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산책은 마음의 발걸음을 맞추는 시간이야.

길 위에서 배우는 약속

by 소담



이 글은 반려견인,
라울이의 시선에서 바라본 세상 이야기입니다

【 내 이름은 라울, 나는 반려견이다 】

2부- 웃음과 사건이 있는 일상
열두 번째 이야기- 산책은 마음의 발걸음을 맞추는 시간이야.


꾸역꾸역, 귀찮은 몸을 이끌고 문 밖으로 나선다.

‘윤 집사와 함께하는 시간이 즐겁기 때문’이라는 모범 답안을 들려주면 멋질 테지만, 솔직히 그렇지 않다. 몇 번은 나가기 싫어 버텨본 적도 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윤 집사는 숨 돌릴 틈도 없이 나를 어떻게든 끌어냈다. 결국 나는 매일 저녁 산책을 한다. 궂은날엔 어쩔 수 없이 실내에 머물지만, 웬만하면 이 일과는 빠지지 않는다.

한때 내 몸무게가 10kg을 훌쩍 넘어서자, 다이어트랍시고 계단 오르기를 사흘 연속 강행한 적이 있다. 빈 몸으로 에베레스트 산에 오르라는 것도 아니고, 장비도 없이 계단을 오르라니. 그것도 며칠을 연이어하다니. 결국 나의 ‘앓는 시늉’이 통했고, 혹독한 훈련은 막을 내렸다. 참고로 나는 살찐 것이 아니다. ‘예비 연료’를 품은, 움직이는 저장탱크일 뿐이다. 다만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다. 왜 나는 물만 마셔도 살이 찔까. “맛있게 먹으면 0kcal”라는 말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귀여운 거짓말이다.

그럼에도 산책은 나를 바꾼다.

하루 종일 무료하게 지내다가도, 아스팔트의 온기가 발바닥에 스며들고, 바람이 귀 끝을 스치면 마음이 한결 편안해진다. 산책은 세상을 배우는 시간이자, 윤 집사와 유대감을 쌓는 시간이다.

봄이면 길가에 민들레가 피어나고, 꽃가루가 코끝을 간질인다. 킁킁거리며 풀숲을 살피다 종종 재채기를 한다. 여름은 조금 힘들다. 달궈진 인도가 발바닥을 찌르고, 윤 집사는 나를 번쩍 안아 그늘로 옮긴다. 가을은 낙엽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좋다. 발로 밟을 때마다 나는 괜히 힘을 더 줘 ‘바삭!’ 소리를 만든다. 겨울은 조용하지만, 숨이 하얗게 피어나는 걸 보는 재미가 있다. 그때마다 윤 집사가 내 숨을 두 손으로 감싸 “따뜻해”라고 말한다.

해가 기울어 노을빛이 길 위에 스며드는 시간, 단지 둘레길을 한 바퀴 돌면 15분 남짓. 나이가 드니 이마저도 숨이 찬다. 하지만 그 15분 동안, 나는 나뭇잎이 부딪히는 소리를 듣고, 자주 마주치는 친구들의 냄새를 맡고, 늘 보던 사람들과 눈인사를 나눈다. 그 모든 것이 작은 선물처럼 다가온다.

산책을 나갈 때는 목줄을 매고, 흥분을 가라앉혀 침착함을 유지하여야 한다. 배변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 건강하다는 증거다. 예전에 이틀 동안 배변을 못 했을 때, 가족들이 돌아가며 내 배를 마사지해 주었던 적이 있다. 그만큼 소중한 신호다. 이상하게도 밖에만 나가면, 신선한 공기와 다른 친구들의 흔적 냄새가 배변 신호를 불러온다. 소변은 말할 것도 없다. 가능한 한 높이, 넓게, 많이 표시하는 것이 목표가 된다.

배변 후에는 옆으로 살짝 물러서 윤 집사가 치우는 모습을 지켜본다. 그래야 마음이 놓인다. 가을 낙엽 위에 배변이라도 하면, 윤 집사가 한참을 찾다 결국 밟아버린 적도 있다. 날이 어두워지면 휴대폰 불빛까지 켜지만, 어째 그리 서투른지 알 수 없다.

산책로에는 나만 있는 것이 아니기에 지켜야 할 예의가 있다. 처음 보는 친구에게 함부로 다가가지 않아야 한다. 윤 집사가 “기다려”라고 하면 그대로 믿고 기다려야 한다. 어릴 적엔 세상 무서울 것 없이 덤벼들었다가, 그 대가를 톡톡히 치렀다. 가만히 있어도 당하기는 매한가지다. 얌전한 척 다가오던 치와와에게 입 주위를 물린 적도 있었고, 순해 보이던 대형견의 포효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은 적도 있다.

올여름, 골목 모퉁이에서 처음 보는 진돗개와 마주쳤다. 서로 눈빛을 주고받다가, 나는 가볍게 꼬리를 흔들었지만, 윤 집사의 손이 리드줄을 살짝 당겼다. “기다려.” 그리고 몇 초 뒤, 상대 견주가 다가와 “우리 아이가 낯을 가려서 다른 강아지가 먼저 다가오면 짖어요”하며 웃었다. 그제야 느꼈다. 기다림이 서로를 지켜주는 예의라는 걸.

서로의 약속을 존중하고 잘 지킬 때, 산책은 한층 더 즐거워진다.

작은 약속 하나가 깨지면 불편이 스며들고, 그 불편은 결국 함께할 수 있는 많은 순간들을 앗아간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사소한 약속일지라도 가볍게 넘기지 않아야 한다. 윤 집사가 위험해서 안된다고 할 때는, 정말 위험해서 그런 거다.

그렇게 약속을 잘 지켜야 관계의 온도를 따뜻하게 유지시킨다.

나는 안다. 산책은 단순한 발걸음이 아니다. 서로의 보폭을 맞추어 가는 마음의 걸음걸이다. 길 위에서 나누는 약속이 우리 관계의 온도를 지키고, 그 온기가 하루를 품격 있게 만드는 것이다. 산책이 끝나면 발걸음은 멈추지만, 우리의 마음은 여전히 길 위를 걷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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