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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망초 Apr 04. 2021

교토, 혼자 가다 2

기온의 느긋한 아침 속을 걸어 나와 금각사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낯선 여행지에서 버스를 타는 일은 지극히 아날로그적인 사람인 내게는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다. 버스를 검색해보고 정류장의 위치와 대강의 노선까지 파악을 하고 나서야 비로소 안심이 된다. 그러다가 무턱대고 유추해 본 버스의 동선이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맞아떨어졌을 때의 통쾌함은 제법 짜릿하다.  짜릿함이 교토와 내가 잘 들어맞는 퍼즐 같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빛이 들어온다. 사뭇 따스하다. 간질거리듯 포근하다. 두꺼운 유리를 통해 스며들어 오는 겨울의 햇살은 그렇게 내게 말을 걸었다. 버스 창가에 기대어 낯선 거리를, 낯선 사람들을 바라보는 내내 느슨하게 궤도를 도는 햇살을 받았다.

이렇게 따사로울 수가 있을까? 이토록 간지러울 수가 있을까?

금각사로 향하는 이 길이 결코 그곳에 가 닿지 못한다고 해도 나쁠 게 없을 것처럼 느껴지는 이 한낮이, 마치 영화 속 장면처럼 비현실적이다.

내 얼굴로 그림자를 드리우는 나뭇가지들, 그리고 건물의 드높은 귀퉁이들.

아무런 저항 없이 그림자들이 내 얼굴을 유영하며 스쳐 지나가고, 스르르 졸릴 것 같은 나른함에 그저 햇살에 빠져들고만 있다. 낯선 도시를 여행하며 느끼는 이 여유가 참 특별하다.

교토에는 처음이지만, 오래전부터 동경 해왔던 것처럼 온전히 이곳의 곳곳을 누비는 지금, 나는 참 해맑다. 

급하게 해야 할 일도 없고 급하게 나를 찾는 이도 없으니, 나름대로 시간을 때우고 내키는 대로 먹고 걸어도 무방하다.

이런 것을 자유라고 말할 수 있다면, 나는 지금 교토 속에서 한껏 자유롭다. 생각하는 것도 그렇고, 보이는 모든 시야가 자유롭다. 그래서 사실은 외롭다. 자발적 외로움에서 자유로워졌다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심히 외롭다. 다니는 내내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이 고독감은 자유로움에 대한 대가이다.




버스 창가로 번지는 겨울 햇살이 너무 따사로워서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지그시 눈을 감았다. 모르는 길을 가고 있으니 어차피 상관이 없다. 내가 아는 정류장 이름이 나올 때까지만 두 귀를 쫑긋 곧추세우고 있으면 그만이다.

여행을 하면서, 혼자여서 아쉬운 건 바로 이런 때다. 지금 나는 교토에 있는데, 이 좋은 순간을 나눌 친구가 하나 없다는 것.

처음 보는 거리를 버스로 달리며, 내리고 타기를 반복하는 사람들의 낯선 공기에 대해 맞장구쳐 줄 친구 하나가 없다는 것.

모든 것을 혼자의 눈에 익혀야 하니, 나중에 '그때 그랬었지?', '거기서 그거 먹어봤잖아!' 하며 기억을 증명해 줄 사람이 없다. 기억을 꿰맞춰보기 할 사람 하나 없으니, 어떤 사실에 대해선 기억의 오류로 남게 된다.


사실, 금각사를 돌아보던 시간에 대한 기억은 그다지 명료하지가 않다. 다만, 그곳을 가기 위해 버스를 탔을 때, 그 따사롭던 햇살의 기억만은 너무나 강렬하다. 버스 창가에 기대어 눈을 감았을 때 살짝 잠이 들 뻔했던 것도, 그날의 햇살이 무척이나 봄다웠기 때문이다.


아련하다는 표현이 딱 어울렸던 그 기억 속의 한 장면!

그것은 뭐랄까, 한 입 베어 문 찹쌀떡의 앙금 속에, 내가 좋아하는 잣이 들어있어서 더 맛있었다고 기억되는 사소한 행복과도 같다.

가고 싶은 곳을 찾아가는 발걸음이 가벼운 건 당연한 일이다.

거기에 보태어, 가는 길에 마주한 사소한 행복이, 그날의 날씨를 더욱 분명하게 기억나게 해 주고, 그 날의 바람 냄새까지도 또렷이 생각나게 해 준다.

그날, 버스 창가에 기대어 앉아서 느꼈던 늦은 겨울 햇살에 대한 기억이 그랬다.

특별할 게 전혀 없는 것이었지만, 딱 꼬집어 말할 수 있는 그 순간이 그리 편안하고 행복했다고 느껴지는 것이다. 너무 사소해서 싱겁기까지 한 기억이지만, 그 길고도 느슨했던 하루에서 그 순간만을 딱 잘라내어 행복 속에 짜깁기 해 넣고 싶다. 아니, 이미 그 속에 들어가 있겠지. 

행복의 부피가 딱 '그 날의 햇살'만큼 불어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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