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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망초 Mar 25. 2021

봄노래부르자, 싱그랄라!

상상해 봐!

지금 나에겐 도시의 일을 잠시 잊게 해 줄만큼의 넉넉한 시간과, 얼룩말 한 마리를 살 수 있을 만큼 두둑한 지갑이 있어. 

승차감 좋은 오픈카와 해안도로가 잘 안내된 지도까지 한 장 있지.

오픈카는, 궁극의 우아함으로 바람을 가르는 메르세데스 마이바흐 6, 카브리올레가 제격이지.

축척 비율 1:300,000을 자랑하는 총 천연색의 여행지도 한 장이면, 어디가 됐든 이미 내가 그 구역의 '짱'이 아닐까 싶은데.

어디 그뿐인가? 바다 전망의 세련된 객실이 있는 호텔 스위트룸 숙박권이 있고, 거기에서 핀란드식 건식 사우나와 스파를 이용할 수 있는 티켓도 여러 장이 있어.

적당한 습기를 머금은 오전의 공기는 지금 당장 떠나도 좋다고 나를 부추기고 있지.


상상해 봐!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은 제주의 공항. 

미세먼지가 뭔지 알지도 못하는 청정지역이라는 점을 기본 전제로 하고, 두 팔을 뒤로 한껏 벌린 다음, 폐부 끝까지 차오르게 숨을 들이쉬어 보자!


상상해 봐! 밀도 높은 제주의 3월을!

유채꽃의 향연. 끝없이 짙푸른 옥색의 바다. 해녀들의 이른 물질과, 봄 아지랑이에 훅 밀려들어 오는 따스한 공기. 까만 돌담장 너머로 아직도 수확이 한창인 밀감 밭.

그리고 꼬리를 단 별들이 뚝뚝 떨어지는 깊고 푸른 밤하늘. 


참, 제주에 가면 꼭 한 번 가보고 싶었던 곳이 있어. 1112번 지방도로를 타고 달리면 나타나는, 삼나무 숲이 우거진 사려니 숲! 그곳의 아침 안갯속에서 큰 소리로 웃어도 보고 싶어.

한참을 숲으로 난 길로 걸어 들어가다 보면, 옛이야기 속 마고할미를 실제로 만나게 될지도 몰라.

그리고 그 숲에서 멀지 않은 도깨비도로를 가면, 아직도 시퍼런 불을 갖고 노는 뿔 달린 도깨비를 만날지도 모르지.

정말 만나면 어떡하냐고?

우선은 그냥 상상만 해보자는 거지.


있잖아, 불현듯 떠오른 생각인데, 올레길을 걷다가 갑자기 맞닥뜨린 한낮의 소나기라도 제주에서는 싫을 이유가 없을 것 같아.

조금 오래 걷다 보면 배가 고플 수 있어. 그러면 두어 시간 정도 시간을 들여서 느긋한 점심을 먹자. 

비바리가 첫 물질로 건져 올린 각종 해산물로 끓여낸 전복 두루치기는 어떨지? 쑥전과 옥돔 구이가 서비스로 나오는 식당을 찾아낸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

느긋한 점심을 먹고 나서는, 부드러운 신맛과 과일향이 어우러진 에티오피아 예가체프 한 잔을 마시는 것도 제법 어울리겠어.

저녁이 되면 흑돼지 연탄구이에 가볍게 소주 한잔을 해보자. 갈치속젓에 찍어먹는 짭조름한 맛의 조합은 오래도록 잊히지 않겠지.

그러고도 옥빛의 제주바다를 차마 떨쳐내기가 아쉽다면, 여행 마지막 날엔 보말칼국수 한 그릇을 먹고서 비행기에 오르자. 그러면 여한이 없겠지.

괜찮아, 아직도 나에겐 코끼리 한 마리와 긴 잎 아카시아 나무 한 그루를 더 살 수 있을 만큼의 충분한 돈이 남아 있어.

알고 보니 내가 가진 지갑은, 써도 써도 마르지 않는 화수분이었던 거지.


곱실거리는 머리카락의 컬이 정글의 사자처럼 일렁이기 시작할 때, 나의 동공도 함께 눈을 떠.

이런 상상이 도심의 책상 앞에서만 하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나는 서슴지 않고 사려니 숲의 아침 안개를 걷어내며 웃을 수 있어. 

안개가 비로 바뀔지 모르는 날씨를 위해, 우산도 넉넉하게 준비할 거야.


맘껏 상상해 봐!

참, 나의 오픈카와 총 천연색 여행지도는 얼마든지 양도해 줄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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