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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길의 행복

산책 그 이상의 행복

by 둥이

늦은 오후 가벼운 마음으로 산책을 나갔다.

한낯의 따가운 햇볕을 피한다 해도 여름을 피할 수는 없었다. 더 피할 수 없는 건 신부님의 강론 말씀이었다. 늘 행복하고 활기 넘치는 신앙생활을 권장하는 신부님은 미사 시간마다 강론하시던 성경구절 일곱 개를 산책코스 구간별로 나누어 영상물을 만들어 오라고 하였다.

신앙생활이 일상 속에 녹아들게끔 만들어 주고 싶은 신부님 마음에 감사했다.

그렇게 오후 네 시경 우리는 성당 앞으로 향했다. 성당계단에서 첫 성경절을 암기한 후 다음 장소로 떠나려고 할 때였다. 그때 성당으로 걸어오는 낯익은 얼굴들이 보였다. 성당에서 이제 얼굴들을 익힌 인사만 나누었던 가족들 이였다. 다행히 어른들의 낯섦을 아이들의 친숙함이 덮어 주었다. 아이들에게 여름은 천국의 계절이었다. 땅으로 떨어지는 따가운 햇볕 사이를 피해 가며 아이들은 뛰기 시작했다. 머리는 땀방울로 젖어 들어갔고 목덜미는 금세 땀으로 반짝였다. 다음 산책코스 까지는 대략 1000걸음이었다. 일곱 살 막내 재균이가 힘들지는 않을까 걱정했는데 형 누나들 속에서 존재감을 뽐내며 걸어갔다. 드디어 두 번째 산책코스에 도착해서 영상을 찍었다. 아이들은 무더위에 조금씩 지쳐 갔지만 혼자 서는 못해냈을 일들을 같이 만들어 갔다. 아이들은 허투루 걷는 법이 없었다. 가다 서다를 반복하며 눈에 보이는 모든 사물에 반응하며 걸었다. 황혼으로 저무는 해를 보며 감귤과 오렌지 색깔 같다며 손가락으로 태양을 가리키는 재균이, 무리 지어 뛰어다니는 남자아이들, 별 이유 없어 보이는 말 한마디에도 답해주며 웃어 주는 가족들, 풀향기 가득 담아 불어오는 바람과 여름을 알려주는 매미소리 그리고 아이들의 재잘대는 소리

행복이 만들어지는 시간이다.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것들은 많은 것들이 필요치 않다. 무료한 햇살, 풀무질하듯 뛰는 심장소리, 같은 보폭으로 걸어가는 이웃, 사소한 것들, 아주 작은 것들로 우리 뇌는 행복 호르몬을 만들어낸다. 그냥 감사하기만 하면 된다.


만약 우리 가족만 걸었다면 어느 정도 걷다가 힘들어 되돌아왔을지도 모른다. 세 가족이 함께 걷는 산책길은 그렇게 더위를 잊게 해 주었고 무사히 목표지점까지 완주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수리산 둘레길로 산책코스를 만들어 주신 신부님 덕분에 싱싱한 산향기와 풀내음까지 듬뿍 맡을 수 있었다.


같이 걸을 수 있어서 행복한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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