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일간의 생존기
인류는 어떻게 멸종하지 않은 것인가
아이가 태어나 100일이 될 때까지 내 머릿속엔 늘 같은 의문이 맴돌았다.
어떻게 인류는 지금까지 멸종하지 않았던 거지?
두세 시간마다 한 번씩 분유를 먹이고, 안아서 트림을 시키고, 이제 잠깐 눕히려고 하면 어김없이 으앵 울어버리고,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의사소통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는 이 생명체를 인류는 무슨 수로 키워내고 어떻게 또 한 명을 더 낳고 또 한 명을 더 낳고 했던 걸까?
마침 우리 집은 고양이 세 마리를 키우고 있었다. 고양이는 백일이면 혼자서 밥을 먹고, 물을 마시며, 자신이 싼 똥오줌을 모래로 덮는다. 이백일부터는 번식까지 할 수 있는 온전한 성체가 된다. 그런데 어째서 휴먼은...?
이족보행이 가능하고 기본적인 사리분별이 가능해 혼자 둘 수 있을 때까지 어림잡아 10년, 최소한의 의무교육이 끝나기까지 20년, 부모로부터 완전한 경제적 독립을 할 수 있기까지는 30년이 걸린다. 현대사회의 부모들이 지나치게 오랫동안 자녀를 양육하고 있다지만, 몇만 년 전의 수렵채집인들에게도 10여 년의 양육기간은 필요했을 것이다. 사자와 호랑이와 매머드와 경쟁했던 이들은 어떻게 10년 동안 아이를 돌볼 수 있었던 걸까. 고양이는 100일 만에 자립하는데 말이다. 그렇게 무엇이 문제인지 고민하다 핵가족과 일부일처제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에까지 이르게 된다.
하루종일 쉬지도 못하고 말도 못 하는 아이를 혼자 돌보았던 아내, 종일 격무에 시달리고 상사 눈치를 보다 지옥 같은 퇴근길을 거쳐 집으로 돌아온 남편. 어느덧 밤 9시. 지금부터의 육아는 누구 몫인가. 새벽에 깨어난 아이에게 분유를 먹일 불침번은 누구인가. 낭만적 연애와 결혼, 일부일처제라는 시스템이 가정을 유지하는 데 적합하긴 한 건가. 최소한 3명의 어른이 가정을 이루어야 하지 않을까. 한 명은 전일제 근무, 한 명은 파트타임 근무, 한 명은 전업주부로. 지금도 많은 부부가 어머니의 도움을 받으며 사실상 세 명의 어른이 가정을 유지하고 있다. 음. 그런데 우리 엄마는 자식 셋을 어떻게 키웠던 거지?
의문은 연쇄적으로 이어지고, 그렇다면 수만 년 전의 인류는 어땠을까 떠올려본다. 유발 히라리는 <사피엔스>에서 집단생활을 하던 어떤 수렵 채집인들에겐 일부일처제 개념이 없었다는 이론을 제시한다. 그런 상황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누구의 아이라는 개념이 아니라 집단의 아이로 받아들여졌으며 공동육아가 이루어질 수 있었다고 말한다.
‘이들은 고대의 수렵 채집인 무리는 일부일처제 부부를 중심으로 한 가족이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이들의 공동체는 사유재산이나 일부일처 관계, 심지어 아버지라는 개념도 없이 살았다는 것이다. 무리의 여성은 동시에 여러 명의 남자(그리고 여자)와 성관계를 하고 밀집한 유대를 맺을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무리의 성인들은 모두 힘을 합쳐 아이들을 키웠을 것이다. 누가 자신의 친자식인지 확실히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남자들은 모든 아이에게 공평하게 관심을 나타냈다.’(<사피엔스>, 72p)
다시 수렵 채집시대로 돌아가야 하나. 그때의 인류가 지금보다 더 행복했을 텐데. 풀리지 않던 의문과 망상들이 도돌이표를 반복하는 사이 백일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아이는 곧잘 통잠을 자기 시작해 새벽에 깨는 일이 많이 줄어들었다. 마침내 찾아온 백일의 기적에 우리는 겨우 한 시름을 놓을 수 있었다. 가끔 아내와 그 시절에 대해 얘기할 때가 있다. 온 가족이 코로나에 걸리기도 했고 엄청 힘들었던 건 기억나는데 마치 꿈을 꾼 것 마냥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있었는진 생각나지 않았다. 어쨌든 우리 정말 고생 많았어, 의진이 하나만 잘 키워보자며 서로를 토닥이며 이야기가 끝난다. 그리고 어젯밤.
‘근데 우리 금순이(둘째의 태명) 낳을까?’
지금까지는 내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던졌던 말이었는데, 이제는 아내가 내게 먼저 둘째 얘기를 꺼낸다. 그 후엔 어김없이 같은 대화가 이어진다.
의진이 키우면서 또 금순이 키울 수 있어? 난 못해. 응 나도 못 해. 근데 금순이 너무 귀여울 것 같지 않아? 금순이라는 보장 있어? 금돌이면 뭐 어때. 귀여울 것 같은데. 셋째 낳으면 되지.
마치 상황극처럼 어떤 때는 내가 질문하는 역할을, 어떤 때는 아내가 질문하는 역할을 한다. 인류가 멸종하지 않았던 이유는 분명, 망각 때문이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