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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한민국역사박물관 Apr 14. 2022

우리나라 최초의 민주혁명, 4·19 혁명을 살펴보면서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개념이 아닌 국민의 개념인 대한국민'

우리나라는 법치국가(法治國家)입니다. 법치국가의 뜻은 ‘국민의 의사에 따라 제정된 법을 기초로 해서 권력을 행사하는 국가’인데요. 따라서 법치국가는 헌법이 매우 중요합니다. 헌법에 따라서 각종 법률을 만들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의 헌법은 1948년 5월 10일, 5·10 총선거를 통해 당선된 제헌 국회의원이 헌법을 처음 만들었습니다. 이후 현재까지 헌법은 총 9차례 개정됐는데요. 가장 최근은 1988년으로, 현재는 9차 개정헌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 전시된 5·10 총선거 포스터)


법치국가의 기틀인 헌법. 헌법 중에서도 전문은 헌법과 국가의 사상, 이념 등을 포괄하기 때문에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나라의 헌법 전문은


悠久한 歷史와 傳統에 빛나는 우리 大韓國民은 3·1運動으로 建立된
大韓民國臨時政府의 法統과 不義에 抗拒한 4·19民主理念을 繼承하고

입니다. 이걸 한글로 표기하면,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입니다. 풀어쓰자면,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개념이 아닌 국민의 개념인 대한국민’,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와 4·19 혁명의 이념을 계승한다’라고 나와 있습니다.


(국립 4.19 민주묘지)


오늘 우리가 살펴볼 단어는 바로 4·19 혁명. 우리나라 최초의 민주혁명으로 후에 있을 4·19 혁명과 6월 항쟁의 정신적 지주이기도 했는데요. 4·19 혁명은 이승만 정부 즉, 제1공화국 독재에 항거해 시민들이 일어나서 정부를 끝낸 시민혁명이기도 합니다.


3·15 부정선거로 촉발된 4·19 혁명의 의의는 국민에게 ‘민주주의 정신’을 알려준 것. 후에 있을 수많은 민주화운동의 정신적 지주이자, “해냈다”라는 의미는 끝까지 민주화운동을 할 수 있게 버틸 수 있는 원동력이 되어주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어떤 역사학자들은 8·15 광복이 ‘첫 번째 해방’이었다면, 4월 혁명은 ‘두 번째 해방’이었다고 언급합니다.


(4.19 혁명기념관)


현재 강북구 우이동 국립 4·19 민주묘지에는 4·19 혁명과 관련된 사료(史料)를 전시한 4·19혁명기념관과 함께 당시 순국했던 이들의 묘소가 있습니다. 민주주의를 위해 희생한 이들을 위해 잠시 묵념하고, 인근에서 151번, 109번 버스를 타고 경복궁, 조계사에서 내려 도보 10분,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소개하는 4·19 혁명 당시의 이야기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국립 4·19 민주묘지 기념탑과 묘소)


대한민국역사박물관 5층, 상설전시관에서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 관련 자료를 관람하고 오면, 민주주의와 관련된 코너가 하나 보입니다. 바로 4·19 혁명과 이후의 상황을 담고 있죠,


짧고 굵게 설명하고 있는데, 사료(史料)를 같이 보면, 부정선거를 보여주는 유권자 명부가 있습니다. 4·19 혁명의 도화선인 3·15 부정선거. 당시 선거에서는 유권자를 9명과 3명으로 나누어 조를 만든 다음, 조장을 표시했습니다. 이를 통해 투표과정에서 공동투표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데, 선거의 4대 원칙인 ‘비밀선거’를 무시한 것이죠.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 전시된 유권자 명부)


두 번째는 3·15 부정선거로 촉발된 4·19 혁명 당시, 4·19 혁명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한 4·19 세대의 일기입니다. 1960년, 명성여고 2학년이었던 기증자의 일기인데요.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겠다고 밝힌 4월 26일 일기로, 기증자는 태극기를 들고 참가했으며, 최선두에 섰던 지프에 올라 ‘우리의 주권을 다시 찾아야 합니다’라고 외쳤다고 합니다.


(명성여고 2학년이었던 기증자의 일기)


아래 사진은 4·19 혁명 당시 고대생 습격사건으로 학생들이 정치깡패에 의해 피를 흘린 모습과 4·19 혁명의 상징 중 하나인 학생들의 시위, 대학 교수들의 시위 모습을 잘 담아냈습니다. 4·19 혁명 사진 왼쪽에는 5·16 군사정변 후 정권을 잡은 군부의 모습을 사진으로 담아냈는데요. 초기 군부를 반겼던 대부분의 국민은 이후 약속을 지키지 않고 정권을 잡은 군부에 반감, 길고 긴 민주화운동에 나서게 됩니다.


(4·19 혁명과 5·16 군사정변 이후 사회의 모습을 담은 사진)


누군가는 4·19 혁명을 ‘절반의 성공’이라고 말합니다. 1년 뒤 군부쿠데타로 완벽하게 민주 정부가 구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데요. 하지만, 우리나라 최초의 민주혁명으로써 우리나라가 ‘민주공화국’임을 전 세계에 보여줬기에, 4·19 혁명이야말로 의미 있고, 값진 우리의 역사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글·기획 | 대한민국역사박물관 한걸음기자단 9기 조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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