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에 대한 의지와 열망이 누구보다 가득했지만, 잔인했던 시대와 불가피했던 상황들에 묶인 채 항상 반성하고 부끄러워해야 했던 사람이 있다.
후대에 큰 영향을 주게 되고,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존경하는 위인으로 남게 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쓸쓸히 눈 감아야 했던독립운동가 윤동주.
이정명 작가의 책,<별을 스치는 바람>은 작가가 윤동주에 대해 샅샅이 조사한 후, 그의 시와 행적들을 바탕으로 상상력을 가미해 작성한 미스터리 추리 소설이다.
책을 읽어보니 작가가 얼마나 치열하게 그의 생애에 대해 조사하고 고뇌했는지 느껴졌다. 동주의 시에 많은 영향을 주었던 프랑시스 잠과 릴케의 시, 고흐의 작품이 등장하는 것을 비롯해 동주 주변인들의 증언들과 탄탄한 자료 조사를 토대로 쓰인 이 책은, 픽션이라 하더라도 실제 일어났을 법한 느낌을 주며 몰입도를 높인다.
동주는 생에 마지막을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보냈다. 그곳에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잔혹하기로 유명한 간수 하나가 살해당한다. 이 책을 이끌어가는 '나'라는 서술자는 또 다른 일본인 간수로, 문학에 관심이 많고, 자신이 하는 일을 부끄러워하는 평범한 청년이다. 그는 이 살인 사건을 맡아 조사하게 되었고, 살해된 간수의 주머니에서 발견된 시를 읽고 충격에 빠진다.
같은 사람이 쓴 것 같은 '참회록'과 '자화상'.
그리고 '히라누마 도슈(동주의 일본 이름)'에 대해 알아보며,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와 우정을 쌓게 된다.
"모든 죄수들은 자신에게 죄가 없다고 하지. 흉악한 살인자도 교활한 사기꾼도 누군가에게 속았거나, 술에 취했을 뿐이라고. 하지만 죄 없이 감옥에 들어오는 사람은 없소. 당신이 에드몽 당테스라면 모를까..." '에드몽 당테스'란 말에 그의 두 눈이 반짝였다. 그는 싸움을 거는 것처럼 대꾸했다. "인간의 죄를 대신해 독수리에게 간을 쪼여 먹힌 프로메테우스도 있지요." 나는 당황하는 동시에 흥분했다. 그는 <몬테크리스토 백작>과 그리스 신화를 읽은 자였다. 우리는 같은 책을 읽었고 같은 작가와 주인공을 알았으며 같은 추억을 공유했던 것이다. (60p)
서술자는 문학에 조예가 깊은 청년이기 때문에 동주와의 대화에, 그리고 동주의 시에 이끌린다. 한 편의 시를 읽는다는 것은 한 인간을, 혹은 그의 세계를 읽는 행위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다지만, 살해된 악마 간수는 글쟁이를 혐오하는 사람이었다.
소극적이지만 단단한 내면을 가진 동주와, 악마 간수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미스터리와 반전이라는 책의 장르 자체로도 책을 끝까지 읽어 나갈 수 있는 흥미를 제공하지만, 궁금중을 차치하고서도 이 책은 읽을 가치가 충분하다. 반전만이 궁금해 결론만을 향해 달려가는 여느 추리소설들과는 다르게, 처음부터 모든 문장이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심장을 때린다.
어떤 문장도 쉽게 쓰여지지 않았으며 아름답고 감탄스럽다. 작가의 다른 모든 책을 읽어 보고 싶을 정도로 읽는 내내 황홀했다. 나는 평소에도 동주를 좋아해 왔기 때문에 더 그랬을 수도 있다.
문학과 음악에 치유받고 하루하루 살아갈 힘을 얻는 형무소의 죄 없는 조선인들. 그들을 위로하는 건 글이었다. 글이 한 인간을 어떻게 변화시키는가.
소설 내내 등장하는 동주의 여러 시들에는 그의 고뇌가 드러나 있으며, 서술자와 함께 그의 시를 분석하고 함께 감탄하고 안쓰러움도 느끼게 된다.
어떤 책을 읽은 사람은 그 책을 읽기 전의 사람이 아니다. 문장은 한 인간을 송두리 째 변화시키는 불치병이다. 문장들은 뼈에 새겨지고 세포에 스며들고 자음과 모음은 바이러스처럼 혈관을 타고 흐르며 읽는 사람을 감염시킨다. 그들은 책과 글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중독자이고 의존자가 된다. 읽지 않을 책을 끼고 다니고 책을 잡지 않은 손을 공허해하며 오래전에 읽은 구절을 되새김질하듯 중얼거린다. (165p)
실제로 윤동주는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생체실험을 당해 죽는다. 비인륜적인 조국의 행태에 부끄러움을 느끼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약한 서술자는, 본인이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면서도 끝없이 괴로워한다. 일본인이라고 모두 악은 아니라는 것을, 작가는 동주와 닮은 인물을 그려내어 보여준다.
나는 처벌받아야 할까? 그럴 것이다. 이 미친 전쟁이 끝나고 세상이 제정신으로 돌아오면 이곳에서 벌어진 야만적인 범죄는 단죄를 면할 수 없을 것이다. 그 범죄에 가담한 자들 중에 나도 끼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전쟁이 끝나고, 좋은 세상이 오기를 바라지 말아야 할까? (316p)
우리는 때에 따라, 장소에 따라 악인이기도 의인이기도 하며, 사기꾼이기도 사기를 당하는 자이기도 하며, 밀고자이기도 밀고의 희생자이기도 하다. 동주의 처지를 동정하면서도 공습경보가 울리면 혼자 방공호로 숨어드는 나 자신처럼. 결국 나는 내가 가장 경멸하는 인간에 지나지 않았다.(323p)
어떤 숭고한 목적을 위해서라도 이럴 수는 없는 것이다. 아무리 많은 생명을 위해서라도 다른 사람의 생명을 가지고 장난칠 권리는 없는 것이다.(355p)
나는 작가가 이 책을 통해 끊임없이 강조하는 주제인, 문학이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에 대하여 충분히 공감한다. 그저 재미로만 읽던 책들이었지 어떤 성숙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 소망을 가지고 읽었던 것들이 아니었지만, 그것들이 쌓여 지금의 내가 되었다. 문장은, 글은, 책은, 나도 모르는 사이 편협한 나를 일깨워주고 시야를 넓혀 준다. 더 다양한 인간 군상을 이해할 능력을 주고, 깊은 내면을 들여다보게 해 준다.
1930년대부터 일본인들의 회유와 강압, 독립은 오지 않을 거라는 생각으로 변절하는 문인들이 많았음에도 꿋꿋이 자신의 길을 걸어갔던 윤동주.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출판하고자 했던 조선어로 쓰인 자신의 시가 세상에 알려질 수 있을지 확신하지 못한 채로, 광복이 되는 해에 광복을 보지 못하고 생을 마감했다. 그의 나이는 아직 청춘이 채 다하지 않은, 스물일곱이었다.
한 세기가 지난 지금, 나는 그의 시들을 보며 치유받는다. 밤하늘의 별을 볼 때마다 그와 그의 생애, 그리고 그의 시를 떠올리는 사람이 있노라고 알려주고 싶다. 오늘 밤에도 별은 떠오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