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을 불러 주다
처음 입사했을 때, 가장 어색했던 것 중 하나는 호칭이었다.
장애인 직원들과 비장애인 직원, 나이 많은 분들과 갓 스무 살을 넘긴 젊은 직원들이 함께 일하는 곳에서 서로를 어떻게 불러야 할지 쉽게 정리되지 않았다. 나는 교사 시절 내내 ‘선생님’이라 불렸고, 집에서는 엄마로 불렸다. 이름으로 불리는 일은 드물었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그 어떤 호칭도 자연스럽게 붙여지지 않았다.
나이 있는 직원들에게는 ‘이모’라는 호칭이 자연스러웠다. 친근하고 익숙했다. 문제는 나였다. 어느 날 함께 근무하던 아르바이트생이 말했다.
“이모라고 부르기엔 좀 애매해요. 이모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잖아요. 편안하고, 집안에서 돌봐주는 분 같은 느낌? 그런데 점장님은 너무 활발하고 진취적이셔서, 제 기준에선 언니에 가까워요.”
그 말에 웃음이 터져 나왔지만, 마음 한구석이 멍해졌다. 그렇다면 나는 이모 일까, 언니일까? 아르바이트생은 끝내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결국 나를 부를 때는 늘 “저기…”였다. 다른 젊은 직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저기요, 이거 어디에 둘까요?” “저기요, 이거 다시 만들어야 할까요.” 어느새 내 이름은 사라지고, 나는 그저 “저기”라는 불분명한 존재로 남아 있었다.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일이 돌아가고 대화에 문제가 없으니 괜찮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 모호한 호칭이 내 마음에 작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이름도, 역할도 불분명한 채 그저 자리에만 존재하는 사람으로 여겨졌다. 교사일 때, 엄마일 때 분명하게 불리던 내 존재가 이곳에서는 공기처럼 희미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공석이던 점장 자리를 맡게 되었다. 입사한 지 석 달, 같은 일을 하고 같은 자리에 앉아 있었지만, 그 순간부터 나는 “점장님”이 되었다. 똑같은 내가, 똑같은 일을 하는데, 호칭 하나가 내 위치와 무게를 단번에 바꾸어놓았다. 그 차이가 주는 묘한 감정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그 경험을 통해 나는 알았다. 이름은 단순한 소리가 아니다. 그것은 상대를 어떻게 바라보는가, 어떤 관계로 맺어져 있는가를 드러내는 언어다.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줄 때, 그 사람은 세상 속에 단단히 존재하게 된다.
그래서 나는 생각한다. 사회에 첫 발을 내딛는 장애인 직원들이 처음 듣는 호칭은 무엇일까? 만약 이름 대신 ‘저기’라 불린다면, 그들의 자존감은 어디에 뿌리내릴 수 있을까? 이름이 지워진 자리에 남는 것은 투명해진 존재감뿐이다.
지금 나는 ‘점장님’으로 불린다. 직책이 주는 무게가 가끔은 부담스럽지만, 한편으로는 감사하다. 최소한 그 호칭은 내 존재를 인정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나는 동료들의 이름을 불러주려 애쓴다. “저기” 대신 “야, 이거 같이 해줄래?” 하고 이름을 부르면, 눈빛이 달라지는 순간을 여러 번 보았다.
이름은 존중의 시작이다. 나 역시 이름 없이 불리던 시간을 지나왔기에 더 잘 안다.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주는 일은 하찮아 보일 수 있지만, 그 사람을 단단히 세워주는 힘이다.
돌아보면, ‘저기’로 불리던 시절은 내게 귀한 배움의 시간이었다. 나는 그 공허함을 통해, 이름이 누군가의 존엄을 지켜주는 첫걸음이라는 것을 배웠다. 그래서 오늘도 동료들의 이름을 부른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다짐한다.
누구도 ‘저기’로 불리는 일이 없도록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