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y & Monica's [en route]_287
*은퇴한 부부가 10년 동안 나라 밖을 살아보는 삶을 실험 중이다. 이 순례 길에서 만나는 인연과 문화를 나눈다._이안수·강민지
대한민국 여권 소지자는 과테말라에서 관광 목적으로 최대 90일 동안 비자 없이 체류할 수 있다. 우리는 다음주 수요일(1월 22일)로 과테말라 체류 기간이 만료된다. 벌써 3개월이나 과테말라에 매혹되어 살았다. 하지만 여전히 과테말라를 떠나고 싶지 않다. 가본 곳보다 가보지 못한 곳이 많고 여러 명의 친구도 생겼다. 썸 타는 시간을 지나 이제 연애가 시작되는 기분이다. 다행히 과테말라는 나라밖으로 나가지 않고도 한 번 더 체류연장이 가능하다.
어제(1월 17일) 과테말라 시티의 이민청(Instituto Guatemalteco de Migración)를 방문했다. 과테말라는 일찍 업무를 시작하고 일찍 끝난다. 대개 시장도 새벽 6시쯤이면 장꾼들이 모이고 오후 3시쯤이면 파장이다. 이민국의 업무도 아침 7시에 시작해 오후 2시 30분이면 마감이다. 안티구아 숙소에서 이민국까지는 40km 남짓이지만 워낙 교통체증이 심해 3, 4시간이 걸릴 수도 있다. 우리는 새벽 5시에 기상해 6시에 숙소를 나섰다. 치킨버스로 과테말라 시티의 환승정류장까지 전혀 막히지 않아 1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우리는 길거리에서 커피 한 잔과 토스트를 사 먹고 우버 택시로 갈아탔다. 과테말라 시내에서 교통체증으로 이민청까지 한 시간이 더 걸렸다. 결국 안티구아를 출발한 지 3시간이 걸린 셈이다. 되돌아올 때는 우버택시에서 2시간, 치킨버스에서 2시간, 도합 4시간이 걸렸다. 과테말라 시티에서 가장 인내심을 필요로 하는 직업은 택시기사이지 싶다.
이민국의 줄은 길지 않았다. 대부분은 영주세(Cuota Anual de Extranjería 과테말라에서 영주권을 가진 모든 외국인이 의무적으로 납부해야 하는 세금. 연간 USD $40) 납부와 이민체류자격증명서(Constancia de Estatus Migratorio 과테말라 출입국 시 필요한 서류로 발급일로부터 1년. 발급비용 USD $30) 갱신을 비롯한 영주권자의 업무를 위한 이들로 우리처럼 관광비자 갱신을 위해 온 사람은 많지 않았다.
필요서류(1. 비자 연장 신청서, 2. 여권 : 입국 시 받은 체류기간 직인면 복사본, 3. 경제력 증명 서류 : 국제 신용카드 앞뒤 복사본, 4. 출국 예정일이 명시된 항공권, 5. 비자 발급 수수료는 USD $25)를 준비하고 제출하면 담당자 검증 후 추가 질문 없이 스탬프 대신 '관광 연장 비자'를 여권에 붙여준다. 현장에서 이 모든 것을 준비하고 비자를 받는데 1시간 정도가 소요되었다. 우리는 육로로 나갈 예정이라는 사실을 소명하는 것으로 항공권 첨부를 대신했다.
과테말라는 도로를 비롯한 관광 인프라가 잘 갖추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여행자에게 편리한 나라는 아니다. 하지만 편리함과 편안함에 큰 관심이 없는 우리에게 인프라가 좋은 미국이나 그렇지 않은 과테말라나 차이가 없다. 여행객을 위한 인프라가 아무리 잘 되어있다고 하더라도 비싼 비용으로 시설 이용을 할 수 없는 입장에서 불편하기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우리 형편으로 감당할 만한 편한 월세 숙소에 살면서 3개월쯤이 되다 보니 과테말라 영주권자라도 된 것처럼 마음조차 넉넉해진다.
매일 밤낮없이 울리는 도시의 행사 폭음에도 더 이상 놀라지 않게 되었고 지척에서 15분 간격으로 검은 연기를 내뿜는 활화산의 활동도 더는 두렵지 않고 허밍 버드와의 아침 인사도 호들갑스럽지않게 되었다.
과테말라 어디를 가더라도 일상인 치킨버스의 난폭 운전과 귀청이 터질 듯한 음악소리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전통시장의 공격받은 거미줄처럼 얽힌 길들을 찾아 원하는 가게로 바로 갈 수 있게 되었고 장날의 장터 어느 곳에서 어떤 과일을 구할 수 있는지도 훤해졌다. 아내는 이제 나와 함께 어디를 가기보다 혼자 가기를 더 즐긴다.
우리 숙소에는 3, 4년 넘게 거주하는 각국에서 온 사람들뿐만 아니라 갖은 사연으로 몇 개월씩 머물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그 사정들도 갖가지이다. 젊은 시절 부인과 행복한 여행으로 왔던 이 도시를 부인과 헤어지고 은퇴 후 홀로 와서 영주하고 있는 할아버지, 결혼 17년째라는 과테말라와 독일 출신의 남남 부부, 중동 갑부를 만나 레스토랑 개업을 준비하고 있는 호주 아저씨, 바느질로 수행하듯 하루하루를 누리는 평생 독신 할머니... 그 각각의 사정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서로 격려하며 사는 모습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간섭하고 강제하는 가족보다 더 편하고 자유로운 모습이다.
우리가 마야 마을을 순례하다가 17일 만에 돌아오자 매일 로맨틱 무드 속에 빠져살던 동거 커플의 아저씨가 거의 울상이다. 파트너가 떠나버렸단다. 한 달 반 예정으로 동거남과 함께 자동차 여행을 떠났던 여성은 보름 만에 홀로 돌아왔다. 오래전에 수술했던 파트너의 다리 근육 통증으로 자동차를 과테말라 북부에 두고 급히 비행기로 돌아와 병원에 입원시켰단다.
이 변방에서 삶의 현실과 현상의 이면에 귀 기울이면서 그들과 공명하는 것만으로도 행복을 나누는 여유와 불행을 견디는 힘이 자란다.
바로 이곳, 이 순간, 이전에는 알지도 못했던 사람들과 함께 웃고 슬퍼하고 먹고 마시는 일상을 돌이켜보면 "우리는 우주와 함께 진동한다(Vibramos juntamente con los cosmos. We vibrate together with the cosmos)."는 마야인의 말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을 떠난 지 2년이 가까워오지만 내 있던 자리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보다 '누구도 소유권이 없다'는 자연을 더 많이 누리기 위해 더 많이 여행해야겠다는 마음이 커진다. 이로써 '모든 존재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모두가 더 많이 체험한다면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서로를 증오할 일은 점점 줄 것이며 사치를 위해 자연을 남용하고 학대하는 것은 드문 일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