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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팔 Jan 27. 2024

흰 건 종이, 검은 건 글씨

비가 추적추적 오는 날 언제 샀는지도 모를 연필을 서랍에서 꺼냈다. 방바닥에 날짜가 한참 지난 달력을 찢어 깔아놓고 쪼그려 않아 커터칼로 연필을 깎아 됐다. 날카로운 칼날을 세워 투박하게 깎다 어느 정도 흑연심이 보이면 정성스럽게 살살 긁어내며 뾰족하게 만든다. 그렇게 몇 자루를 깎고 책상에 올려두고 주방에 가 물포터에 물을 받고 전원버튼을 누른다. 물이 끓기를 기다리며 믹스커피봉지를 뜯어 안에 있던 커피가루를 두툼한 머그잔에 부어 넣고 바글바글 거리는 포터를 물끄러미 쳐다본다. 딸깍하고 포터가 다 끓었다는 신호를 주면 포터를 들어 머그잔에 천천히 붙는다. 익숙한 향이 퍼진다 푸근하게 만드는 향 땅에 냄새 티스푼을 꺼내어 천천히 커피가 녹을 때까지 수저로 머그잔 안을 뱅글뱅글 돌린다 천천히 또 천천히 머그잔 안을 뜨거운 숨이 주위에 퍼지며 진득한 향기가 또 한 번 마음을 하늘거리게 한다. 잘 녹은 커피가든 머그잔을 들고 연필을 내려놓았던 책상 위에 올려두고 의자에 앉아 잠시 눈을 감는다. 그리고 밖같에서 들리는 빗소리 방금 탄 커피에서 나는 향 그리고 방안 가득 머금고 있는 종이 냄새를 느낀다 감상한다 음미하고 곱씹는다. 그러면 난 오직 오로지 혼자가 된다. 윙윙거리는 냉장고 소리 징징되는 보일러소리 톡톡되는 휴대폰 소리 휙휙 거리는 컴퓨터 소리 너무 자주 들었는지 있었는지 없는지도 모를 소리로부터 오직 오로지 나는 혼자가 된다. 그렇게 그런 시간을 충분히 즐기고 감았던 눈을 살며시 뜨면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맑아진 듯 청아하게 보인다. 항상 눈에 어떤 막 같은 게 덮어져 있던 느낌은 온데 간데 사라지고 나비가 날기 위해 허물을 벗은 것처럼 허물이 눈껍풀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맑은 눈으로 책상 위에 하얀 종이를 내려놓고 정성스럽게 깎은 연필 한 자루를 들고 무언가를 적어 내려간다. 무엇을 적는지 모르게 말이다. 한 번도 무엇을 적어야지 하고 적은 적은 없다. 무엇이든 적고 적은 글을 읽고 또 적고, 또 그 글을 읽고 또 적으면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뼈가 생기고 살이 붙고 근육도 생기며 오장육부라 할 것이 생기면서 사람의 형태를 가추듯 글이라고 말할 수 있는 무언가가 만들어져 같다. 보태고 깎아내고를 반복한다. 그런 과정 속에서 글을 읽기는 더욱 수월해지고 앞뒤가 맞게 되고 나 스스로가 납득이 가는 과정이 이루어진다. 글을 적는다는 것의 묘미는 글을 적을 때보다 적은 글을 깎아내고 붙있때 더 느낄 수 있다. 자신이 쓴 글이지만 부끄럽기도 때로는 누군가 훔쳐볼까 내가 나를 속이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글을 왜곡할 때도 감성에 젖어 상상을 적으려는 글도 고정관념이라는 틀에서 벋어나 우연히 나온 것조차 말이 되는지 안되는지를 생각한다. 나라는 틀에서 한치도 벋어나지 않으려 한다. 웃긴 일이다. 절대 나말고는 볼일이 없는 글조차 누군가를 신경 쓰는 나 자신이 아무도 신경 쓰지 않으며 살아가고 있다고 믿는 나 자신이 혼자 방안에 글에 담긴 내용조차도 신경 쓴다는 것이 한없이 날 모순적이 사람으로 만들어 스스로가 스스로를 초라하게 만든다. 어쩌면 글을 쓴다는 건 어찌하지 못하는 자신의 마음과 대면하기 위한 거울 보기 같은 것은 아닐까 어떤 거울을 선택해 자신을 볼지를 정하는 그런 것 똑같지만 다르고 비슷하지만 틀리수도 있는 거울 앞에 자신과 대면해 보는 것 그러므로 자신이 진실인지 아닌지 허구로 살건지 바로 잡을 건지를 선택하는 과정 끝맺음을 할 수가 없다. 비어버린 글에 끝을 맺는 것은 힘든 일이다. 그러나 그리해야 한다. 그리고 다른 글을 채워야 한다. 그 글 또 한 채우고 비우고 깎아내고 또다시 반복한다. 그리고 끝을 맺고 또다시 반복한다. 한자, 한 단어, 한 문장을 채우고 비우다 보면 언제인가 있는 그대로에 날 볼날이 있을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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