즈노트

'베란다 창에 맺힌 빗물에서 패턴이 보여.'

'무질서는 질서에 기반해요.'

"모든 우연은... 연결되어 있다..."

'888.'

'넌 순도 백 퍼센트의 천재일지 몰라.'

'별 모양의 문신'

'네트워크의 링크(link)를 잇는 노드(node) 일뿐...'

굴러 떨어지는 송아지와 지나의 명함 속 '8'


"정해진 운명이 있고 그 설계도에 이미 끼어들어가 있다!"


독영은 떠다니는 목소리와 이미지에 괴로워하다, '헉'소리를 내며 소파에서 잠이 깬다. 온몸은 땀으로 젖어 있다. 머리를 감싸 쥔 채 혼란의 폭풍이 사라지길 기다렸다. 증세가 심해지고 있다. 친구인 종욱의 권고처럼 약을 끊어도 될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냥 참고 견딜 수준의 혼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휴대폰을 들어 시계를 본다. 새벽 3시 35분. 휴대폰엔 2개의 톡과 1개의 문자가 와 있었다. 그는 약을 물과 함께 삼키고 소파로 돌아와 문자를 확인했다.


선배님, 친구분과는 즐거운 저녁 되셨나요? 제가 할 말은 아니지만 혹시라도 보험이나 서비스 가입 때문에 만나자고 했다면 거절하세요. 지난번 퇴직하고 찾아온 후배에게 가입한 보험도 이상한 상품이었잖아요. 정작 그 후배는 지난달에 보험사 그만뒀다더라고요. 그런 거 거절 못하시길래 말씀드려요~ 내일 봬요. ^^


독영은 지금, 한서가 곁에 있었으면 하고 생각했다. 그녀의 판단은 언제나 옳았다. 인간관계도 맺고 끊음이 명확하다. 그러면서도 모두에게 사랑받는다. 한서의 무릎에 누워 그녀가 머리를 쓰다듬어준다면 혼란스러움이 정리될 듯싶었다. 그녀 얼굴의 아름다운 굴곡이 떠올랐고, 장미꽃을 머금은 듯한 숨결이 그리웠다. 하지만 그녀에겐 귀족적인 풍모의 남자친구가 있다. 늘어난 티와 오이비누 향을 풍기며, 도움이 없다면 애프터조차 받지 못하는 자신과 연결지점은 없는 것이다. 한숨을 내쉬며 다음 톡을 확인했다.


집에는 들어가셨어요? 회사일로 지쳐있는 데다가 비까지 내려 망설였는데, 어쩐지 마음을 탁 놓게 돼서... 엉뚱한 이야기를 했는데도 잘 들어주셔서 고마워요. 오늘 즐거웠어요.


두 번째 메시지는 플랜트 설계사인 소개팅녀가 귀가 후 보내온 톡이었다. 독영은 얼굴을 떠올리려 했는데, 이목구비보다 테이블에 팔을 대고 편안한 웃음을 짓던 이미지가 떠올랐다. 마지막 문자 메시지를 확인했다.


맑은 하늘이네요. 서울엔 며칠만 가능한 날씨.
- 사무실에서 일하느라 오늘 하늘을 못 봤어요. 손해 본 느낌이네요.

- 오늘은 밤늦게까지 비가 오네요. 빗물이 떨어지는 한강은 어쩐지 본 기억이 없는데...


한서, 플랜트 설계사, 지난 소개팅 상대였던 은행원까지. 세명의 여성에게 온 메시지를 읽던 그는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느낀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변화의 시발점은 지나였다. 곧이어 급격히 불어나 버린 세명과의 관계를 어떤 식으로 하면 좋을지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애초에 상상밖의 일이었으므로 살피지 못했던 일이다. 게다가 오랜 시간 떠안고 있던 정신과적 문제가 악화되고 있다는 게 시급한 문제였다.


출근 전, 독영은 몸살을 핑계로 회사에 휴가를 냈다. 그리고 친구 종욱에게 약 문제를 상담하기 위해 전화를 걸었다. 이상하게도 '없는 번호'라는 안내가 흘러나왔다. 병원으로도 전화를 했지만 간호사는 '지금은 통화가 어렵다.'고만 반복했다. 그는 친구가 출근했는지 물었다.


"그게... 좀... 전화로 말씀드리기가... 만약 처방 때문이면, 다른 선생님도 가능하니까 내원해 보시는 게 어떨까요."


외곽 도로가 막히는 바람에 교외의 요양 병원 주차장에 도착했을 때는 점심시간을 넘긴 뒤였다. 노인 환자들이 간병인과 가족의 도움을 받아 잔디밭을 산책하는 모습이 전보다 유독 많아 보였다. 간간이 기쁨의 웃음소리도 들려왔다. 1층은 원무과와 진료실이 있었으나 직원들은 점심 뒤 복귀 전이었다. 그는 대기 의자에 앉아 친구가 있던 1번 진료실 문을 바라본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고 진료실로 들어갔다.


'변화'


모든 것은 그대로인 듯했지만 변화가 느껴진다. 서가에 꽂힌 전문서적들, 암호 다이얼이 달린 녹슨 철제 캐비닛, 컴퓨터와 보조로 사용하는 노트북. 그는 하나씩 확인해 갔다. 테이블에 놓인 모니터에 시선이 꽂힌다. 모니터 받침대 아래 담배 한 개비가 놓여 있다. 마치 발견되길 바라는 듯, 그가 앉는 소파좌석을 향해 있었다. 문밖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점심을 마친 직원들이 업무를 준비하기 위해 들어온 듯했다. 그는 담배를 윗주머니에 챙겨 넣었다. 문밖을 나오려다 자신이 앉던 소파 아래를 살폈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어머! 놀래라."


진료실 문을 열고 들어오던 간호사가 가슴을 잡으며 말했다.


"미안합니다. 약을 바꾸기로 했는데 증세가 심해져서요. 친구를 기다리는 중이었어요."


다행히 해당 진료실 담당 간호사는 그의 얼굴을 알아봤다.


"아... 그러셨구나. 그런데 진료는 어려울 것 같아요."

"친구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요? 아니면 어디 아픈가...."

"그게... 사실..."


간호사는 한동안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지난주에 퇴사하셨어요."

"퇴사요?"

"네. 저희도 갑작스러워서... 지난주, 금요일 밤 당직 근무자에게 전화 와서 퇴사하겠다고 말하고 끊어서... 병원에서도 처리를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해하고 있어요."

"집은 가봤나요?"

"네. 저랑 행정 과장님이랑 월요일에 가봤어요. 댁이 병원 근처에 있거든요. 그런데 텅 비어있었어요. 이사 나간 것처럼 벽지랑 바닥 밖에, 가구도 옷가지나 작은 휴지조각조차 없었어요. 그래서 이번 주까지 기다려보고 결정하자고..."


다른 의사가 처방해 준, 용량이 늘어난 약봉투를 든 채 병원 주차장으로 터덜터덜 걸어 나왔다. 시트에 걸터앉은 독영은 친구가 남기고 간 담배를 꺼내 들었다. 오랫동안 보관해 온 듯 종이가 말라 바삭한 느낌이 전해졌다.


[한 대 피우고 나서 선택해야지 생각하고 있었어]


지난 방문에서 친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중학교 시절 부모님의 기대와 압박에 못 견디겠다 생각했을 때 담배를 들고 있었다. '담배는 무언가를 암시하는 것일까?' 야산에서 꿩이 우는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지난주 스쳐간 제약회사 직원이 떠올랐다. 향내를 풍기는, 전혀 이쪽 세계의 사람 같지 않았던 남자. 연구를 발주한 제약회사와 복잡한 법률상, 업무상 갈등이 있었는지 모른다. 그렇다곤 해도 괴로움에 극단적인 선택을 할 사람은 아니란 걸 안다. 단 하나밖에 남지 않은 친구가 사라지자 혼란함과 무력감은 배가됐다. 동시에 기시감을 느꼈다. 뭔가를 상실하기 전 경고를 하듯 찾아오는, 어떤 징조로서의 혼란함. 물론 감정의 기원에 대해서는 기억이 없다. 담배를 만지작 거렸다. 그때 눈에 들어온 것은 파란색으로 선명하게 찍힌 '88'이란 숫자였다.


'88 담배?'


죽은 소의 목덜미에 찍힌 8,

지나가 메모한 888과 그녀가 건넨 명함 속 8,

그리고 친구가 단서처럼 남긴 88 담배.


동시에 지난주 종욱이 건넨 말이 떠올랐다.


[우연한 것처럼 보이는 사건도 모두가 연결되어 있는 법이야.]

[너에겐 구원자로서의 특별한 능력이 있어.]


'8이란 숫자에 집착하는 것은 지금껏 앓고 있는 병증일 수도 있다. 그러나 만약 우연이 아니라 연결되어 있는 것이라면? 베란다 창에 맺힌 빗방울들의 패턴처럼, 무질서 속에 질서가 있는 것이라면? 사라진 친구가 남긴 담배, 둘 만의 추억을 이용해 내게 보내는 구조 신호라면?'


독영은 어떤 끈도 놓쳐선 안 될 상황이라 생각했다. 그것이 부모님의 죽음과 같은 또 다른 상실이 찾아오기 전의 전조와 닮았다면, 정체를 파악해 내야 했다. 무기력하게 사랑하는 사람과 기억을 또 잃을 순 없기 때문이다. 독영은 지나가 건넨 명함을 꺼내 들었다. 현재로선 방사형으로 뻗어나간 사건들을 잇는 노드(node)로서, 지나가 유일하다는 걸 떠올렸다. 그녀의 등장 이후로 일상은 조금씩 소리를 내며 균열을 일으키고 있다. 내비게이션에 명함 속 주소를 입력한다.


독영은 크게 숨을 들이 쉰 다음 엑셀레이터를 밟는다.

keyword
월, 화, 수, 목, 금, 토, 일 연재
이전 11화데이트 당일에 벌어진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