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호 '대한민국'이 지어진 그날
5월이면 대한민국에 새로운 정부가 출범할 텐데요. 지금으로부터 100년도 전인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해에서 ‘대한민국’ 국호가 지어지며 우리 역사상 최초의 민주 공화제 정부가 설립되었다는 사실, 알고 계셨나요?
바로 ‘대한민국임시정부’인데요. ‘임시정부’란 정식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준비 정부를 가리킵니다. 앞서 1919년 일어난 3·1운동이 바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에 결정적 역할을 했습니다. 계층과 신분을 넘어 전개된 만세운동은 독립운동을 능률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조선인의 정부’가 수립될 필요성이 부상하는 계기가 되었죠.
이 같은 분위기 속에 연해주에서는 손병희를 대통령으로 하는 대한국민의회가 조직되었고, 중국 상해에서도 임시정부를 수립하여 이승만을 국무총리로 추대하였습니다. 국내에서도 이승만을 집정관 총재로, 이동휘를 국무총리로 하는 한성정부를 수립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상해 임시정부의 경우 1919년 4월 10일, 29명의 임시의정원 초대 의원들이 광복을 염원하며 ‘대한민국’ 국호를 짓고, 다음 날인 4월 11일, 임시헌장을 선포하며 탄생하였습니다. 임시헌장은 대한민국 최초의 헌법이기도 합니다.
이후 자연스레 각기 임시정부가 통합되는 방향으로 나아갔고, 그 결과 1919년 9월 11일,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공식 출범하였는데요. 헌정 체제는 입법기관인 ‘임시의정원’, 사법기관인 ‘법원’, 행정기관인 ‘국무원’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우리 역사상 최초로 3권분립 원칙에 입각한 민주 공화제 정부가 탄생한 것이죠.
대한민국임시정부는 국내 독립운동을 지도하고, 군자금 마련을 위해 비밀 행정조직을 조직했습니다. 국내와의 비밀연락을 목적으로 하는 ‘연통제’에 따라 국내에 비밀 행정기관을 두어 명령을 전달하였으며, 통신 기관으로 ‘교통국’을 두어 국내외의 정보 수집, 분석 등을 진행했습니다. 또한, 자금 마련을 위해 독립 공채를 발행하고, 의연금을 거두기도 했는데요. 이 자금은 연통제나 교통국 조직망을 통해 임시정부로 전달되었습니다.
외교 활동도 활발히 전개했습니다. 신한청년당 대표로 파리에 파견된 김규식을 전권대사로 임명하여 제1차 세계대전 승전국이 개최한 파리강화회의에서 조선의 독립 의지를 알리도록 했습니다. 열강의 군축 문제를 다루는 워싱턴 회의가 열렸을 때는 동포들을 통해 독립 열망을 전달했죠. 또한, 미국에 구미위원부를 두어 이승만을 중심으로 외교 활동을 벌였습니다. 기관지 『독립신문』을 발행해 독립 의식을 고취하기도 했습니다.
무장투쟁을 준비하기도 했는데요. 그러나 재정 문제로 무관학교는 폐쇄되었고, 만주지역 독립군과의 연락도 두절 되어 투쟁을 원활히 지도하기 어려웠습니다. 한편, 1921년에는 임시정부의 비밀 행정조직이 발각되어 국내와의 연락이 끊겼는데요. 당시 임정 지도부에도 문제가 있었습니다. 대통령 이승만은 미국에 오래 머물며 지도력을 발휘하지 못했고, 국무총리 이동휘도 노선갈등을 해소하지 못한 채 결국 임시정부를 탈퇴했습니다.
이렇듯 임정의 활동이 침체하자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했던 신채호는 무장투쟁에 주력할 것을 주장하며 방향전환을 제안했습니다. 이에 안창호가 주축이 되어 ‘국민대표회의’를 소집했고 1923년 1월, 상하이에 국내외 독립운동단체 대표 100여 명이 모여 다섯 달 동안 회의를 열었는데요. 임시정부를 개선하여 존속하자는 주장과 폐지하자는
주장의 입장 차는 좁혀지지 않았고 결국, 일부 세력이 임시정부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독립운동의 중추 기관으로 역할 하는 데 차질이 생기자,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체제 변화를 꾀했습니다. 대통령 중심제에서 ‘내각 중심 국무령 체제’로, 그리고 ‘국무위원 중심 집단지도 체제’로 바꾸었죠. 어려운 상황 속에서 임정을 지킨 대표적 인물은 김구였습니다. 위 전단의 제목은 ‘국내외 동포에게 고함’으로, 그가 새 국가 건설의 이상을 정리하여 국내외 동포에게 선언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결국 하나의 개별 독립운동 단체의 위상을 넘어서지는 못했습니다. 통치권을 행사할 대상이 없었으므로 국제법상의 정부와 성격이 달랐던 것 역시 사실입니다. 그러나 3·1운동 정신을 계승하며 민족 의지와 이념적 기반 위에 설립된 ‘정부적(的)’ 조직임은 틀림이 없으며, 1945년 광복까지 상하이를 비롯한 각처에서 자유를 위해 투쟁했습니다.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을 수 있는 밑거름이 된 만큼,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글·기획 | 대한민국역사박물관 한걸음기자단 8기 양여진
내용 출처 |
- 『한국사』, 고려대학교 한국사연구소 편, 새문사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대한민국임시정부 [大韓民國臨時政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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