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품기로 했다
나는 처음 이곳에 올 때 단지 두 달만 머무를 생각이었다. 논술교사 일을 정리하고 있던 시점, 친구가 “잠시만 도와달라”는 부탁을 했을 때도 그저 봉사의 연장선으로 생각했다. 바리스타 자격증도 있었고, 가족과 함께 봉사활동을 꾸준히 해왔으니 잘 해낼 수 있을 거라 여겼다. 그러나 두 달은 10년이 되었고, 그 시간은 내 삶을 완전히 바꾸어놓았다.
처음의 나는 장애를 ‘한계’라고 생각했다. 청각장애, 지적장애, 자폐 스펙트럼… 그 단어들 속에는 ‘부족함’, ‘제약’이라는 이미지가 먼저 떠올랐다. 실제로 함께 일하며 맞닥뜨린 상황은 내 안의 불편함과 편견을 드러내기에 충분했다. 점심 식탁에서 손발이 떨리던 동료를 보며 숟가락을 들지 못했던 순간, 청각장애 동료가 마스크 너머로 입모양을 볼 수 없어 소통이 막혔던 순간, 뇌전증을 가진 직원이 갑자기 멈춰 서는 모습을 보고 당황했던 순간…. 그때마다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나는 정말 그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는가?”
“나는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이 질문들은 나를 힘들게도 했지만 동시에 성찰하게 만들었다. 나는 그들을 품는다고 생각했으나, 사실은 그들이 나를 품어주고 있었다. 그들의 존재는 내 안의 한계를 드러내며 또 다른 가능성으로 나아가게 했다.
그 과정 속에서 내가 시도한 작은 실험이 있다. 바로 아침 10분 토론이다. 《날씨가 좋으면 찾아가겠어요》라는 소설 속 책방 장면에서 아이와 어른이 함께 토론하는 모습을 보고 “우리 직원들도 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의문이 시작이었다. 토론이라고 해서 거창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질문 하나를 던지고, 그에 대한 생각을 나누는 짧은 시간이 전부였다.
“살면서 가장 스스로를 칭찬하고 싶었던 순간은 언제인가요?”
“내일 죽는다면 무엇을 하고 싶나요?”
“10년 후, 나는 어떤 모습이 되어 있을까요?”
처음에는 질문을 이해하지 못해 한참을 설명해야 했고, 어떤 직원은 대답을 며칠이나 곱씹은 끝에야 내놓았다. 때로는 답을 하지 못하고 그저 침묵하는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나는 알았다. 중요한 건 즉각적인 대답이 아니었다. 그 질문을 마음에 품고 스스로 생각해 보는 경험, 그것만으로도 이미 변화가 시작되고 있었다.
나는 토론다운 토론을 원한 것이 아니었다. 단순히 맞고 틀림을 가리는 논쟁이 아니라, 진심으로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 이야기 속에서 다시 질문을 발견해 건네고 싶었다. 누군가 대신 답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답을 찾아가도록 곁에서 기다려주는 것이 내가 바랐던 토론의 모습이었다.
시간이 흐르며 직원들의 눈빛은 달라졌다. 손을 들지 않던 이가 발언을 시작했고, 끼어들기를 참지 못하던 이가 차분히 기다릴 줄 알게 되었다. 한 문장을 만들기 위해 며칠을 고민하던 직원이 끝내 “내일 죽게 된다면, 엄마와 함께 밥을 먹고 싶어요”라고 말했을 때, 나는 울컥했다. 그 답은 완벽하지 않았지만, 그 과정 자체가 성장의 증거였다.
돌아보면 이곳에서의 10년은 ‘함께 성장하는 시간’이었다. 처음에는 내가 그들을 돕는다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그들이 나를 키웠다. 실수 앞에서 웃으며 “괜찮아, 다시 해보자”라고 말하는 법을 배웠고, 서로의 이름을 불러주는 것이 존엄의 시작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존중은 제도나 복지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작은 말투와 눈빛, 기다림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이 글을 통해 그동안의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장애를 특별한 존재로서가 아니라, 우리와 같은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바라보길 바란다. 그리고 이 글들이 누군가에게는 위로가, 또 누군가에게는 성찰의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궁극적으로 나의 바람은 단순하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 안에서 질문을 발견해 건네는 것. 그 작은 대화의 씨앗이 모여 언젠가 더 큰 변화를 만들어낼 것이라 믿는다.
“너를 품기로 했다”는 말은 어느 날의 즉흥적인 결심이 아니다. 지난 10년의 나날을 통해 더욱 깊어지고 확장된 다짐이다. 나는 그들을 품는 줄 알았으나, 사실은 그들이 나를 품어주었다. 그 고백이야말로 이 글의 시작이며, 내가 앞으로도 이어가야 할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