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사회와 협력해 일제 침탈에서 벗어나고자 노력한 이들, 헤이그 특사.
오늘 기사에서는 대한제국 시기 처음으로 국제 사회와 협력하여 일본의 침탈에서 벗어나고자 노력한 이들, 바로 헤이그 특사의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일제는 러일전쟁 도발 이후 한국을 병합하려 외교활동을 벌였습니다. 구미 열강이 침략을 묵인하도록 조처하고 1905년 11월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했죠. 고종은 조약의 불법성을 해외에 호소하며 일본을 몰아내려 했습니다. 미국의 헐버트(Hulbert, H. B.) 박사에게 전보를 보내 조약 반대 운동을 벌인 것도 이즈음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06년 6월, 고종은 일제의 침략을 호소하고 을사조약의 무효를 주장하고자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했는데요. 우선, 회의가 어떻게 열리게 되었는지 배경을 이야기해볼까요?
19세기 말, 당시 서구 열강은 군비 증강에 한창이었습니다. 한편, 러시아는 사회주의 혁명과 재정 위기로 혼란을 겪고 있었는데요. 이때 독일이 병력 증강을 추진하며 군비축소를 위한 국제회의의 필요성을 절감한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발제로 제1차 헤이그 만국평화회의가 개최됩니다. 회의 결과, 26개국 대표들이 모여 ‘국제분쟁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조약’에 관한 선언을 채택하는 등의 성과가 나왔는데요.
1904년, 유럽 세력에 도전하던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는 2차 회의를 개최하려 했으나 러일전쟁으로 뜻을 이루지 못합니다. 그리고 1905년 9월, 열강이 세력균형을 위해 니콜라이 2세가 회의를 재추진하는 것에 찬성하며 2차 회의가 개최되었습니다. 그리고 1906년 6월, 니콜라이 2세가 극비리에 고종에게 초청장을 보내오며 특사가 파견됩니다.
▲ 이준이 헤이그특사로 파견되기 전 쓴 시와 고종의 밀서.
시문은 학문을 구하기를 봄에 비를 바라는 것과 같이 절실히하고 마음은 밤에 우뢰를 듣는것 같이 항상 조심하라는 내용
[출처 :근현대사 디지털 아카이브]
밀파된 특사는 전 의정부참찬 이상설, 전 평리원검사 이준과 주로한국공사관 참서관 이위종으로 모두 3인이었습니다. 이외에도 헐버트를 비롯해 박용만, 윤병구, 송헌주도 일행을 도왔죠. 당시 이상설은 회의 개최 1년 전부터 한국을 떠나 북간도에 머무르고 있었습니다. 이준은 1907년 4월 서울을 떠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그를 만났고, 두 특사는 6월 중순, 러시아 페테르스부르크 (지금의 상 페테르부르크)에 도착, 이위종과 합류했습니다.
6월 25일, 헤이그에 도착한 특사단은 즉시 활동을 시작합니다. 우선, 회의에 한국 대표로 공식 참석하고자 의장인 러시아 대표 넬리도프 백작과 네덜란드 외무대신 후온데스에게 도움을 청했는데요. 넬리도프틑 형식상 초청국인 네덜란드에 책임을 넘겼고, 후온데스는 각국 정부가 을사조약을 승인한 이상 한국 정부의 외교권을 인정할 수 없다며 회의 참석과 발언권을 거부했습니다. 미국·프랑스·중국 등 각국 대표들 역시 모두 외면했는데요.
특사단은 하는 수없이 비공식 경로로 한국의 입장을 담은 공고사를 의장과 각국 대표에게 보내고, 전문을 『평화회의보』에 발표했습니다. 또한, 7월 9일 영국의 저명한 언론인 스테드(Stead, W. T.)가 주관한 각국 기자단의 국제협회에 참석, 발언 기회를 얻습니다. 외국어에 능통했던 이위종은 한국의 참상을 알리는 ‘한국의 호소(A Plea for Korea)’를 절규하며 공감을 샀고, 즉석에서 한국의 처지를 동정하는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의결하기까지 하였죠.
하지만, 일본의 방해로 특사단은 결국 회의에 참석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일본 통감부에 의해 세 밀사에게 종신 징역형이 선고되었는데요. 격분한 이준은 통분을 누르지 못하여 헤이그에서 순국하고 맙니다. 7월 14일, 이준을 묻어 주고, 특사 일행은 평화회의가 끝난 후에도 구미 각국을 순방하며 외교를 펼쳤습니다.
훗날, 이준은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고, 이듬해 헤이그에서 유해를 옮겨와 국민장으로 서울에 안장했으며, 장충단공원에 동상이 건립되었습니다. 이위종은 러시아에서 활동하다 숨졌는데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수여되었으나, 아직 그의 말년 행적은 연구 대상으로 남아있습니다. 이상설은 국권 회복을 위해 노력하다가 1917년 3월, 니콜리스크에서 숨졌고,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습니다.
한편, 사건을 접한 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고종에게 책임을 추궁, 강제 퇴위시키고 순종을 등극시켰습니다. 또한, 정미 7조약을 체결하고, 이어서 언론탄압을 위한 「신문지법」과 집회, 결사를 금지하는 「보안법」을 공포, 군대 해산령까지 내리며 결국 대한제국을 무력화시켰습니다.
이처럼, 제국주의 세계질서에서 열강 간 평화가 목적이었던 만국평화회의 성격상, 외교권을 잃은 한국의 특사단이 목적을 달성하기는 처음부터 힘들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한국이 주권 회복을 위해 분투하고 있으며, 을사조약이 무효임을 열강에 최초로 알렸다는 점에서 그 의미는 너무도 큽니다.
이번 기사를 통해 나라를 지키고자 마지막까지 힘을 다한 이들의 뜻을 기리는 시간을 가져보시길 바랍니다!
글·기획 | 대한민국역사박물관 한걸음기자단 9기 양여진
사진출처 | 본문 이미지 하단 표기
[참고문헌]
- 고려대학교 한국사연구소, 2017, 『한국사』, 새문사
-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헤이그특사사건 [─特使事件])
- 전일욱. (2014). 대한제국의 헤이그만국평화회의에의 특사파견과 시사점. 한국행정사학지, 34(0), 29-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