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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ighseeker Dec 07. 2022

[현상학 탐구] 앙리 베르크손과 의식의 소여

  현상학의 창시자 후설은 독일 사람이다. 그러나 내 생각에, 현상학은 독일적이라기보다는 프랑스적이다. 서로 끊임없이 교류해온 철학체계에 대해서 무엇이 독일적인지, 혹은 프랑스적인지를 논의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독일적이라는 것은 단순히 독일 사람의 철학이라는 이야기도, 독일지역에서 등장한 철학이라는 이야기도, 독일어로 논의된 철학이라는 이야기도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말하는 독일적이라는 의미는 독일 주류 철학사조가 전반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어떤 문제의식이 존재하며, 그 문제의식을 공유한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독일의 정신은 무엇인가? 그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마이스터 에크하르트가 등장할 것이다. 신비주의적인 관점에서 성서를 재해석하는 수사였던 그는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이단이라 의심받기도 했다. 그의 문제의식은 철저하게 ‘나’의 존재였고 나아가서는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신성을 체험하는 방법이었다. 이 상황에서 타자는 감히 관심 분야갸 될 수 없다. 이것이 괴테, 슐레겔, 칸트, 피히테, 셸링, 헤겔, 그리고 니체에 이르기까지 주류 독일 지성들이 공유하는 의식이다.  반면에 프랑스는 다르다. 앞서 논의한 데카르트부터 시작해서 멘느 드 비랑, 라베쏭, 베르크손으로 이어지는 정신주의 사조. 루소, 볼테르, 디드로, 몽테스키외 등의 계몽주의 철학자들, 그리고 콩트, 뒤르켐 등의 사회학자들, 그리고 후설의 현상학을 수용한 레비나스, 사르트르, 메를로-퐁티, 미셸 앙리 등의 학자들이 모두 암묵적으로 공유하는 문제의식은 실제 세계이다. 이들은 일상에서 출발하여 일상적인 상황을 해석하고 일상적인 문제들을 해결하려 한다. 그래서 이들에게 타자의 존재는 더없이 거대한 문제이다.      


  이런 의미에서 후설의 현상학은 독일철학의 전통에서 보면 이단아이다. 후설 자신이 직접 밝히는 바와 같이 “현상학은 이치에 어긋나는 ‘물자체’를 갖고 조작하는 모든 소박한 형이상학만 배제하는 것이지 형이상학 일반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한 인터뷰에서 스스로 말한 것처럼 현상학자는 “진정한 의미에서 베르크손주의자이다.” 그래서 나는 현상학의 선구자로서 칸트를 위시하는 독일철학의 전통이 아닌, 프랑스 정신주의 사조의 거장인 앙리 베르크손을 채택했다. 이제 베르크손의 철학을 살펴보자.      


 베르크손은 정말 대단한 학자다. 그렇게 생각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가 단순한 말장난에 그치지 않고 제대로 된 학문의 방법을 고수했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학문은 무엇보다도 정확성을 추구한다. 그리고 정확성이라는 것은 올바른 대상이 미리 전제된 후에, 그것과 얼마나 딱 맞는지를 비교하는 것이다. 따라서 각 학문의 대상은 각 학문이 추구하는 정확성의 기준이다. 물리학은 신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물리학은 물질세계를 대상으로 하므로 물질세계와 잘 들어맞으면 그것으로 족하지 굳이 자신들의 이론을 억지로 확장해서 신을 논할 필요가 없다. 그렇다면 철학의 대상은 무엇일까. 아마도 그것은 존재하는 모든 것이리라. 더 정확히는 존재 일반, 곧 세계 전체일 것이다. 따라서 베르크손의 철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가 파악한 세계의 구성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가 바라본 세계는 실로 상식적인 세계이다. 상식은 보편성을 보증하며 보편성은 명확한 대립근거가 나오기 전까지 매우 강력한 무기이다. 여기에 한 상식적인 사람, 그러나 철학에 대해 그다지 큰 관심이 없는 사람을 상정해보자. (물질과 기억의 역주자 최화에 따르면 “모든 이론적 투여로부터 자유롭게 가장 직접적 소여로부터 출발하자는 베르크손적 “현상학”의 말하자면 철학적 이론적 판단중지이다. 그리하여 정신이나 물질에 관한 이론들, 실재론이나 관념론 등 모든 이론으로부터 자유로워졌을 때 이제 눈을 뜨면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어떤 상, 사실은 움직이는 연속성이다.”) 만일 그에게 “당신이 보고 있는 세상은 사실 당신의 생각이 스스로 만들어낸 것입니다.”라고 말한다면, 그가 과연 그 말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역으로 그에게 “당신이 보고 있는 세상은 사실 당신이 보고 있는 것과 전혀 다른 실체입니다.”라고 말한다면, 이 역시 그에게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비칠 것이다. 어쩌면 겉멋이 많이 든 철학도는 그 사람에게 “배움이 부족하다.”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실이 체계와 어긋날 때 무너져야 하는 것은 체계이지 사실이 아니다. 세계를 그런 식으로 보는 것은 상식적으로 전혀 자연스럽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왜 그런 세계관을 받아들여야 하는가? 만일 받아들여야 한다면, 그것은 그들의 주장이 단적으로 생각했을 때에는 이해가 되지 않더라도 깊이 숙고하면 올바르기 때문에, 더 많은 사실들을 종합한다면 참으로 밝혀질 것이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그러나 만일 다른 누군가가 등장해서 상식이 맞다고 보더라도 훌륭하게 세계를 표현해낼 수 있음을 보여준다면, 우리는 상식을 부정하는 쪽이 아니라 상식을 긍정하는 쪽을 따라야 할 것이다. 그가 긍정하는 상식이 단순하고 자명한 것일수록 말이다. 바로 이것이 베르크손의 역할이었다. 너무나도 당연하게 인정되는 것처럼, 내가 눈을 감더라도 달은 저기에 있을 것이고 연필은 내가 보는 이 모양대로 생겼을 것이다. 이 시점에서 베르크손이 파악하는 세계의 기본적 틀이 나타난다. 세계는 기본적으로 두 가지 틀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나와 전혀 상관없이 필연적 법칙에 따라 굴러가는 틀이며, 다른 하나는 나를 중심으로 내게 주어지는 바대로의 틀이다. 관념론과 실재론은 이 두 틀 중 하나를 고른 후 다른 하나를 자신이 고른 것으로 환원시키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모순에 직면한다.      


  베르크손이 말한 두 틀의 공존에 근거를 더하기 위해서 그가 어떻게 관념론과 실재론의 체계를 비판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다. 실재론에서는 어떤 중심을 인정할 수 없다. 세계는 나와 상관없이 내게 보이는 것과는 다른 실재들의 세계이다. 물리학에서 대칭성원리가 인정되는 것처럼, 실재론은 특별한 중심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은 세계를 인식하며 인식의 중심은 당연히 나이다. 즉, 인식의 행위가 이루어지는 순간 세계에 중심이 생기며 실재론은 모순에 직면한다. 관념론은 실재론의 이러한 모순에서 출발한다. 그 체계에서는 모든 것이 ‘나’라는 중심을 공전한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실증과학의 결과들을, 물리학의 대칭성을 설명할 수 없다. 실증과학의 정합성은 바로 이 대칭성에서 실험이 잘 진행된다면 어디에서 진행하더라도 동일한 결과가 나타난다는 사실에서 성립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나를 중심으로 진행되는 관념론적 체계는 실증과학을 간과하게 된다. 사실을 말하자면, 두 가지 틀이 공존한다. 즉, “각 상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 그리고 주위 상들이 그것에 가하는 작용의 정도에 따라 분명히 정해진 방식으로 변하는 한 체계와, 모든 상이 오직 하나에 대해서, 그리고 그들이 그 특별한 상의 가능한 행동을 반영하는 정도에 따라 가변적 방식으로 변화하는 또 다른 체계가 존재”한다.     


  세계의 틀이 두 가지이니 필연적으로 세계에 대한 앎 역시 두 가지일 것이다. 하나는 물질적 틀에 관한 것이며 이 역할은 물리학을 비롯한 실증과학들이 잘 수행하고 있다. 나머지 하나의 틀, 나를 중심으로 하는 의식의 틀에 대해서는 무엇이 물리학의 지위를 차지하는가. 그것이 바로 베르크손이 말하는 형이상학이다. 베르크손의 형이상학은 기본적으로 정신에 대한 탐구이다. 그런데 베르크손의 두 가지 틀을 받아들인다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의문이 있는데, 두 가지 틀이 어떻게 만날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이다. 그리고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두 가지 틀 각각의 특징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물질의 특성은 무엇인가. 그것은 공간성의 산물이다. 물질은 언제나 공간 속의 위치를 점유한다. 공간은 고정성과 무한한 가분성의 상징이며 이 점은 그것의 산물인 물질 역시도 비슷하다. 물질들은 주체가 없는 세상 속에서도 자신들끼리 고정불변의 필연을 따르는 하나의 체계를 형성한다. 그것들은 명확하게 구분되고 반복되며 동시적으로 존재한다. 반면에 의식은 어떤가. 의식은 물질의 정반대에 위치한다. 그것은 공간 속의 위치를 점유하는 것이 아니다.(만일 그렇다면 유물론으로 전락하는 의미가 되어버린다.) 또 의식은 반복되지 않는다. 나와 동일한 누군가가 또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니 말이다. 의식의 체계 속에서 의식은 자연히 중심을 잡는다. 의식은 동시적일 수 없고 계기적(繼起的, 연달아 일어남)이며, 보다 정확히는 지속이다. 이것은 공간성과 대립되는 시간이다.     


  이 논의를 보다 명료하게 만들기 위해서 공간과 시간에 대해 다루어야 한다. 공간을 알아야 물질을 알 수 있고 시간을 알아야 의식을 이해할 수 있다. 베르크손의 시간이론은 기존의 시간에 대한 생각들을 부정하는 데에서 출발한다. 시간을 생각할 때 우리는 보통 시계를 떠올린다. 시계는 ‘동일’한 운동을 ‘반복’하여 시간을 ‘잰다.’ 그런데 무엇과 무엇이 동일하다는 말을 하려면 두 가지 대상이 같은 공간 속에 있어서 비교가 가능해야 한다. 반면에 우리가 실제로 느끼는 시간, 실제적 삶은 어떤가. 나의 삶은 누구의 것과도 동일하지 않은 오직 나만의 경험이며 삶이다. 시간은 유일하기 때문에 다른 것과의 동일성을 말할 수 없다. 또 실제 시간은 결코 반복되지 않는다. 아무리 어제와 똑같은 오늘이라 하지만, 그럼에도 내가 살아가는 것은 어제가 아니고 오늘이다. 나는 오직 지금을 살아가며 살 수 있다. 나아가 ‘잰다’라고 하는 것, 측정한다는 것 역시 마찬가지로 어떤 단위가 되는 대상과 측정하려는 대상이 같은 공간에 있어서 단위가 되는 대상이 얼마나 반복되는지 세는 것이므로 공간적 요소이다. 따라서 시계가 재는 시간은 사실상 공간의 궤적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시계가 실재적 시간을 어느 정도 반영할 수 있는 이유는 시곗바늘 자체가 운동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운동을 통해 시간적 요소를 확보하고 자신의 특성을 이용해 확보된 시간적 요소를 공간화하는 장치가 시계이다.   

   

  이제 베르크손의 이원론이 조금 더 분명해졌다. 한 편에는 공간과 물질과 동시성이, 다른 한 편에는 시간과 의식과 지속이 있다. 이제 논해야 할 것은 전혀 다른 이 두 틀이 어떻게 만날 수 있는가이다. 만약 이 둘이 어딘가에서 만난다면, 그것은 어떤 공간을 점유하면서도 특권적 지위를 가져야 할 것이며 분명 물질로 구성되어 있으면서도 실제적 시간을 경험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정확하게 우리의 몸에 대한 설명이다. 우리의 몸은 분명 공간성을 가지지만 우리의 모든 인식은 늘 우리의 몸을 중심에 두고 펼쳐지기 때문에 몸은 특권적 지위를 누린다. 우리의 몸은 물질로 이루어져 있으면서도 나는 매 순간 나의 실재적 삶을 경험한다. 따라서 몸은 우리의 의식과 세계가 만나는 장소이다. 이러한 사실을 곡해한 많은 사람들이 의식을 몸의 일부로 치부해버리는 오류를 범하곤 했다. 그러나 의식이 몸의 일부라면 어떻게 의식이 세계를 표상할 수 있는지를 베르크손은 반문한다. 언제나 큰 것에서 작은 것이 나오지 작은 것에서 큰 것이 나올 수는 없을 텐데, 물질인 의식이 물질 전체를 표상한다면, 의식은 물질의 일부가 아니라 물질 전체여야 한다. 이것은 모순이다. 따라서 의식은 몸의 일부가 아닌, 전혀 다른 것으로, 지속으로 보아야 한다. 다만 이것은 몸을 자신의 위치로 점유하여 세계와 만날 뿐이다. 그리고 뇌를 비롯한 신경계는 정신 그 자체가 아닌 단지 자극이 행동으로 연장되는 과정 속에 비결정성을 끼워 넣는 기관일 뿐이다. 뇌의 이런 역할은 우리가 자극에 대해 즉각적으로 행동하지 않고 이성적일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리고 역으로, 생명에 직결되는 문제일수록 자극은 뇌까지 오지 않고 곧바로 행동으로 연결된다는 것이 실험으로 확인되었다. 뇌는 처리를 복잡화하기 때문에 당연히 처리속도가 비교적 느려질 수밖에 없으니 시급한 사안일수록 뇌까지 정보를 전달하지 않는 것이 이득이다.      


  이제 몸의 기능과 의식의 위치가 결정되었으니 두 체계의 만남을 논할 수 있다. 물질과 의식의 만남, 곧 세계의 표상 과정을 단순화해서 살펴보자. 먼저 세계로부터 자극이 주어진다. 이 자극은 신경계를 통해 전달되어 마침내 행동으로 연장된다. 이 때, 문제가 되는 것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상이 어디에 형성되는가이고, 다른 하나는 의식이 어디에서 개입하는가이다. 전자를 먼저 살펴보자. 상이 의식에서 성립한다고 가정해보자. 그런데 의식은 공간적이지 않으므로 연장성이 없는데 반해 상은 연장적이므로 모순이다. 따라서 상은 외부 세계 위에, 우리가 지각하는 바로 그 대상 위에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의식은 신경계의 비결정성을 통해 개입하며 가장 큰 사례가 바로 기억이다. 우리가 어떤 대상을 지각할 때 과거의 기억이 떠오르는 것, 마르셀 프루스트가 표현한 ‘마들렌 효과’가 나타나는 것이 바로 이런 예이다.     


  이제 두 체계의 만남까지 설명이 되었으므로 처음 말한 것처럼 우리의 상식을 받아들이지 못할 이유가 전혀 없다. 이제 세계에는 두 부분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하나는 공간이고 하나는 시간이다. 공간의 편에 물질과 동시성이, 시간의 편에 정신과 기억 등의 지속이 있다. 물질은 과학의 영역으로 인정되며 마찬가지로 지속을 파악하는 것이 바로 형이상학의 일이다. 그러나 어떻게 파악할 것인가? 과학의 방법론은 명료하다. 그것은 관찰하고 측정하며 정보를 모으고 종합하고 분석한다. 그리고 이런 방법이 성립하는 이유는 당연히 그것의 대상인 물질에 내포된 공간성 덕분이다. 그런데 지속은 공간과 전혀 다른 것이다. 게다가 우리가 언제나 신뢰하는 우리의 지성 역시 완전한 우리의 편이 아니다. 지성의 목적은 생존이고 생존은 몸과 직결된 것이므로 우리의 지성은 자연히 지속보다는 공간과 친숙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지성을 도외시할 수는 없는 것이, 지성이 없이는 학문이 성립할 수가 없다. 그래서 형이상학의 길은 너무나도 어렵다. 형이상학은 먼저 지속을 파악하고, 그 뒤에는 그것을 지성으로 표현해내어야 한다. 이때, 지속을 파악하는 방법을 베르크손은 ‘직관’이라고 표현한다.     


  직관은 지속을 파악하는 것이다. 그러나 명확히 구분되지 않고 전체로서 하나를 이루는 지속의 특성상, 직관이 무엇이다라고 정의를 내리는 것은 너무나도 어렵다. 그러니 지성과 무엇이 다른지를 비교하며 직관을 설명하도록 하겠다. 지성의 방식은 일종의 연역적 추론이다. 문제가 주어졌을 때, 지성적 방법에서는 문제 속에 이미 답이 주어져있다. 반면에 직관의 방식은 말하자면 귀납적이다. 그것이 맞는지를 계속해서 개별 사건들에 대입하면서 확인해야 한다. 단적인 예로 독서가 있을 수 있다. 만약 독서가 순전히 지성적인 작업이라면, 다 읽은 책을 책장에 꽂아두는 것은 공간낭비다. 이미 그것을 다 읽었고 지성적으로 이해했다면, 그것을 여러 번 더 볼 필요가 전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개인적 경험을 들자면, 나는 이제껏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다섯 번 읽었는데, 읽을 때마다 새로운 책을 읽는 느낌이었다. 심지어는 책을 읽지 않을 때에도, 어느 날 갑자기 길을 가다가 “아, 데미안의 그 부분이 그런 내용이었구나!” 하고 깨달은 적이 있다. 이것이 독서의 묘미이며, 지속을 체험하는 순간이다. 독서는 단순히 활자들의 배열을 암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면에 가려진, 활자들의 나열 속에 작가가 진정으로 표현하고 싶었던 것을 포착하고 그것을 내 안에서 재창조하는 작업이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무언가를 직관한 순간이다. 그런데 보통 그런 순간은 훈련을 거듭할수록 더 잘 찾아오는 것으로 보인다. 책을 한 번 읽을 때보다 여러 번 읽을 때 더 많은 것을 알게 되지 않던가. (그렇지만 이건 지금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이제 글을 갈음하자. 직관은 지속에 대한 인식이다. 형이상학은 지속을 직관하고 그 결과를 지성으로 풀어내는 작업이다. 그러면 이제 논의를 정교하게 만들기 위해 더욱 나아가자. 베르크손이 말하는 직관은 데카르트가 말하는 직관, 명석하고 판명한 지각과 같은가? 어떤 의미로는 그렇고 어떤 의미로는 아니다. 베르크손의 직관은 데카르트의 직관을 확장한 동시에 재해석이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왜곡이다. 우선 데카르트의 직관은 코기토에 대한 것이었으며, 외부 세계의 현존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신의 인준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베르크손의 경우, 외부 세계의 현존은 그 자체로 주어진다. 이 시점에서 다소 의문이 생긴다. 직관의 대상은 지속인데, 그렇다면 외부세계는 지속인가? 이는 어떤 의미에서 그렇고 어떤 의미에서는 아니라고 답해야 할 것 같다.     


  지속은 전체로서의 통합성이며 달리 말하자면 질적 측면이다. 그러면 공간에서 모든 질을 제외하면 뭐가 남을까?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왜냐하면 공간 역시 적어도 그것이 공간인 한, 공간이라는 질적 속성을 갖기 때문이다. 순수공간은 이론적인 극단일 뿐, 사실 존재할 수 없다. 나아가 세계는 세계로서 하나의 통합성을 갖는다. 소위 말하는 우주의 조화라는 것들이 그렇다. 모든 물체들이 상호간에 관계를 맺음으로서 전체로서의 통합성을 형성하고, 그 궁극적인 기저에 공간이 있다. 그러므로 외부세계 역시 직관의 대상이다. 이 때 직관되는 것은 순수공간이 아니다. 순수공간은 지성적 사유 작업의 결과로 추론된 것일 뿐이다. 우리가 실제로 체험하는 공간, 직관하는 공간은 결코 순수공간의 그것과 다르다. 예를 들어보자. 소 한 마리를 생각하자. 지성적 사유는 이 소가 어디에 있든 상관없이 소로서의 본성을 갖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게 지성이 좋아하는 공간적 사유이다. 그러나 우주 공간에 소 한 마리가 떠 있다고 생각해 보자. 그리고 우리가 그것을 본다면, 그 순간 우리는 뭐라고 생각할까? “어 소다!”라고 생각할까, 아니면 “저게 대체 뭐지?”라고 생각할까? 아마도 후자일 것이다. 소는 결코 소 자체로 존재하지 않는다. 소는 그것이 존재하고, 또 존재할 수 있는 상황적 맥락 속에서 주어진다. 이것이 바로 전체로서의 통합성이며 지속이다. 따라서 베르크손의 직관은 신의 보증 없이도 세계의 현존을 체험한다. 그런데 우리 역시도 이 전체로서의 통합성의 부분이다. 그러므로 베르크손에게 있어 나의 현존에 대한 직관, 즉 코기토는 곧 세계에 대한 직관으로 확장된 것이다.      


  이런 사유가 현상학과 대체 무슨 상관이 있을까? 베르크손의 사유는 모든 지성적이고 논리적인 편견을 배제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이런 발상은 흄을 떠올리게 하지만, 흄과는 전혀 다르다. 그는 이런 편견이 궁극적인 근거가 없다고 생각하여 부정했다. 반면 베르크손은 이런 편견을 배척한 이후, 그럼에도 남는 것을 찾아낸다. 그는 더없이 자명하게 주어지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사실, 자명하게 주어지는 것을 대체 왜 의심해야 하는가? 당연한 것을 의심하고자 한다면, 당연히 이를 의심하는 쪽에서 입증책임을 져야 한다. 의혹만으로 부정할 수는 없다. 그리고 이것이 현상학의 정신이다.     


  현상학은 기본적으로 현상에 대한 학문이다. 현상은 대상으로부터 나온다. 이 때, 현상학은 대상의 존재를 의심하거나 문제 삼지 않는다. 단 자하비가 지적한 것처럼, 현상학에서 문제시 하는 것은 대상을 바라보는 나의 태도이다. 이 태도를 배제해야 한다. 이를 전문용어로 “현상학적 판단중지(epoche)”라 한다. 그리고 이런 사유를 통해 주어진 현상으로부터 모든 억견을 배제하고 ‘사태 그 자체’로 돌리는 것을 “현상학적 환원”이라 한다. 그러나 아무 편견 없이 세계를 바라볼 수는 없다. 그러므로 현상학적 노력은 결코 끝나지 않으며 다만 점진적으로 진행되는 작업일 뿐이다. 이것이 후설의 생각이다. 사르트르는 조금 달리, 가장 궁극적인 의심을 통해 단 번에 현상학적 환원을 완성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에 대한 내용은 이후에 나올 것이다.    

 

  이렇게 현상학의 역사 속에 베르크손의 위치를 규정하는 것을 일단락 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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